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뱀소년의 외출]
(문학동네, 2005년 9월 29일)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한 김근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신화적 상상력과 감각적인 이미지의 배치가 돋보이는 48편의 시를 수록했다. 어미와 아이, 뱀과 허물, 죽음과 삶 등의 상반된 소재들과 시인 특유의 사투리, 또렷한 의성어 및 의태어가 이미지의 떨림을 증폭시킨다.

1부에서는 불안을 채 떨치지 못한 모습으로 시인의 탄생과 성장을 몽환적으로 그린다. 2부는 비정상적인 현실을 상상으로 나타내고 비판하며, 3부는 자유로이 떠다니는 단어들로 '미학적 판타지를 실험한다. 마지막 4부는 기억상실의 무기력한 모습들로 채워져있다.

김근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이월' 외 네 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책 속에서

주름 자글자글한 소녀를 만난 적 있지
어제가 오늘과 살짝 옷을 바꿔입는 구멍 앞에서
그 늙은 소녀가 자꾸 풀을 꺾는 것을 지켜보았어
나는 풀들의 꺾인 뼈를 맞추며
늙은 소녀와 내가 아기를 낳으면
뱀이기도 하고 소년이기도 한
할미이기도 하고 소녀이기도 한
아기가 태어날지 궁금했다구

저녁이 한번 부르르 진저리를 쳐
긴 몸통에서 새빨간 성기를 꺼내 나는 오줌을 갈기지

길이 풀어지고 풀어진 길을 거슬러 늙은 소녀가
훠이훠이 구부러진 허리로 걸어와
이 길은 주름이 너무 많아 네 성기처럼
나 늙은 소녀의 늘어진 살가죽을 벗겨내
벗겨도 벗겨도 늙은 소녀는 늙은 소녀야

- '뱀소년의 외출' 중에서


::시인의 말

시간이나 공간 따위가 거기 정해져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끈적거리는 폐수처럼 사람들이 흘러다니는 종로 바닥을 와보지 않았다고 누가 얘기할 것인가. 그때 모든 사물과 세계가 제 본디 형상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사보이 죽은 어미를 지고 띠풀을 뽑아 연화장으로 마침내 들어가기 전까지, 구렁덩덩신선비가 뒤늦게 찾아온 본처와 함께 구멍 속 세계에서 행복하기 전까지, 딱 그전까지만, 시다. - 김근


::추천글

김근은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는 듯, 풍성한 감각의 축제를 펼쳐놓고 있다. 그 빛깔은 눈부시게 선연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자극적이어서 자꾸 우리의 겨드랑이를 가렵게 만든다. 죽음이 결국은 생애 닿아 있고, 생의 입구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이 젊은 시인이 일찍 알아챘기 때문에 감각이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인가. 비슷한 또래 시인들의 자폐적 언어와 김근의 언어는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데, 그것은 기어을 해석하는 그의 남다른 능력 때문이다. 그는 기억에대 구체적인 몸을 부여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얻게 된 밀도 높은 언어, 거기에다가 신화적 상상력의 작용으로 이 시집은 꽉 찬, 잘 여문 열매가 되었다. -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김근의 언어들이 가지는 문명 직전의 힘, 씌어지지 않는 시간들을 쓰는 힘, 우리는 그 힘을 아맏고 신화적인 상상력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 상상력이 세속적인 시간을 그릴 때 그 힘은 어떤 역동이 되어 시의 정수리를 때려친다. 그 세속저인 시간은 "억척스럽게 꽃잎들이" 시인에게 "달라붙는" 시간이며 "운알들이 거래되는 시간"이며 또한 "무수한 날에 바꿔 달 눈알들"을 낳는 시간이다. 나는 이 시인이 "시커멓고 무서운 몸을 빛내는 항아리들"의 언어를 자주 건져내기를, 바란다. 그의 서사적인 힘이 고대를 가로질러가면서 언젠가는 현대를 껴안는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이 시도는 한 시인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과제일 터이지만 드물게 리듬의 남성적인 위력을 가진 이 시인이 그 시도를 잘 해내리라고 믿어본다. - 허수경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