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용어화인가, 문화 정체성 상실인가

김 병 택

학자들은 한국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된 신자유주의의 전략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시장개방을 구체화하는 세계화,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노동유연화, 민영화를 허용하는 탈규제가 그것들이다. 이들 중 세계화는 산업·문화·관광·교육·금융 등의 제도적 제약을 제거하여 시장개방을 구체화하는 전략이다. 영어 공용어화 찬성론자들의 주장은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들은 세계화 전략에 맞추어 한국에서도, 또한 국제자유도시로 발돋움할 제주도에서도 당연히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한국과 제주도의 발전을 위한 옳은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 주장 속에는 언어의 한 측면만으로 언어 전체를 대표하게 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철학자에 의하면, 언어는 /'/존재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통로이다. 이처럼 언어의 원초적인 힘은 주술적이다. 그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은, 모든 사물의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처럼 언어는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에 앞서, 주술적인 힘을 통해 모든 사물의 존재를 드러나게 한다. 여기에 /'/우리/'/라는 주체를 설정할 경우,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물의 존재는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우리 문화의 정체성도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임은 물론이다.
다른 분야에서 그러한 것처럼, 힘의 원리는 두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데에도 작용한다(이 경우의 힘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국가적 힘이다). 결국 두 언어는 힘있는 언어와 힘없는 언어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얼마든지 예증될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인도에서 영어는 지식계급이 사용하는 힘있는 언어가 되었고, 힌디어는 힘없는 언어로 전락했다. 미국이 지배한 이후 필리핀 사람들은 초등교육 기관에서의 2년 동안을 제외하면 주로 영어를 사용한다. 영어는 필리핀어를 제치고 힘있는 언어가 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의 영어와 스와힐리어의 관계도 그와 같다. 조선시대의 한문과 한글의 관계는 그에 대한 더욱더 직접적인 예이다. 영어가 힘있는 언어가 되면, 언어를 매재로 하는 문학 작품은 영어로 씌어질 가능성이 많다. 독자들이 영어로 씌어진 작품을 줄기차게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영화나 연극의 대사는 물론 모든 일상생활에서의 소통도 영어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모두가 영어 공용어화로 나타날 수 있는, 모골이 송연한 결과들이다.
제주도의 영어 공용어화론자들은 제주도에서의 영어 공용어화가 ①국제자유도시의 빠른 추진 ②영어교육 환경의 획기적 변화 ③사회적, 경제적 인프라의 글로벌화 ④고유 민속·전통·문화의 세계화 ⑤삶의 지평의 획기적 확대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평소 영어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내가 보아도, 이 주장들 속에 놓여 있는 논리의 빈터는 너무나 많다. 특히 ②와 ⑤는 기를 탁 막히게 하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해서 이 다섯 가지는 영어 공용어화가 아닌, 영어교육 방법의 /'/획기적 개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설령,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우리의,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과 같다. 우리의 언어가 유린되는 것을 방치하면서, 우리 문화를 온전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망상이다 (제주작가회의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