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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젊은작가포럼] [산문]김백리/ 이 땅은 당신들만의 땅이 아니다
이름 관리자



이 땅은 당신들만의 땅이 아니다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 김백리 '행동하지 않은 자의 반성'

2006-06-09 오후 5:02:21


작가회의 지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농가 곁으로 난 길을 걸었다. 그 농가로 들어가는 다리 입구는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로 막혀 있었다. 차량이 출입할 수 없었다. 컨테이너 박스 사이를 비집고 다리를 건넜다. 농가들은 콩밭이며 무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옆 농가와는 대충 예의를 차릴 만큼의 간격이었다. 대체로 이층을 올린 농가들은 어디 한쪽 허술한 곳이 없을 정도로 깨끗했고, 살뜰히 보살핀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이름은 알지 못했다. 몰라도 상관없었다. 다만 그곳이 거기, 대추리와 이어지는 길목인 것만은 분명했다. 봄볕은 따뜻했다.

5월 14일, 대추리로 가는 길은 사방팔방 막혀 있었다. 평택역의 택시 기사들은 대추리로 갈 수 있느냐는 물음에 야박하게 고개만 가로저었다. 난감해진 일행은 다시 전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더 갔다.

일행을 안내했던 사람은 대추리 출신 박후기 시인이었다. 전철에서 내려 김밥집 앞에 멈추었다. 박 시인은 김밥집 아주머니와 금방 말을 트더니 이내 택시 두 대를 부르게 했다. 영업용 택시가 아니었다. 승용차를 대절해서 우리는 대추리와 가장 근접한 지역으로 달려갔다.


얼마쯤 달려가자 우리가 대추리 쪽으로 제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넓은 들판 군데군데 경찰인가 군인인가로 보이는 이들이 무리무리 서 있었다. 그 논두렁 밭두렁 사이로 청년이며 학생들로 보이는 이들이 꾸역꾸역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좁은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가야만 하다니. 하지만 그렇게라도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면 대추리는 먼산바라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의 시위 현장에 익숙해선지 전투복을 입고 논과 밭두렁 사이에 서 있는 전경 무리 역시 기괴해 보였다.

대추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던 길섶에서 어느 시인이 풀을 뽑아 들었다. 풀을 까뒤집고 하얀 속살을 꺼내 우리들에게 먹어보라며 건네주었다. 나는 더운 기운에 점퍼를 벗어들고 있었다. 풀의 속살 맛은 쌉싸름했다. 시인이 또 한마디 던졌다. '옛날에는 참 풀피리도 많이 불었는데'. 그새 어느 소설가는 시원한 숲 그늘을 바라보며, 저기서는 삼겹살 구워먹으면 딱 좋겠다고 했고,
누군가는 저기 언덕 완만한 곳에다 작업실 하나 내면 진짜 좋겠다며 마른 침을 삼켰다. 신록 가득한 5월의 전원에서 봄기운을 안주로 한 마디씩 던졌던 것이다. 마을은 너무도 고요하고 온화해서 숲 속 어딘가로 숨어들어가 한숨 자고 싶을 정도였다.

