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문학'이란 무엇이고, '작가'란 누구인가?
작가들, 밀실을 나와 다시 거리에 서다
가속화하는 문인들의 사회참여와 '삶의 문학'으로의 복귀

홍성식 기자

그 시절,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있었다

'드레퓌스사건(1894)'에서 에밀 졸라(소설가)의 역할과 스페인 내전(1936)을 통해 삶의 방식을 바꾼 파블로 네루다(시인)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현실참여'는 작가의 기본덕목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창조를 통해 인간의 행복에 합목적적으로 봉사한다'는 문학의 대명제가 옳다면 '개인의 밀실'이 아닌 '우리의 광장'에서 좋은 문학이 탄생함은 불문가지(不問可知).

1974년 11월 '민족문학의 정통성 복원'과 '김지하 시인 석방'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창립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통일과 민족, 인권과 자유라는 단어가 작가들의 것이 아니었던 그 시절. 박정희 유신독재의 허락 없이 그 단어를 썼다 하여 무수한 작가들이 체포되고, 감금되고, 고문당하고, 징역을 살았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는 바로 그 단체의 정신과 투쟁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한국 유일의 진보문인연합체다.

지난 2월 작가회의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된 평론가 염무웅(62)은 30대 초반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족선언문을 떨리는 손끝으로 썼던 사람. 33세의 창창했던 청년 소대장이 회갑을 넘긴 백발의 노인이 되어 사령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30여년 동안 작가회의는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념'과 '불꽃' '아스팔트'와 '최루탄'으로 상징되던 시대가 끝나고, 90년대 초반을 휩쓴 사회주의의 붕괴와 개인주의의 득세는 양심과 인륜을 파괴한 '공공의 적'에게 돌아오지 않는 화살을 날리던 70~80년대의 작가들을 환멸과 실의로 몰아갔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싸움을 독려하는 시와 광포한 독재권력을 질타하던 소설의 날개는 부러졌고, 그 부러진 문학의 날개에서는 '엄살'과 '불륜' '하릴없는 뒷이야기'와 '자기비하'라는 기형(奇形)의 자식들이 돋아났을 뿐이었다.

90년대 한국문학은 고통받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 그 시절 문학은 일종의 자위(自慰) 아니, 자학(自虐)에 가까웠다.

작가회의, 다시 참여의 깃발을 들다

바로 이런 '부적절한' 한국문단의 상황을 바꾼 데는 41년생 동갑내기인 작가회의 이사장 3명의 역할이 컸다.

고(故) 이문구 이사장과(2000년 재직)과 현기영(2001~2002년 재직) 이사장, 염무웅 이사장은 '자학의 밀실'에 있던 작가들을 '참여의 광장'으로 이끌었다. 나이가 같다는 것말고도 3명의 공통점은 또 있다. 이들 모두는 젊은 시절부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과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통해 한국적 앙가주망(지식인의 사회참여)을 실천해온 문인들.

이문구는 취임과 동시에 작가들의 안정적 집필활동 보장을 위해 문화관광부 관료와 '창작지원금 제도'를 담판지었고, 베트남작가동맹(총서기 휴틴)과 정식교류협약을 맺어 한국-베트남 문인교류의 물꼬를 트는 통큰 지도력을 보여줬다.

이문구 이사장이 문인복지와 문학적 화해에 중점을 둔 정책을 폈다면, 현기영은 작가회의의 정치적 선명성을 복원시켰다. 그의 재임기간 중 이뤄진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운동'과 '친일문인 명단발표'는 작가회의의 정통성이 진보와 개혁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편안한 막사에 가만히 앉아 명령만 내리는 지휘관이 아닌, 노구(老軀)를 이끌고 친히 전장(戰場)의 한가운데로 육박해 들어가는 야전군사령관을 만난 젊은 작가들. 그들 또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시인 이산하와 박남준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는 시를 써 수많은 독자들이 광화문 거리에서 '소파개정'을 외치게 했고, 20~30대 작가가 주축이 된 작가회의 청년위원회는 세미나와 포럼 등을 통해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현 단계 한국문학에 대한 반성과 대안모색에 나섰다. 마포의 술집이 아닌 종로거리에서 더 많은 작가들을 보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

그리고, 염무웅 이사장. 그는 지난 3월 21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문학계 203인 행진>이란 반전집회의 성명서와 호소문을 작성하는 것으로 첫 업무를 시작했다. 이라크 침공의 부당함과 한국군 파병의 불합리성을 시민들에게 알린 이 집회에는 노소를 불문한 많은 작가들이 참석했다.

지난 시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을 통해 유신과 군사독재에 준엄한 비판의 목소리를 들려준 고은, 남정현, 구중서, 민영 등의 백발성성한 원로작가들이 손녀딸 뻘인 김은경(시인), 김신우(소설가) 등과 '우리는 전쟁을 반대한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함께 미대사관으로 행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문학을 뛰어넘는 하나의 감동이었다.

어떤 세월이 와도 불의에는 침묵하지 않는 작가들이...

70~80년대 그들의 적이 인간의 자유를 압살하고, 박애의 이념을 짓밟았던 박정희·전두환 독재권력이었다면, 그날 작가들의 적은 '안정적인 원유수급'이라는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타민족 아이들의 머리 위로 미사일과 고성능폭탄을 쏟아 붓는 일그러진 정의의 나라 미국이었다.

바로 그날 <미국은 더러운 전쟁을 당장 중단하라>는 제목으로 뿌려진 작가회의 성명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인류의 양심과 함께 하는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문장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글귀는 '어떤 세월이 오더라도 양심을 거스르고, 인류를 파괴하는 불의에는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는 작가들의 자기선언에 다름 아니지 않았을까.

새로운 시대, 새롭게 시작된 작가회의의 전열 가다듬기가 향후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두려움 없이 외칠 수 있는 '행동하는 문인들의 적극적 사회참여'로 결실 맺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기자만의 것은 아니리라.

2003/04/03 오후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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