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30주년 선언문

거리에서 시작한 역사가 30년에 이르렀다. 1974년 11월 18일, 광화문에서 모인 누구도 오늘의 자리를 기대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한 것도 아니었다. 지난 30년 동안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이 땅의 문학사였고, 민족사 자체였다.
당시 우리 앞에 놓인 ‘근대 한국’의 역사적 노정은 진보의 순조로운 서사가 아니라 분절되고 산산조각 난, 20세기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었다. 식민지 체험 이후의 정치적 소요, 무참한 전쟁, 수백만 인구의 죽음과 이동, 그리고 절망적인 분단과 가난…. 그로 인해 산업화는 두 번이나 군사 쿠데타를 겪었고, 민주화는 세 번 이상의 대규모 민중항쟁을 치르고서야 길을 찾았다.
그 같은 역사적 운명을 수락한 자에게는 고통이 따랐다. 창작의 고뇌가 흐르던 작은 방에서, 혹은 가두 투쟁의 거리에서 몇몇은 수배자가 되어 뒷골목을 떠돌고, 몇몇은 감옥으로 갔다. 또 몇몇은 멈출 수 없는 문학의 열정과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쓸쓸히 사자(死者)의 길로 떠났다. 그들의 이름이 귀에 쟁쟁하다. 돌아보니, 아프다.
그러나 어떻든 우리는 역사의 행위자로서 오늘도 새로운 삶을 찾아야 되고, 삶의 다른 이름인 꿈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지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회와 집단이 있고, 역사 속에는 수없이 훌륭한 시대들이 있지만, 우리에게 부여된 곳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이곳, 이 시대뿐이다. 30주년을 기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땅의 현실은 문명세계가 야기한 거의 모든 위기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근대 이후 인류는 물건을 편리하게 얻기 위해서 자연에게 매우 거칠고 완력적인 방법을 써왔다. 20세기가 끝나갈 때 인류의 과학기술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락과 파괴적 잠재력이 더 이상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먼 옛날부터 국제분쟁의 중재자였던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파멸뿐인 지점에서 냉전의 막을 내렸지만, 지구촌의 대부분은 아직 그 시대의 골목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문학적 지성이 공동의 선에 이바지해야 할 이유는 너무도 많다. 세상에는 날마다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는 컴퓨터, 정보 유통의 양이 점점 많아지는 휴대전화, 거미줄처럼 얽힌 초고속 인터넷, 수많은 고속도로와 자동차들이 있지만 낱낱의 인간들은 서로 멀기만 하다. 거북의 등처럼 단단한 껍질을 가진 산업문명의 과잉보호 속에서 아이들은 자연과 불화하고, 어른들은 이념의 질곡, 전통적 가치관의 급격한 붕괴, 지구 자원의 과잉 소비, 개발론과 환경론의 충돌로 매일 같이 ‘사회적 갈등의 백화점’을 펼친다.
이 모든 세상살이의 곤혹 위에 우리의 민족적 과제가 중첩되어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 살면서 어느 사회보다 열심히 평화를 갈구하는 일처럼 고독한 것은 없다. 내년이면 광복 60주년이 되지만 남북은 여전히 중무장한 요새와 같은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대치해 있다. 근대를 폭력으로 누려온 군사적 강국들에 의해 근거지도 빼앗기고 근대 체험의 선결조건인 민족국가의 형성도 이루지 못한 채 슬픔의 공동체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분단된 두 개의 체제를 화해시키고 통일을 이루어 한국근대사의 새로운 차원과 세계사의 숙제를 완성할 것인가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 미완성적 허기를 우리는 문학적 고투로 채워갈 것이다. 70년대를 이끈 선배들이 그랬듯이, 선배들의 작품을 읽고 성장하여 80년대를 이룬 후배들이 그랬듯이, 또한 그들의 작품에 감동했던 오늘의 신입회원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문학으로 번영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30년 역사의 획을 그으며, 죽은 자에게, 산 자에게, 또 이 땅을 전해 받을 미래의 주역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하나, 우리는 과거의 영광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변화를 위협으로 인식하는 집단에게는 희망에 찬 미래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 우리는 아무리 발전된 제도와 권력이 출현해도 체제화의 유혹을 참을 것이고, 반체제의 관성도 버릴 것이다. 세속적 권력으로부터 영원히 망명해버린 ‘하나의 독자적인 정부’로서 문학이 우리에게 준 비체제의 자리를 지킬 것이며,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인간의 행복에 장애가 되는 것들과 싸울 것이다.
하나, 모국어 문학의 온전한 크기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현재 추진 중인 민족작가대회를 끝까지 성사시켜 북한과도 문화의 영토를 함께 누릴 것이며, 해외의 동포들과도 아름다운 모국어를 함께 나눌 것이다.
하나, 민족문학의 지구촌 시대를 열어갈 것이다. 한 시대의 미학적 준거 틀은 지배자의 용모라는 말이 있다. 국제사회는 아직도 지배자의 용모를 기준으로 한 힘의 미학이 질서화되어 있다. 우리는 이 지배 미학의 전횡에 맞서서 자연의 용모를 기준으로 한 아름다운 국제 연대를 만들어갈 것이다.
하나, 앞으로도 계속 문학적 연민에 의한 사회적 실천과 투쟁을 수행해갈 것이다. 불의한 힘에 의해 억울한 일을 겪거나 소외되고 있는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손을 내밀어 문학이 언제나 그늘을 알고 있음을 알릴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 같은 과제를 헤쳐 가는 과정에서 과거형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며, 30년 동안 쌓아온 힘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는 일에 사용할 것이다.

2004년 11월 18일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