한참을 걸어서 발바닥이 아파올 무렵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대추리는 과연 들어갈 수 있는 걸까 하고 말로 물으려던 참에 군경 차량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대추리에 근접한 거였다. 철망이 쳐진 경찰 차량은 참으로 오랜 세월, 수십 년이나 눈에 익은 것이었다. 흉물스럽던 도시의 그 버스들이 대추리 도두리 인근 지역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삼각주를 연상시키는 지형 가장자리로 경찰과 군인들이 새까맣게 깔려 있었다. 깃발을 든 시위 참가자들과 군경이 대치하고 있었다. 좁은 길목에서 양쪽은 팽팽히 맞섰다. 미군기지 이전 반대 참가자들은 간간히 구호를 외쳤다. 꽹과리를 쳤다. 방패를 든 경찰들도 때론 긴장하고 때론 잠시 쉬는 모습을 보였다. 골목 옆 이층집들 위에는 언론사 기자들과 외신기자들이 대치상황을 지켜보았다. 사진부 기자들은 카메라 접안렌즈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봉쇄망을 뚫고 안쪽의 참가자들과 합세하려고 주위를 살폈다. 여러 골목을 돌았다. 그러나 틈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참가자들 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일러주었다. 한쪽 길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군경들은 우리의 통행을 막지 않았다. 집회 참가자들과 합세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군경은 참가자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을 필요가 없었다. 참가자들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으니까. 대추리로 들어가는 길들은 경찰이 터놓은 것 말고는 초입부터 모두 막혀 있었다. 참가자들은 통발로 걸어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쨌건 영등포역에서부터 기차, 전철, 택시, 걷기를 통해서 힘겹게 들어가려 했던 대추리는 먼발치로도 다가갈 수 없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대추리로 가야겠다고,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대추리로 가려고 마음먹었던 며칠 전이었다. 티브이나 신문의 보도를 접하면서 그동안 고민이 없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면이 심각해지고 한편으로는 절망적으로까지 보이는 사태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
을 짓곤 했었다. 그러다 어떤 자리에서였다. 어렵사리 나는 대추리와 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내 생각을 잠깐 피력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반응은 충격적일 정도여서 서글펐다. 그들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렇다 해도 대추리 문제를 쓰레기 매립장 문제와 동일한 님비현상으로 판단하거나, 미군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지 않느냐는 식의 말들을 거리낌 없이, 말간 얼굴로 내뱉는 것을 들으며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몸 둘 곳을 몰랐다. 그날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그동안 아이들을 키우고 허덕이며 (물론 생업을 잇는 것은 중요하다) 살아 왔던 내 모습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가 부끄러웠다. 세계관이 저마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동일한 역사의 땅에서, 동일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현실인식이 어쩌면 이토록 상반될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 왔던가 하는 자책과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대추리는 토지 수용과 농민 보상에 관한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보상 차원의 문제라면 토지 수용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면 되는 것이다. 보상 차원의 문제라면 시위자들은 분명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고속도로며 고속철 공사와 관련한 보상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던 사람들이 어째서 유독 대추리 보상 문제에는 팔 걷고 나서느냐고. 형평성 문제도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한미행정협정의 내용과 그 배경을 잘 모르고, 미군기지 이전에 관한 협상 내용을 세세히 알지 못하고, 서울의 알토란 같은 용산기지에서 왜 하필이면 대추리 땅으로 미군 기지를 이전하려는 건지, 미군기지 이전과 분단문제는 어떤 관련이 있으며, 북한 미사일의 유효 사거리는 얼마인지, 최근 일본이 주일미군 작전재량권에 관한 협정을 하면서 왜 그토록 많은 것을 미국에게 보장을 해주었는지, 미국은 어째서 일본에게 작전재량권을 얻어내려고 했는지, 그러한 변화들이 중국에 대한 미국의 미사일방어계획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어째서 미군은 한반도에서 미군병력을 우리 정부의 동의 없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려 하는지, 미국의 필요에 의해 이전하는 기지를 위해 토지 수용이며 건축에 이르기까지 왜 우리가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군사계획들이 한반도와 민족의 미래에 어떤 장애가 되는지 일일이 모를 수도 있다. 부모도 선생님도 알려주지 않는 그러한 내용을 구태여 알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할 것이었다. 대중의 낮은 정치의식만을 탓할 수는 없어서 뜻있는 사람들이 그동안 발로 뛰고 몸으로 부닥치며 온 힘을 다해 그 일을 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늘 주의 깊게 살펴보려고 하면서도 그냥 눈으로, 귀로 바라보고 듣기만 한 것은 아닌가. 부끄럽지만, 누군가 그 일을 하겠거니 믿으며 생활고를 이유로 방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키보드만 쳐대고, 원고 쪽수나 헤아리고 있었으며, 내 코만 석자인줄로 알고 급급하게 살아온 게 사실이었다.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혐오시설에 반대하는 지역 이기주의와 동일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을 만난 뒤, 나로서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참담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관절염으로 푹푹 꺾이는 다리를 이끌고 대추리로 가야만 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몸으로 행동하지 않았던 자의 반성.


