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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14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
김 기 홍(시인)
비요일의 작업
씻어내지 못한 얼굴의 잠 부스러기처럼 남아있는 옅은 어둠 속으로 시내버스가
달려온다.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 길을 적셔놓아 달리는 차량의 바퀴를 따라
잘게 부수어져 버스를 기다리는 얼굴을 스치거나 흙과 함께 신바닥에 묻어 버
스 바닥에 갖가지 무늬를 남긴다. 오늘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빗물을 머금은
철근은 녹물이 흐르고 작업장은 기름과 물이 뒤섞여 나자빠질텐데. 내심 공사
장을 그리며 시내버스에 오른다.
88번 버스에 오르면 향기가 다양하다. 벌교에서 순천에 이르는 동안 몸을 싣고
내리는 사람마다 흙냄새, 마늘냄새, 꼬막냄새, 조개냄새, 미나리냄새, 갯냄새
등등. 얼굴과 손의 주름살에서 풍기는 향기에는 기나긴 세월의 꿈과 눈물과
사랑이 묻어있다. 바닷가 마을 화포, 장산 마산 등지를 오가는 시내버스도 역
시 마찬가지다. 젊은 가족이라도 가까이 있거나 함께 사는 사람들은 트럭이나
승용차 뒷칸에 짐을 싣지만 자식들 객지로 다 떠나고 영감 할매만 남은 집에서
야 육 칠십 년대 짐보따리 그대로 버스에 오른다.
순천의 시내버스에 오르면 사 오십대의 어렸을 적 고향 풍경이 그대로 살아있
다. 벌면 얼마나 번다고 저렇게들 살까 싶지만 부모들은 그렇지 않다. 살기 어
려운 세상, 객지로 간 자식들 오직 잘 되기만을 시도 때도 없이 빌고 또 빌면
서도 대부분의 생각은 즈그 잘 살면 되지 자식덕 입을 생각 손톱만큼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향에 내려와 농협빚이나 더 이상 만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
다. 그것으로는 모자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무엇이라도 챙겨주려고 곡식을 갈
무리한다. 죽는 날 까지 늙은이들 입 우리가 해결한다고 다리가 쑤시고 허리가
휘어져도 움직인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는 생각이며 죽
어도 깨끗이 죽을 수 있다는 철학이다. 시장 난장에 나가 보따리를 풀어놓고
농산물이며 해산물을 팔아봐야 차비 빼고 밥값 빼면 얼마 남을성 싶지 않다.
고작 고생값만 남을 뿐이지만 더 이상의 욕심은 없다.
오늘은 순천 아랫장날이다. 시내버스엔 짐보따리와 짐보따리 숫자만큼의 사람
들로 가득차 발 디디기가 힘들다. 승객이라야 육 칠십대의 노인들이 대부분이
다. 짐 보따리 속에는 불안하게 섞여있는 학생들도 있지만 공사장으로 몸 팔러
가는 노가다꾼들도 많이 보인다. 공사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서로 아는 얼굴들
을 확인하며 `뭘라고 나오냐'고 자신에게 묻는 듯 웃으며 묻지만 서로들 이런
궂은 날에 나온다는 게 의외라는 표정이다.
버스 바닥엔 채소보따리와 아가미를 크게 벌리는 숭어를 담은 다라 맛조개를
담은 바켓스가 섞여있다. 오늘은 장이 제대로 될랑가 몰라. 장꾼들도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행여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을까. 자꾸 김이 서리는 차창을
거친 손바닥과 옷소매로 닦는 할머니의 불안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으로 전해진
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시장 정류장에서는 조는 사람 깨워주고 딴 생
각에 빠진 사람 불러오고 흘린 물건 챙겨주는 건 이 지역 사람들의 당연한 생
활이니까.
공사장엔 예상을 뒤엎기라도 하려는 듯 거의 모든 사람이 나와 있었다. 아파트
기초공사라서 인원이 많은데다 아이엠에프라고 공사장도 많지 않아 일할 현장
만 있으면 얼굴부터 들이밀고 최대한 오야지에게 잘 보이려고 총알같이 나온
다. 오야지나 반장이 누가 오라고 해서 왔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벼리별별 이유
를 끌어 모은다. 그런 사람들에겐 오늘 같은 날은 최적기가 아닌가. 기왕 나온
사람인데 그냥 가라고 하기엔 어딘가 미안한 구석이 있는 것 같고 오야지 입장
에선 전혀 손해 볼 일이 아니기에 일을 시킨다. 기초공사가 끝나면 많은 인원
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남기 위한 생존투쟁이 암암리에 벌어진다. 주막에서
만나 은근슬쩍 짝짜꿍, 남 헐뜯기, 오야지 눈에 잘 보이기, 반장이나 기사 앞
에서 아는체 하기, 반장이나 오야지 앞에서 엉덩이 치켜들고 일하기, 남보다
일찍 나와 1분이라도 늦게 퇴근하기 등등. 생존의 경쟁은 추접기가 도를 지나
치고 간사하기가 이방을 넘어서고 이 말 해놓고 저기서 저 말하기, 저 말 해놓
고 여기서 이 말하기 등 교활함은 교수급이다.
