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주초에는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겨울옷을 꺼내 입어야 했습니다. 강원도에는 눈이 쏟아져 40센티미터나 쌓이고 거두어들이지 못한 농작물은 논밭에서 꽁꽁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내려간 기온을 타고 신종풀루는 더 확산되어 사람들의 몸과 마음도 움츠러들었습니다. 어제는 점자의 날이었습니다. 교회선교복지관에서 앞을 못 보는 분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강연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신종풀루에 걸린 맹인이 계셔서 취소가 되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도 앞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도 앞을 보지 못하셔서 어머니는 앞 못 보는 친정아버지를 모시다가 시집오신 후에 또 앞 못 보는 시아버지를 모셔야 했습니다. 시아버지를 정성껏 모시는 모습을 저는 어려서부터 보고 자랐습니다. 저 역시 시간이 날 때마다 할아버지의 지팡이를 대신해 드리곤 했습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남의 집 문간방살이를 할 때 주인집 안채에도 앞 못 보는 여자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손가락 끝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 점자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맹인들에게 점자를 만들어 보급한 분은 송암 박두성선생이십니다. 박두성선생은 1888년 강화도 교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독립운동가 이동휘선생의 권유로 교육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를 하시다 제생원 맹아부로 발령받아 눈먼 이들을 처음 만난 뒤 평생을 이들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1921년 미국인 선교사 로제타 홀여사가 만든 평양점자를 보완한 3.2점식 점자를 개발한 뒤 1926년 8월 한글점자 <훈맹점음>을 창안하셨습니다. 박두성선생은 점자로 통신교육을 하면서 전국의 맹인들에게 이런 글을 보냈습니다.

능숙한 목수는 상한 나무도 버리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들을 위하여 점자가 있으니 이것을 통해 무엇이든지 읽을 수 있습니다. (....) 눈이 사람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눈이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생각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맹인을 방에만 가두어 주지 말고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십시오.

능숙한 목수는 상한 나무도 버리지 않는다는 송암선생의 말씀이 참 아름답습니다. 송암 박두성선생은 점역을 통해 소설 '임꺽정'을 읽게 해주셨고, 10년에 걸쳐 아연판에다 찍은 신약성서를 완성하셨으며, '천자문', '조선어독본', '3.1운동비사''명심보감' 등 200종이 넘는 우리말 점자책을 찍어내 앞 못 보는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거리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지하철 계단에서, 음료수 캔에서 우리는 점자를 보고 만집니다. 그러면서도 한글점자를 만들고 평생 맹인들을 위해 사신 박두성선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어느 날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어둠 속에 오톨도돌 박힌 별들의 모습에서 나는 어린 시절 처음 본 점자를 떠올리며 시 한 편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 내가 처음 만져보았던 오톨도톨한 점자가 오늘밤은 하늘 위에 떴다 하늘 위에 뜬 점자들을 손끝으로 만져나가다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은, 그런 글자를 만난다 열 몇 살 때부터 편지 앞에 수없이 썼던 글자들 겨울이면 산맥 위로 총총히 돋아나던 외로운 점자 초저녁부터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 와 서늘한 바람의 물줄기를 쏟아 붓는 봄밤에 오래 잊은 글자 하나 찾으려고 하늘 여기저기를 더듬거리다 손을 내린다.

그러다 가만히 눈을 감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다 별들의 점자가 손끝으로 내려오는 게 느껴진다.

--- 졸시 '점자' 중에서

<200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