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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동이의 달밤
이가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하늘이 좁게 보이는 곳에 집 두 채가 있습니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에 널어 말린 약초를 보관하는 넓은 약초방이 한 칸 더 있는 집이 은동이네 집입니다.
은동이네 집에서 열 발짝 떨어진 곳에 열 아줌마네 작은 집이 있습니다.
열 아줌마네 집은 사실은 백 발짝쯤 떨어져 있지만 열 밖에 셀 줄 모르는 은동이가 하나, 둘... 열까지 세고 또 다시 하나 둘, 열까지 세며 걸어가서 아줌마네 방문을 열며
“열! 아줌마, 은동이 왔저요.”
하면서 아줌마네 집은 열 발짝이 되고 아줌마는 열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엄마, 열 아줌마 가요.”
아침을 먹고 나면 은동이는 대개 열 아줌마에게 놀러 갑니다. 어떤 때는
“은동아, 열 아줌마 오시네.”
아줌마가 먼저 은동이네로 오기도 합니다.
열 아줌마는 혼자 삽니다. 낯가림이 심해서 은동이네 식구 외에는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줌마는 솜씨가 좋아 하루 종일 무언가를 만들지만 말씨는 거의 없습니다. 아니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은동이가 태어났을 때
“우 우-우- 우”
하며 얼굴 하나 가득 웃음을 지었다고 합니다.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우동아” 하고 부르는 은동이의 이름입니다.
은동이는 은동이 엄마와 아줌마가 같이 키웠습니다.
은동이는 달빛이 유난히 아름다운 달밤에 태어나서 은동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아빠는 부지런히 약초를 캐 모으고 은동이 엄마와 열 아줌마는 집 근처의 밭농사를 지었습니다.
감자도 심고 옥수수도 심고 토마토와 오이도 심고 수수며 보리, 밀밭도 조금씩 있습니다.
엄마를 따라 다니며 은동이는 흙 두더지처럼 컸습니다.
산밭에서 나는 싱싱한 먹거리는 은동이를 튼튼하게 키워 줍니다.
그런데 은동이는 말이 더뎠습니다.
말이 늦은 대신 하루 종일 웃고 웃음소리가 맑았습니다.
은동이는 어쩌면 엄마, 아빠보다 열 아줌마를 더 닮았는지도 모릅니다.
열 아줌마도 말을 못하는 대신 웃기를 잘했습니다.
밤이 되면 엄마와 아빠는 은동이에게 이야기를 해 줍니다. 은동이는 그저 웃으며 듣습니다.
은동이가 이야기를 들을 때 열 아줌마는 무언가 만듭니다. 조각 천으로 주머니나 보자기, 베갯닛이며 방석도 만들고 뜨개질을 하기도 합니다.
은동이 아빠가 약초를 팔러 마을로 내려갈 때 열 아줌마는 만들어 모았던 것들을 내 놓습니다.
아빠는 그것들을 팔아다가 아줌마가 부탁한 것들을 사다 줍니다.
어느 날 아빠는 약초를 팔고 오면서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왔습니다.
털북숭이 강아지를 보자 은동이의 입이 함박만 해졌어요.
“아빠, 망망이, 망망이.”
털북숭이 망망이는 은동이의 동생이고 동무가 됐습니다.
은동이는 자라면서 숲 아이가 됐습니다. 엄마와 아줌마를 따라 밭에 가는 대신 집 근처 숲에 가기를 더 자주합니다. 은동이가 가는 곳엔 언제나 망망이가 따라갑니다.
은동이는 숲에서 나무와 친해지고 토끼나 다람쥐, 산 노루와 동무가 됩니다.
콩새나 산비둘기, 곤줄박이, 뻐꾸기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할미새 박새도 좋아합니다. 아주 가끔씩은 높은 나뭇가지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올빼미를 보기도 합니다.
아빠는 가끔씩 약초를 캐러 갈 때 은동이를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산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늦되는 아이 은동이는 다 알아 듣지는 못하지만 고개를 끄떡이며
“조아요, 조아요.”
합니다.
은동이에게는 모든 것이 좋습니다. 아빠는 야초를 팔러 갈 때도 가끔씩 은동이를 데리고 갑니다. 강아지 망망이도 쫄랑쫄랑 따라갑니다.
마을에는 집도 많고 사람도 많습니다. 학교도 있고 병원도 있고 약국도 있습니다. 옷가게, 신발가게, 세탁소, 이발소도 있습니다.
은동이네 밭에서 나는 채소들을 파는 가게도 있고 그 채소들을 사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게 참 신기합니다.
은동이는 아빠 따라 산에 가는 것도 좋아하고 마을에 가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은동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달밤에 숲에 가는 것입니다.
어느 여름 숲에 간 은동이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아빠가 찾으러 갔습니다.
은동이는 해님처럼 환한 얼굴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노래를 부르며 숲에 있었습니다.
“은동아 예서 뭐 해? 밤이 됐는데?”
아빠가 반가워서 은동이를 번쩍 안았습니다.
“아빠, 달님이 웃어. 새도 웃고 나무도 웃어. 은동이 좋아 해. 하하하-.”
은동이가 달님과 나무와 새들을 향해 웃음을 보냅니다.
“그렇구나. 달님이랑 새랑 나무들이 우리 은동이를 좋아하는구나.”