하지만 모든 노동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 공사가 시작되기 전 이
미 도급업자와 건설노동자 간에 작업 진행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나누기
때문에 목수 전기 설비 미장 등은 별 문제가 없지만 철근의 경우 지나치게 기
초 공사를 서두르기 때문에 초기에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고 기초가 끝나면
절반은 새로운 현장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불안심리가 작용하
는 것이다.
아이엠에프가 닥치기 전부터 공사장에는 건설회사들이 대규모로 부도가 날 것
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자 일할 곳을 찾아 헤메야 했다. 일
반 기업체 근무자처럼 해고될 때 정상적인 해고수당을 받는다거나 퇴직의 나이
가 되어 퇴직금을 받는 것도 아니다. 토요일 일요일이 없고 주일 주말에 사람
구실한다는 애경사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일을 못하면 아내에게 무시
당하고 하다보니 오늘처럼 비가 짖궂게 뿌리는 날, 다들 예상할 수 없었던 상
황이 서로에게 일어난 것이다.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닥은 미끄럽고 이
중 코팅장갑 속엔 빗물이 고이고 철근에 걸려 옷은 찢어지고 등짝을 타고 엉덩
이 고추에까지 빗물은 흘렀다. 정수장 상판 작업인데 정수장 공사 한번 물 채
우기 작업까지 제대로 하는갑다! 두 세 명이 들어가자 해도 모두들 신청도 하
지 않는다. 함바에서 해장술을 먹고 나온 오야지와 작업반장이 들어가자고 해
도 다들 못들은 척 한다. 비옷이 지급되고 오야지는 원청 기사들 앞에서 목소
리가 높아간다. 충실한 내 똥개들 봐라. 내가 하는 일에 불가능이란 없다! 하
는 태도다. 누구라도 맘에 차지 않으면 그만 두게 할 수 있다. 일당 2만원이
떨어졌어도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일을 하지 않으면 가정이 위태로
우니 비굴도 무릎쓰고 주먹도 숨겨놓고 자진해서 일을 한다. 더 이상 오야지가
돈을 올려줄테니 일 좀 해달라고 사정할 세월은 없을 것만 같다. 오야지는 기
분이 너무 좋아 함바에서 돼지삼겹살과 술을 시켜놓고 먼저 취해간다.
비 때문에 장도 부산했던지 평소보다 일찍 노인들이 버스에 오른다. 장꾼이나
노가다꾼이나 젖어있기는 마찬가지다. 편히 앉고 싶은 생각도 마찬가지다. 서
로들 바라보며 어찌까이 오매 어디 좀 앉아야 쓰껏인디 하며 앞에 탄 사람이나
뒤에 탄 사람이나 안쓰러워한다. 먼저 탄 사람은 뒤에 탄 사람에게 머리에 쓴
수건을 풀거나 보따리에서 꺼낸 보자기를 깔아주며 앉으라고 권하거나 1인용
의자에 함께 앉기를 권한다. 또 어떤 이는 자리를 양보한 학생을 자기 무릎에
라도 앉혀야 보답이 되겠다는 듯이 끌어앉히기까지 한다.
공사장에서 벼락치듯, 소나기 내리쏟듯 일을 마치고서야 허리를 편 사람들은
허리가 시큰거려도 기댈 곳이 없으나 모두들 얼굴이 어둡지만은 않다. 앉아있
음으로 더욱 마음 불편해하는 저 노인들, 저 어머니들 모습에서 한없이 깊은
정을 본다. 깊고 넓은 사랑을 보고 또 느낀다. 정치인들이 비인간적인 욕심에
치중할 때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세상에, 돈의 노예가
되어가는 세상에, 우리들의 노동이 무엇엔가 노예가 되어있는 세상에, 그 한
쪽엔 이렇게 따뜻한 사랑이 있다. 서로를 바라보며 작은 웃음 짓는 얼굴들이
맑아 보인다. 피로와 추위가 싹 가신다. 아무리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이라 해
도 살만한 구석은 항상 존재한다.
세차게 내리치다 느슨했다 비는 산조를 엮는다. 바다가 춤을 추듯 버스 안의
승객들은 오늘도 이렇게 뒤섞이며 흔들려간다.
(김기홍 시인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처음 올린 날: 2002년 1월 22일(화)
김기홍(시인)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1957년 전남 순천 출생.
1970년대 후반 "사계문학"동인활동 시작
1984년 KBS 일하는 사람들의 백일장 장원
1984년 실천문학 5권에 "강선을 풀며"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86년 "해방시"동인 시집 출간/ 농협중앙회 주최 제1회 농민문학상 받음
1987년 실천문학사에서 시집 "공친 날" 출간
1993년 노동자 시인들의 모임 "일과 시" 동인 결성 및 활동시작
2001년 휴면중이던 사계문학 동인들 모여 작품활동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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