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효환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인디오 여인]
(민음사, 2006년 5월 26일)


1996년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3'을, 2002년 「시평」에 '수락산'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곽효환 시인의 첫 시집이다. 서정과 서사의 유기적 결합을 시도하는 67편의 시가 실렸다.

주변의 사사로운 것에 까지 눈길을 주어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는 시인의 폭넓은 세계 인식,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타에 대한 치열한 탐구 정신이 돋보인다. 시대의 격변과 함께 맞이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서글픈 질타와 쓸쓸한 고독의 정서도 여러 시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곽효환 1967년 출생. 1996년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3'을, 2002년 1월 「시평」 겨울호에 '수락산'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06년 현재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재직 중.

::책 속에서

군옥수수를 파는 인디오 여인

물 위에 세운 도시
그러나 강이 흐르지 않는 땅
이곳의 광장은 숨어 있다
대성당, 궁전 혹은 관공서 가운데 분지처럼
하오 다섯시의 광장, 줄지어 선 군인들의 국기게양식
뱀의 몸통을 문 독수리의 모습에서
호숫가에 선 선인장에서 광장은 엄숙하다
흐린 여름 하늘 아래 도시의 전설은 천천히 날개를 편다
광장의 과거를 덮은 대성당의 과거는 아스텍의 신전(神殿)
밑동을 드러내다만 발굴을 중단한 인디오의 사원
수세기를 넘나드는 좌판 시장에서
군옥수수를 파는 인디오 여인의 그늘진 얼굴
그 얼굴에 어린 어머니
그녀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다시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제1의 사탕수수의 해 무렵
뗏목을 타고 돌아온 사람 닮은 신(神)을 위해 준비된 성스러운 처녀
아니 열한 척의 배를 타고 건너온 말을 탄 정복자의 정부(情婦)
그녀가 몸을 섞을 때마다
해가 다시 뜨고 하얀 전설이 들썩이고
그녀의 산통(産痛)을 빠라 북이 울리고 피가 흘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또 모든 것이 새로이 세워졌다
하여 그녀는 인디오의 첫 번째 어머니
사라진 문명의 광장을 따라 흘러가는 얼굴들
새로운 문명의 광장을 따라 모여드는 사람들

어머니의 기다림은 새로운 태양의 시대
뗏목을 타고 떠난 케찰코아틀의 귀환
해가 뜨는 동쪽 바다를 건너 백마 타고 온
수염 기른 하얀 성인을 맞은 그날은 슬픈 첫날밤
그 밤, 갓 초경을 치른 스무 명의 성녀의 몸은
정복자의 욕망의 배출구가 되고
인디오의 왕은 동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어갔다
그녀의 별자리는 불운과 투쟁
그녀의 운명은 제5의 태양의 시대를 내린 증인
성욕(性慾)과 언어(言語)의 중개자
동족을 등진 첫 번째 여인


::시인의 말

늦지 않았는가.
오랫동안 그물처럼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화두이다.
그래서 늘 두려웠다. 몇 번을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과 풍경의 서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편들은 내 몸을 부리고 살았던 시대의 중심과 주변에 대한 비망록이다. 중심에 선 사람들, 중심에서 주변으로 혹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옮겨 선 사람들, 내내 주변에 머문 사람들 그리고 내 시선이 머물렀던 곳과 사람들에 대한.

- 곽효환


::추천글

곽효환 시집 <인디오 여인>을 읽으면서 삶이 나그네 길이란 평범한 사실을 다시 실감했다. 한 나그네가 나그네 길에서 보고 듣고 한 것을 세세하게 적고있고 그것이 그대로 삶의 감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인 곽효환은 눈과 귀를 활짝 열어놓고 주목하며 경청하며 적어 두는 젊은 나그네다. 그의 길은 멀리 서반구의 쿠바나 멕시코에서 북쪽의 러시아, 유럽의 파리에서 아메리카의 샌프란시스코까지 뻗쳐 있다. 또 나그네로서 그가 주목한 것은 과거가 묻혀 있는 고대 문명 유적에서 미수로간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귀 기울인 뒤에 들려주는 인간극도 러시아의 고려인으로부터 한반도 서남부의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나그네의 눈과 귀는 특수 속에서 보편을 보고 듣는다. - 유종호 (문학평론가)

곽효환의 시는 발로 명상한 여행의 기록이다. 그의 시에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단어는 '길', '가다', '찾다', '만나다' 등이다. 그의 발은 뒷산에서 천수만, 순천만을 거쳐 백두고원으로, 멕시코에서 미국, 유럽을 거쳐 모스크바로 쉬지 않고 가고 있다. 그의 시를 읽는 내내 나는 그가 왜 숙제하듯이 "중학교 1학년 도덕교과서를 읽듯이" 그렇게 성실하게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것은 사당동 산 17번지 시절, "산 위에서 산 아래까지 물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던" 십삼 세 소년의 아픈 기억을 그의 발이 자기도 모르게 되새김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그 아픈 "마음의 중심을 가로질러, 마음의 봉우리를 따라" 난 "작은 길"에서 시작하여 사랑과 희망에 이르는 기나긴 길 위의 "서사시"이다. - 김기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