아빠는 달빛 아름다운 밤이면 은동이와 숲에 갑니다.
은동이는 은은한 달빛 아래서 춤추고 노래합니다. 그러다 멈춰 밤의 고요함에 귀 기울이고 멀리서 들리는 올빼미 울음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가고 은동이는 자랍니다.
은동이는 어느덧 열두 살이 되고 키도 훌쩍 컸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키만큼 크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아줌마를 열 아줌마라고 부르고 셈도 열 까지만 셉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숫자도 열입니다.
아빠는 좀 먼 곳으로 약초를 캐러 갔습니다. 열 밤은 아니지만 몇 밤 자야 오신답니다.
아빠가 떠나신 다음날입니다.
갑자기 열 아줌마가 많이 아프십니다.
“이를 어쩌나. 약초를 먹여도 열이 내리지를 않네. 아이구 이를 어쩌나.”
엄마는 쩔쩔매다가 은동이를 깨웠습니다.
“은동아, 열 아줌마가 많이 아프셔. 일어나거라.”
은동이는 머리가 뜨끈뜨끈하고 땀에 흠뻑 젖어 괴로워하는 열 아줌마를 보았습니다.
“아줌마, 많이 아파요? 열 개만큼 아파요?”
아줌마는 대답을 못합니다.
“은동아, 아줌마가 아프셔. 아빠도 안 계시고 어떡하니? 네가 마을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오너라. 너 병원 알지? 빨갛게 십자 표시가 있는 집. 그 집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꼭 모시고 와야 한다. 숲만 넘으면 마을이 보인다. 열사흘 달밤이니 안 무서울 게다.”
“응. 알았저요. 열 아줌마 죽지 말아요. 은동이가 의사 데리러 가요.”
은동이는 망망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열 아줌마, 아프지 마요. 열 아줌마 아프지 마요.”
은동이는 노래하듯 말하며 걸어갑니다. 아름다운 달빛이 은동이를 따라옵니다.
“안녕하세요 달님. 열 아줌마가 아파요.”
은동이가 달님에게 말합니다.
전나무며 밤나무, 상수리나무들이 은동이를 반가워합니다.
“안녕하세요 나무님. 열 아줌마가 아파요.”
말하면서 은동이는 자꾸 숲으로 들어갑니다.
잠들었던 새들이 수런수런 잠에서 깨어납니다.
“쓰쓰 삥, 쓰쓰 삥, 뽀르르, 뽀- 쭵 쭵- 쿠크르 쿠크르. 찌찌 삐이 찌찌 삐이 .”
산새들이 인사를 보냅니다.
“새들아, 안녕. 열 아줌마가 아파.”
산토끼며 다람쥐, 오소리들도 눈을 비비고 나옵니다.
“귀여운 애들아 안녕, 열 아줌마가 아프셔.”
은동이의 걱정에 산짐승들이 눈이 똥그래집니다.
“모두모두 안녕하세요. 열 아줌마가 아파요. 의사선생님 오세요.”
가도 가도 숲입니다. 마을은 보이지 않습니다.
은동이는 숲에 있습니다.
“우동이 우동이!”
열 아줌마가 은동이를 부릅니다.
“좀 정신이 들어요? 얘가 왜 여태 안 올까, 잘 찾아가나 했을까?, 의사선생님을 모셔와야 하는데... .”
은동이 엄마는 애가 탑니다.
“우동이, 우동이.”
열 아줌마가 바깥을 가리킵니다.
“알았어요. 은동이를 찾아볼게요.”
은동이 엄마가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얘가 어디 있을까, 내가 잘못했지. 똑똑치 못한 어린애를 밤 심부름을 시키다니. 무사해야 할텐데.”
은동이 엄마의 발걸음이 허둥댑니다.
은동이 엄마는 숲으로 들어섭니다.
“은동아, 은동아!”
은동이 엄마의 목소리에 숲이 화들짝 놀라 새벽을 깨웁니다.
달빛이 점점 연해집니다.
“은동아, 은동아. 누가 우리 은동이 못 봤어요?”
은동이 엄마가 숲을 헤맵니다.
숲은 조용합니다.
저 멀리서 망망이 소리가 들립니다.
은동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 잠들어 있습니다. 엄마는 은동이를 안아 일으켰습니다.
“아가, 은동아. 무사하구나.”
엄마는 은동이를 꼭 안았습니다.
“엄마, 열 아줌마........ ”
은동이가 환한 얼굴로 물어봅니다.
그때
“우동아 우동아!”
열 아줌마가 은동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 아픈 사람이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은동이 엄마가 놀랍니다.
“우동아, 우동아.”
열 아줌마가 은동이를 부릅니다.
은동이가 아줌마에게 달려갑니다.
“아줌마, 의사 왔저요?”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은동이의 얼굴이 해님 같이 환합니다.
“의사가 왔다구?”
은동이 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은동이와 열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은동이를 가운데 하고 엄마와 병이 나은 열 아줌마가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숲을 나섭니다.
밤새 일을 한 숲 식구들이 잠자러 갑니다.
이가을1941년 대전 출생. 1982년 `크리스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창작집으로 [집보는 아이], [솔숲 마을 사람들], [떠돌이 시인의 나라], [빛을 가진 아이들], [가끔씩 비오는 날], [큰 스승 소득이], [솔매산 노래마을] 등이 있음. 민족문학작가회의 본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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