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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주 - 「열두 계단 아래 비상구 불빛」
공간을 병원 입원실로 한정하고 그곳에 평생 입원하고 있는 남자의 의식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예외적이고 특별한 상황은 처음부터 독자의 흥미를 사로잡는다. 그는 20년 동안 여관 생활을 하였고 9년 전에 어느 여관방에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려던 때에 트럭에서 쏟아져 들어온 잡석에 허리를 다쳤고 수술 중의 의료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음주 운전 차량과 충돌한 사고로 트럭의 운전기사는 즉사하였다. 그 운전수의 아내는 그의 간병인이 되어 두 아이를 키운다. 우리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우연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일까? 작가는 인간을 여관생활자와 노숙자로 나누고 노숙생활 또한 여관생활의 한 양식으로 규정한다. 작가가 볼 때 우리는 모두 집 없는 세대이고 잠시 등장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로 미루어 본다면 작가는 집 없는 세대와 부모 없는 세대를 동일하게 보는 듯하다. 만일 그렇다면 이 아버지 또는 어머니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를 본격적으로 좀 더 길게 묘사함으로써 집 없음의 원인이 이기적인 저만 앎인지 아니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인지를 밝혔어야 했다.
강진 - 「R9, 루비레드」
작가는 북에서 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을 거쳐 남으로 넘어온 여자 아이의 체험을 통하여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잔혹성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두만강을 건너다 잡혀 회령 보위부로 끌려간 아이는 열여덟 시간 동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게 하는 처벌을 받았다. 아버지가 중국인 브로커를 통하여 돈을 주어 노동단련대에서 아이를 빼내었으나 결국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했다. 아버지는 정착금으로 트럭을 인수하고 자동차 도장 기술을 배웠다. 아이도 사백 개의 색상 코드를 욀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정착을 위하여 생사를 걸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어느 곳에 자리 잡고 일을 하려 하면 주민의 신고가 들어가 경찰의 단속을 받았다. 정착금은 주지만 정착은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남쪽의 법이었다. 아버지가 고객 중의 한 사람에게 돈을 받고 아이를 범하게 했는데 마침 그 때 초경이 나와서 남자가 놀라 달아난다는 결말은 우습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다. 작가의 현실인식에 이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다른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7 세기에 신라와 중국, 백제와 일본이 연합하여 대립했듯이 현재는 북한과 중국, 남한과 미국이 연합하여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개방한 이상 북한도 개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북한에도 시장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비록 느리지만 북한의 경제는 중국을 뒤쫓아 성장할 것이고 아마 그것은 남한이 미국을 이어 장기침체로 들어가는 때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을 모욕하고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북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면서 성급한 판단을 보류하고 객관적, 실증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경 - 「그믐달」
구성이나 문체, 어느 한 곳 흠 잡을 데가 없는 서정소설이다. 윤은 마흔 두 살에 사진을 배우러 온 서른 살의 기호를 만나 2년 동안 사귀었고 쉰여섯이 된 지금은 세 살 연하의 동양학자 모리스와 교제하고 있는 포토에세이 작가이다. 시조나 하이쿠처럼 형식을 정해 놓고 자기 카메라에 맞는 장면만 흑백으로 찍고 거기에 맞춰서 글을 쓰는데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은 책이 나간다. 윤의 시각에서 서술하는 작가의 어조가 하도 침착해서 마치 나이 많은 누나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듣고 있는 기분이다. 맺힌 앙금을 털어내고 마음을 비우면 몸을 열고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너무나 쉬운 지혜를 우리는 늘 잊고 산다. 사랑이란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신체화된 의식 또는 의식화된 신체를 소유하려는 행동이다. 그런데 의식은 언제나 1인칭의 주체로만 존재하므로 3인칭의 형태나 객체의 형태로는 의식을 파악할 수 없다. 상대방의 의식을 주격으로 용인하는 용기, 그리고 주체의 대상화가 초래하는 고뇌를 스스로 떠맡는 너그러움만이 신체와 신체가 만나는 방법임을 윤은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런데 현실성이 강한 서사극과 달리 일반적으로 서정소설에는 힘이 맺혀지는 곳을 만들기 어렵다는 결함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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