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박정원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고드름]
(시평, 2007년 2월 26일)

박정원은 물의 시인이다. 그는 한때 물을 고체로 본 듯하다.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칼이나 송곳처럼 차고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을 찌르는 가해의 무기로 생각하거나, 자신이 지니지 않으면 아니될 방어나 공격의 무기로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햇살에 고드름이 녹슨 순간 문득 깨닫는다. 그 날카로운 고드름도 결국 물이라는 사실을. 가해와 피해와, 공격과 방어와, 사랑과 용서가 결국 한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박정원의 시는 이 깨달음의 바탕 위에 깊게 무위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박정원
1954년 충남 금산 출생. 1998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꽃은 피다> <내 마음속에 한 사람이> 등이 있다.

::책속에서

고드름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 밖에 없었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들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와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이 가리키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 소리
결국엔 물이었다
한 바가지 들이켜지 않겠는가

::추천글

박정원은 물의 시인이다. (중략). 그는 햇살에 고드름이 녹는 순간 문득 깨닫는다. 그 날카로운 고드름도 결국 물이라는 사실을. 가해와 피해와 공격과 방어와 사랑과 용서가 결국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박정원의 시는 이 깨달음의 바탕 위에 깊게 무위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본질을 외면하고 잡다한 외형에 치우쳐온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눈! 본질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물의 눈! 그 눈이야말로 시인 박정원의 눈이다. 그 눈은 ‘꺾은 장미를 화병에 꽂아놓은 이튿날 저녁 화병 속의 물이 모두 사라졌을’ 때 화병 밑바닥에 눌러 붙어 있던 ‘버티던 힘’을 보고 ‘살려고 바동거리던 마지막 혈흔’을 본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는 아프되 아프지 않고 고통스럽되 고통스럽지 않다. 그는 한때는 날카로운 칼이었던 고드름 녹은 물을 따뜻하게 데워 춥고 목마른 우리들에게 한 대접씩 건넬 뿐이다. 이 시집이 화해와 용서의 긴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나는 이 시집이 마치 고향집 뒤뜰 장독대 위에 놓여 있던 우리들 어머니가 새벽마다 일어나 정성스레 떠놓던 한 대접 정한수 같아 그 물을 마신다.-정호승(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