참가자들이나 경찰들이나 모두 몸을 사리는 듯했다. 참가자들은 이미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포위되어 있었다. 군경 지휘부는 지난번의 과잉 진압에 대한 언론보도를 의식했을 것이다. 깃발을 든 참가자들 뒤에 서서 구호를 따라 외쳤다. 한 시간 여 목이 아파라 외치던 끝에 일행은 평상이 놓여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잠깐 자리를 쓸고 앉았다. 논두렁 너머로 캠프 험프리가 눈에 들어왔다. 캠프 구내에는 이미 미국 병사들을 위한 새로운 아이보리색 건물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나는 아픈 다리를 뻗고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골목 앞에 있는 커다란 볼록거울을 통해서 골목 밖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소위 적진의 옆자리였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군경들은 도시락을 먹었다. 집회 주최측에게선 아무 소식도 없었다. 우리는 끈 떨어진 신발 마냥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작가 중 누군가가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피로에 지쳐 눈이 뻘개
있던 그는 신문지 몇 장을 깔고 흙바닥에 드러누웠다. 그 사이 헬리콥터가 떴다. 헬리콥터는 참가자들을 괴롭힐 요량인지 낮게 떠서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삐라도 뿌려댔다. 우리는 몇 번씩이나 온 몸에 모래바람을 뒤집어썼다. 잠들었던 작가가 추운 듯 몸을 떨었다. 그의 누운 몸 위로 먼지며 흙이 잔뜩 뒤덮였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듯 그는 그 소란과 먼지바람 속에서도 눈을 뜨지 않았다.

황규관 시인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무슨 천인가를 끄집어냈다. 선연한 분홍색으로 물든 그 천에는 민족문학 작가회의가 준비한 미군기진 이전 반대 구호가 적혀 있었다. 강경한 어조와 힘찬 내용으로 현수막을 준비해 왔지만, 그때껏 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내걸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이거라도 덮어줘' 황 시인이 현수막을 다른 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러자 두어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이왕이면 구호가 보이게 덮어!' 흙바닥에 잠든 시인의 몸 위로 구호가 적인 분홍색 현수막이 반듯하게 덮였다.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웃음을 참았다.

어디서도 구호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숨 막힐 듯했던 좀 전의 긴장감도 다시 가라앉았다. 아마도 얼마 후엔 다시 구호를 외치고 함성을 지르고 깃발을 흔들 것이었다. 시위는 하루 종일 되풀이 되었으니까. 결국 몇몇 대표자들의 연설을 듣고 구호를 외치고 다시 대추리 문제를 공론화하자 다짐하는 순서로 그날 집회는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일행들은 마무리 직전에 자리를 걷었다.

간신히 버스를 얻어 타고 일행은 평택 시내로 나왔다. 날도 어둡지 않은데 아무런 한 일 도 없는 것 같은 허허로운 맘으로 집에 돌아가기가 걸음이 망설여졌다. 늦은 점심이나마 먹자며 어느 식당으로 향했다. 일행과 일부 지인들도 합세를 한 식당에는 다른 일반 손님들도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그곳이 평택이었고, 우리의 행색을 보면 어떤 부류의 인간들이라는 것쯤은 대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간간히 노래가 나오고 술잔이 도는 그 사이에 나이가 지긋한 양반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내가 다시는 이 집에 오나봐라, 주인장, 이것 뭐야?'

이쪽에 대해 못마땅하고 불쾌한 나머지 터져 나온 볼멘소리였다. 두 말할 것 없이 대추리 문제와 관련한 이쪽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리라. 미군기지의 대추리 이전이 그 개인에게는 얼마간의 중요한 이득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러나 미군기지 이전이 대추리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듯 이 땅에 대한 고민과 발언도 땅 소유권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차창으로 스민 어둠을 내다보며 나는 몇 가지 다짐을 했다. 나로부터 시작할 것, 우물거리지 말 것, 이제는 입속으로만 삼켜버리지 말 것, 이 땅이 당신들만의 땅이 아니지 않느냐고 당당히 말할 것. 그것이 내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또한 우리가 함께 주인 되어 살아갈 이 땅의 미래를 제대로 지키는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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