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제33회

아주 오래된 농담

- 책이야기

김남일(소설가)

책의 생산과 유통에 혁명적인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 인터넷이 흥성하면서 사이버 공간에서 주문을 받아 책을 판매하는 회사가 생기더니, 이제는 그게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내로라 하는 국내 굴지의 서점이며 출판사들이 사이버공간에서 직접 책 주문을 받는 일은 이제 화젯거리도 되지 못한다. 내가 주간으로 근무하는 출판사는 아직 홈페이지조차 없지만 이미 책 판매의 상당량을 인터넷 서점에 의존하고 있다. 그 경우, 누가 어떤 책을 구입하는지 자동적으로 통계가 나와 향후 책 제작에도 적지않은 참고가 된다.

책 자체도 달라지고 있다. 씨디롬 이야기는 이미 했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가 될 게 뻔하다. 이른바 이북(e-book)이라는 전자책이 책의 꼴 자체를 바꿔놓을 날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종이책 대신 아예 전자책으로 신작을 내놓은 계약에 동의한 동료작가도 생겼다. 독자들로서도 서점까지 가는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니 좋고, 언제든 필요한 부분은 검색해서 다시 골라 보고 인쇄도 마음대로 해서 ”소유”할 수 있으니 더더욱 좋은 일 아닌가. 게다가 귀중한 종이자원까지 절약하게 되었으니 크게 환영할 일아니냐는 농담까지 곁들인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냉면 사발 앞에 놓은듯 우선은 시원스레 대답한다.

”뭐, 크게 달라질 거 있어? 쓰는 거야 우리 마음이지.”

이렇게 말을 받으면서도 다소 생소하기는 한 모양으로 속내의 일단을 덧붙인다. 신문 연재를 할 때 한 회분마다 가능하면 어떤 극적인 요소를 배치하듯이, 전자책의 경우, 화면에 보여지는 모습과 분량을 저도모르게 고려하게 된다는것.

이게 무슨 뜻일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글은 원고지에 쓰는 것이었다. 아무도 이 사실에 토를 달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므로, 이때 원고지는 그저 글을 쓰는 도구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건 작가의 영혼이 그대로 옮겨지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바늘로 제 살을 찍어내듯 잉크를 찍어 한 칸 한 칸 원고지를 메워가는 작업을 어느 누가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문학은 그렇게 성스러웠다.

닥터 지바고가 언손을 호호 불어가며 ”사랑하는 라라에게” 라고 쓰던 영화장면을 기억해 보라.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날, 너무 손가락 마디가 아프다고 했더니 후배가 말했다.

”형, 아직도 원고지에다 글을 써?”

”응? 그럼?”

”원시인이네, 형. 신기하다. 아직도 형 같은 사람이 있긴 있구나.”

버릇이 고약해서 죽어라고 볼펜 끝에 힘을 주어야 마음에 드는 글씨를 얻어내곤 했다. 첫 줄이 잘 안 나가면 부지기수로 파지를 양산 해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손가락이 아플정도로 원고지하고 씨름을 해야했다.볼펜을 쥔 검지손가락 마디에는 두툼하니 못이 박혔다.

그게 작가로서 어쩔 수 없이 감안해야 하는 ”영광의 상처” 이려니 했다. 그런데 후배 작가는 낄낄 거리며 그런 원시적인 생산력으로 급변하는 세계를 어찌 감당하느냐며 놀려대는 게 아닌가.

타자기를 구입했다.

신기했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톡 튕겨만 주어도 쇠 손가락이 탁탁 날아가 또박또박 글자를 박아내는 그 모습에 반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당연히 운지법을 제대로 챙길 여유도 없었다. 두 손의 검지만으로 톡톡 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렇게 해도 제법 익숙하게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물론 약간의 불편은 감수해야 했다. ”화이트” 라는 게 있긴 있지만, 그게 썩 훌륭한 공업 생산품은 아니었다. 구멍이 막히는 적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 경우,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나가지 뭐.” 하며 스스로와 타협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생산성만큼은 과거에 견줄 게 아니어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다. 어느날 손가락이 너무 아프다고 했더니 후배가 말했다.

”형, 아직도 수동 타자기 써?”

”응? 그럼?”

”원시인이네, 형.신기하다. 아직도 형 같은 사람이 있긴 있구나.”

급한 마음에 검지 손가락 두 개만을 사용한 벌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검지 손가락 둘째마디가 시큰거리는 게 영 견디기 어려웠다.후배가 신형 타자기를 권했고, 당장 샀다. 신기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또박또박 글자가 박히고 오른쪽 끝까지 글을 채우면 드르륵 저절로 다음 행으로 이동을 하는 게 아닌가. 손가락 마디에 가해지는 물리적 하중도 헐씬 줄어들었다.

어느날이었다

지상에 있는 공동화장실에서 가다가 우연히 이웃 아줌마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상해요, 밤마다 드르륵드르륵.......”

”신고해요.”

”그래도 정확히 모르고서 어떻게......”

화장실이고 뭐고 없었다. 그 길로 지하방에 있던 유인물들을 치웠다. 시절이 시절이었던 만큼 그 아줌마들도 나도 어쩔수 없는 일 이었다.

저기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후배작가에게 말했다.

”소리 안나는 타자긴 없니?.”

전동타자기가 좋긴 한데 소리가 너무 요란한 게 탈이었다. 특히 나처럼 지하 셋방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게다가 현실은 참담하고 이상은 높아서 제딴에는 혁명적 열기로 들떠 있던 ”불순분자” 들에게는 한밤중 적막을 깨고 십리 밖까지 울려퍼지는 그 소리가 치명적이었다. 착한 후배는 웃으면서, 신기하다고 하면서, 여전히 원시인 운운하면서, 워드 프로세서라는 것을 소개해 주었다.

”그거, 형의 경제력으로는 감당이 안될텐데?”

경제력보다 더 중요한 게 혁명적 정열의 보전이었다.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하나? 나는 거금 팔십만원을 들여 생산도구를 바꿨다. 대우에서 만든 르모 쓰리.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더 이상 그것 좋은 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더없이 황홀했던 그 생산도구는 수명이 고작 이태 남짓했을 뿐이다.

어느날, 감광지 값이 너무 비싸고 시간만 지나면 흐릿해져서 영 젬병이라고 했더니 후배가 말했다.

”형, 아직도 르모 써?”

”응?그럼?”

”원시인이네,형. 신기하다. 아직도 형 같은 사람이 있긴 있구나.”

나의 컴퓨터 입문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그게 아마 칠팔 년 전 쯤의 일인데, 이제 숨이 턱에 받치도록 쫓아온 나의 ”업그레이드 역사”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지 않기로 하자. 생각만 해도 숨이 차고 비스베우스 화산처럼 울화가 치솟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처음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무척 신기해했던 사실만큼은 밝혀야겠다.

그때부터 내 글의 내용은 또 얼마나 달라졌을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나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고 내용이 형식을 규정한다”는 칼 맑스의 저 유명한 철의 법칙을 서서히 부정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는 다시 형식은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것 같은 현실이 바로 내가 부닥친 새로운 세상의 내용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슬쩍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모르겠다. 여전히 칼 맑스를 ”옹위”하려고 애쓰는 내가 아주 오래된 농담을 하고 있는지......(1999년 [ 책과 사람] 수록)

처음 올린 날: 2003년 8월 1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