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미 시인의 첫 시집 [곰곰]
(랜덤하우스중앙, 2006년 1월 20일)

2001년 계간 『문학동네』로 데뷔, 그간 활발한 시작 활동을 보여준 안현미 시인의 첫 시집이다. 그간 거침없고 활달한 상상력에 자기만의 독특한 말법을 첨가하여 눈길을 끌어온 시인은 그러나 요즘 젊은 시인들을 일컬어 명명되어온 ‘미래파’의 일군과는 사뭇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는 데서 또 하나의 독특함으로 우뚝하다.

무엇보다 이 시집은 아주 쉽고 재미나게 읽힌다. 도무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해독 불가다, 라고 비판해온 이들에게는 참으로 반가울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말과의 전쟁에서 벌이는 싸움이 늘 방어적인가, 하면 아니다! 시인은 우리말을 가지고 노는 데 있어 자기만의 독특한 스킬을 발휘할 줄 안다. 도마 위에서 말을 요리할 때의 시인의 칼질솜씨를 한 예로 들어보자.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라고 「비굴 레시피」에서 밝힌 바 있듯 시인은 ‘비굴’의 중의를 한 쌈에 쌀 줄 안다. 이런 방식은 시집 곳곳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짜가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짜가투스트라’, 『육교』의 육교(肉交), 『갈대밭에서 읽다』에서의 “나 오독한다/오! 독한 나”, 『대낮의 부림나이트로 오실래요?』의 “몸)復臨”, 『실패라는 실패』에서의 “실패라는 실패” 등등) 그 방식은 아주 감각적이고 유연하며 세련되어 단순한 장난으로 보기에는 무게감이 제법이다.

각설하고, 시인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짠함에서 비롯된다는 데 우선한다.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기다림으로 점철된 유년의 통로를 그녀 역시 빗겨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감한다. 그러니까 웃는다. 그렇다고 진지하지 않은 고백인가, 하면 아니다! 유행가 가사를 빌리자면 시인의 시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애련한 감정의 뒤범벅이다. 바로 이 기저에 무게 있는 말의 펀fun이 듬뿍 첨가되어 신선도를 더했다는 거, 그래서 새로운 시의 요리로 메뉴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는 거, 곰곰 맛을 떠올려보니 참 독특하다는 거, 그러니 맛볼 수 있는 모든 이들이 혀를 대고 흠뻑 음미했으면 바라는 거, 그게 바로 신인들의 첫 시집을 읽는 참맛이라는 거, 알게 해주는 맛있는 시집이 바로 안현미의 『곰곰』이다.

안현미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2001년 계간 「문학동네」로 데뷔하여 작품활동 시작.

::책 속에서

곰곰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


::시인의 말

품에 안고 동냥젖을 물려준 언어들과
나를 가여워하시는 모든 애인들께
오체투지!

2006년 1월
안현미


::추천글

안현미 시인의 시들은 "수상한" 시간에 씌어진 "한계와 임계" 사이에서 길어낸 "거짓말"이다. 그의 "거짓말"들은 "옥탑방" 안에서 "밤 속의 밤"에 "비밀의 문이 열리고" "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지"는 순간에 배임된다. 혹은 "오후 세시"로 "구렁이를 탄 계집아이가 날아가"는 순간에 자라나는 "거짓말"이다. 거짓말의 긴장이, 혹은 "활짝 핀 착란"이 그에게 시를 쓰는 자의 문을 열어주고 "기차표 운동화"가 문을 닫아놓는다. 아니다, 그 문 닫음이 이 시인의 시작이었다. "기차표 운동화"란 무엇인가? 아마도 안현미 시인이 시를 처음 시작할 때 마음 속 가장 깊숙이 걸어둔 생의 그림은 아닐는지. 그리고 아마도 그 운동화 바닥에 찍혀진 기차가 운동화를 빠져나와 칙칙폭폭, 시로 한 세계를 일구려는 자의 마음의 너른 들을 달릴 때 우리는 한 시인의 탄생을 지켜보며 행복해 질것이다. - 허수경 (시인)

너는 목격하듯 너를 지운다. 나무가 뿌리보다 복잡하게 얽힌 하늘을 물레질하면 이제 겨울의 시절이다. 한 번 더 일기장을 찢으면 이제 아이에서 엄마가 되는 꿈. 또 한 번 더 편지를 태우면 너는 너와 춤추는 꿈. 언젠가 나 자신을 배웅하고 싶었는데 그날이 결국 오늘이군,이라 말하며 너는 미루나무를 사랑했고 그러나 미루나무 잎새 만큼은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젖지만 않았을 뿐, 밤은 고향의 검은 물 위를 종이배처럼 떠서 이곳까지 흘러왔다. 가혹한 배웅 후에 붉은 방에서 너는 너의 후생만 믿었다. 마지막 꿈에 도착하고 싶었니? 너는 너를 낳듯 너의 엄마가 된다. 여름엔 모든 요일들이 다 있었고 겨울엔 그 중 신의 날만 없었다. 느리고 무더운 사티의 계절엔 깊이 드는 잠이 테이블 위 조각보에 잘 어울릴 것이다. 이 시집은 여행자에게 허락된 단 한 번의 정류장이고 그리고 맑은 강바닥으로 쏟기는 물의 어두운 계곡이니까. - 조연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