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도 국제자유도시화 및 영어공용어화 발상에 대한 문화정책위 위원장의 의견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중지를 모아 대처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현재 파일을 올리는 기능을 점검 중에 있어 일단 여기에 복사해 놓겠습니다.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복사한 다음 한글 프로그램에서 붙여놓기를 이용해서 보십시오.)

*제주도 국제자유도시화 및 영어공용어화 발상에 대한 한 의견

황광수(민족문학작가회의 문화정책위원장)


1. 제주도는 너무도 뼈아프고 슬픈 역사를 지닌 고장이다. 봄이면 유자꽃의 수를 세어두었다가 가을이면 그 숫자만큼의 유자를 공출하려 했기에 자기 집의 유자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리거나 톱으로 베어버려야 했던 곳,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견디다 못해 외지(육지)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국법으로 배를 못 만들게 하고 근해에서 어로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태우(일종의 땟목)만 허용했던 곳, 프랑스 신부에게까지 세금 거두는 일을 맡겨 /'/이재수의 난/'/이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했던 곳 아닌가. 그러니 제주도는 먼 옛날의 /'/탐라국/'/처럼 독립을 유지하며 그곳 주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든다. 제주도를 국제자유도시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선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GNP의 상승만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정치인들의 발상이며, 그것은 민중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유자꽃의 숫자를 확인해두었던 조선조 관리들의 그 알량한 착취기법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제주도를 세계시장에 내놓음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약간의 경제적 이득을 챙겨보자는 것이니까.
싱가폴이나 홍콩과 같은 국제자유도시는 /'/국제/'/라는 범주적 차원만 다를 뿐 우리네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거래에 필요한 정도의 외국어를 그 당사자들만 배우게 하면 된다. 그런 곳들은 상품들만 넘쳐날 뿐 고유의 문화 같은 것은 (그곳 사람들은 물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 그런 곳들은 식민주의자들이 구시대의 식민주의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물질적 이득을 보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만들어낸 곳들이다. 영어를 제2국어로 삼고 있는 말레이시아는 모국어의 보존을 위해 /'/대원 바하사/'/(language agency)라는 엄청나게 큰 출판사를 만들어놓고, 그 유지비의 부족분을 정부가 부담하고 있다. 말하자면, 영어공용어 시책은 기나긴 식민지상태의 후유증으로 인해 자립적인 언어생활이 불가능한 나라들이 불가피하게 채택한 것으로 비용면에서도 엄청난 부담을 강요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지니고 말글살이에 아무런 불편이 없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영어를 공용화함으로써 그런 부담을 스스로 껴안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2. 관광 수입을 올리기 위해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프랑스의 예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영어로 묻는 외국인에게 영어로 대답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했었다. 그럼에도 관광수입이 세계 1위이다. 이것은 프랑스가 경치가 좋은 나라이거나 프랑스 사람들이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프랑스가 자국의 문화를 잘 보존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통해 세계의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문화/'/를 다양한 민족문화들의 모자이크이다. 우리가 제주도, 나아가서 우리나라를 세계인들이 찾아오고 싶어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우리 고유의 문화를 잘 보존하면서 그것을 더욱 심오하고 아름답게 갈고닦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서비스를 하려면,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영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외국어를 필요한 만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제주도를 찾아오는 사람들 가운데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많다면, 일본어나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들도 부족함이 없도록 충원해야 한다. 그리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도록 관광안내 시스템을 첨단화해야 한다. 국제자유도시와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 관광은 별개의 것이다.

3. 영어를 공용화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고통을 동반한다. 그 대가로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언어생활의 혼란과 전통적 생활감각의 파괴이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약간의 경제적 이익은 대다수 국민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가, 서양인과의 대화에서 그들을 감동시킨 것은 /'/한글/'/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한글 스물네 글자 아래에 만국음표문자로 발음을 표기한 다음, 한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에게 자기 이름을 한글로 써보라고 하자 그는 자기의 성씨인 /'/Teague/'/를 정확하게 /'/티그/'/로 썼다. 내가 맞았다고 말하자 그 사람은 너무 기뻐서 볼펜으로 끄적거려놓은 그 종이쪽지를 (기념으로) 자기 나라에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관광안내원들에게 한글을 소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제주도를 국제적인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게 하려면, 제주도 고유의 문화를 감동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조랑말 싸움/'/ 같은 동물학대적인 프로그램이나 만들어내는 치졸한 발상 대신 유구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아름다운 생활풍속이나 생활도구 같은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제주도에 제대로 된 민속박물관이 있는가?

4. 영어공용어화에 대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성명서에 관하여 한 말씀 드리겠다. 영어공용화에 대한 비판적인 글들이 나오자, 민주당은 외국 용역업체에 의뢰하여 그런 방안을 검토하고 있을 뿐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모양이다. 지금까지 나온 비판적인 글들은 대체로 ① 제주도를 영어권의 식민지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② 관공서의 문서들이나 관광안내문, 그리고 모든 주민을 상대로 하는 영어교육 등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③ 우리의 언어생활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④ 관광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⑤ 제주도를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일본인과 중국사람들이다, ⑥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될 가능성이 크다 등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러한 지적들은 모두 옳다. 그러나 다분히 원론적이거나 당위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는 나라 또는 지역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빠져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성명서를 쓴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범주를 넘어서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집권당에서조차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발뺌하고 있다는 사실, 대부분의 비판들이 원론적인 수준을 맴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쓰더라도 그런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감안할 때 작가회의가 지금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 대신,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연구와 많은 생각을 정리해두고 있는 필자를 찾아 작가회의 기관지에 글을 발표하게 한 후 알맞은 때에 알맹이 있는 글 또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며칠 전, 서울대 조동일 교수와 이야기하던 중 /'/영어공용어화/'/를 비판하는 글을 1,000매 정도 써두었는데 좀더 가다듬어 책으로 내놓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의 연구는 실제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의 실상을 소개하면서 설득력있는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