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말향고래]
(실천문학, 2007년 7월 16일)


첫 시집 <아버지의 도시>(2003)에서 생명감 넘치는 이미지와 생득적 언어를 구사하며 강렬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던 정영주 시인이, 4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발표했다. 예사롭지 않은 유년기의 경험과 기억들을 더욱 심화하면서, 존재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선명하게 내보인다.

시인은 이전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구체적 삶의 리얼리티보다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미지는 '고래'와 '사막'이다. 생의 불모성과 존재의 시원을 동시에 암시하는 '사막'의 이미지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신성에 가 닿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을 보여준다. 또 한편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의 형상이다.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정영주 시의 새로운 특징은 한결 느릿해진 시간의 풍경에 있다. 격정의 시간을 추슬렀던 젊은 날의 시적 욕망을 가라앉히면서, 조급함과 서두름 없이 느릿한 시간의 풍경을 관조하는 시인의 눈은 그래서 맑고 풍요롭다.

정영주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나 강원도 춘천, 묵호에서 성장했다.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9년 「대한매일」 신춘문예에 '어달리의 새벽'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버지의 도시>, <말향고래>가 있다.

::책 속에서

말향고래

하늘 귀퉁이
가장 빛난 곳 하나 저며 바다에 던지면
겹겹이 일어나 눈부신 낯빛이 되는 바다
그 빛살 기포 터뜨리며
오래전 고래들이 흘리고 간 전설을 듣는다

오래지 않은 날
단번에 몸의 옥합을 깬 말향고래
바다에서 육지까지 향기름 흘려 보내면
출렁이는 전령, 그 육중한 고래의 진저리

이제 신화가 된 고래의 늑골 하나 빼내어
내 빈 곳 채울 수 있다면
스스로 말향고래가 되어 심해까지
내려가 심장과 내장 뼈 마디마디
썩지 않을 기름으로 채울 수 있다면

속 끓어도 닳지 않는 혀가 있는 바다
닳는 혀 없으니 언어마다 정금인 바다
황홀한 전언이
기름 향에 절여져 휘돌아온다

대지의 언어는 이미 썩고 문드러져
지독한 사해의 염분을 끌어다 절여서라도
말향고래 등에 얹혀 보내고 싶다
그 뒤로 흘러드는 향기가 낙관으로 찍혀
세상 모서리마다 말씀이 된 고래로 돌아온다면



::시인의 말

어디서 잡아왔는지,
내 안의 사막은 산 한 마리 잡아다 눕혀놓고
산 채로 각을 떠놓았다.
여기저기 살이 패어 벗겨진 채 꿈틀거린다.
갈라지고 터진 것들의 집합,
사막에서는 다 벗겨진 남루가 왜 그리 아름다운가.
황폐한 것들이 주는 미학에 취해
한동안 비틀거리다 주저앉는다.
내 몸 여기저기에 물집이 잡혀 있다.
벌겋게 벗겨져 소금꽃이 피어 있다.

사막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고래가 머리를 들었다.
거대한 몸체를 흔들며 고개를 든 고래의 몸에서
허연 모래가 물처럼 쏟아졌다.
화석이 된 눈물로 혀를 대신한
바다의 족적들을 모래에 옮겨놓은 흰 고래들,
거대한 모래 문자였다.
사막에 가서야 한 목숨 건너는 일이
독한 일몰이고, 화석으로라도 살아남고픈 고래이고,
모래 혀가 된 바다인 것을 알았다.
어떤 황량함이든 그 속의 언어는 예언이고 말씀이고
사랑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내 밖에서 내 안을 들여다본 가난한 모래 시어들,
쌀 반 모래 반으로 지어진 바람의 식탁 위로
지붕이 얹힌다.
따순 밥을 먹을 수 있는 집을 지어줘서 고맙다.

- 정영주


::추천글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하나도 풍경 아닌 상처가 없다. 불행한 가족사의 점철이 내면화된 풍경은 삶의 극복 의지와 '말향고래'의 향유 같은 구원의 열망을 꿈꾼다. 묵호항, 대진항, 화진포 등 그의 현실 속에 고통으로 다가서는 바다는 "고래가 건너는 사막"으로 각인되면서 피 흘리는 언어들로 낱낱의 시편을 이룬다. "세상을 똑바로 보는 일은 언어에 칼을 세우는" 일이며, 이 경우 '생체험'이란 말은 얼마나 소중하고 실감나는 말인가. - 송수권 (시인)

취한 아버지는 코를 골고, 어머니는 밤새 삯바느질로 몸이 곯아가던 유년, 시인은 내내 다락방에서 짐승 한 마리를 길렀던 모양이다. 필시 다락방보다 훨씬 컸을 그 짐승은 비루한 현실을 먹고 자란 찬란한 몽상, 혹은 뱉어내지 못한 울분 같은 것이었을 터인데, 정영주의 시가 종종 사막의 낙타나 전설 속의 고래를 불러낼 때 그의 시는 영락없이 다락에 갇힌 말향고래의 꿈을 닮는다. 그것을 정영주 시의 낭만주의적 원심력이라 하자. 그러나 그의 시 속에는 원대하지만 막연한 원심력을 제어하는 구심력 또한 존재한다. 그 구심력은 주로 바다 마을 아이들의 입 속에서 터지는 '도루묵알'이나 살과 내장은 다 내주고 뼈만 남은 모항의 겨울나무 같은 것들, 그러니까 '삶'이 만드는 힘이다. 그 구심력이 말향고래를 머나먼 원해로 영영 회유하지는 못하게 한다. 정영주의 시편들은 모두 원해에의 꿈을 스스로 포기한 말향고래가 지상의 것들에게 건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김형중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