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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시인)
오늘은 당신과 함께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에 가고 싶습니다.
"일전에 약속한 대로 월요일에 꼭 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집 붓꽃들이 활짝
피어있을 테니까요. 그보다 늦게 온다면 꽃들이 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지베르
니에서 모네가 그의 벗에게 보낸 편지는 내 발목에 보랏빛 은종을 매달아 줍니
다. 걸을 때마다 들릴듯 말듯 수면 아래로부터 공명되어 울리는, 울리는 순간
물동그라미로만 소리의 세계는 수렴되고 나는 그 정적 속에 아주 천천히 물무늬
들을 헤아려 갑니다. 물밑에서 수련 대궁이 한 치쯤 더 자랐구나, 수련이 저를
여는 소리가 곧 들리겠구나, 하면서 말이지요.
모네는 나에게 자연을 대하는 마음의 성과 속을 보여줍니다. 붓꽃이 개화하는
때를 기다려 그 절정의 순간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영속하
는 자연의 순간의 진실 앞에 저토록 극진한 오체투지를 할 수 있는 이에게만 자
연은 스스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꽃과 나무와 물과 바람과 햇빛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주하며 내는 화음의 계단 맨 아래 칸에 무릎을 꿇고 오래
오래 기다리며 응시한 이만이 얻을 수 있는 그의 화폭을 나는 사랑합니다.
세계의 이면에서 조용히 열리고 닫히는 숨결. 모네의 <수련> 연작은 양수 속을
떠다니는 세계의 한순간에 대한 기록이며 인간의 심연인 자연, 아름답고 슬픈
어머니들의 중얼거림을 담은 녹취록입니다. 자연 앞에 지극히 겸손하고 성실하
였던 모네가 말년의 작업으로 수련에 매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양수의 유동과 부엽들, 매순간 다르게 흘러드는 빛의 수압 속에 물거품들이 중
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저 카오스의 심연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죽음의
때를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가 사랑했고 그를 사랑한 어머니들이 그를 거두어
가야 할 때를 위해 길었던 몽유의 순간들을 한 점 수련잎 위에 얹으면서 말이지
요.
하여 나는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을 성과 속의 경계에서 어머니인 자연 앞
에 봉헌하는 대속자의 꿈으로 읽습니다. 고딕으로 정형화된 성당의 외곽은 아
침, 한낮, 저녁으로 건너가는 태양의 길과 바람에 용해되어 무화된 원형의 그림
자로 일렁입니다. 그것은 꿈꾸는 구근, 자연의 질료로 빚어진 꿈꾸는 웅덩이입
니다. 직립한 기둥들이 웅덩이 속에 녹아들고 두근거리는 구근의 심장 박동이
대기 속으로 적막한 산보를 시작할 때, 속화의 양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무력
하여 비로소 아름다워집니다. 오만한 힘의 양식으로 비루해진 인간이 어머니 앞
에 스스로 무력해질 때, 이 참된 구도의 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이제 나는 햇빛을 담뿍 받고 흔들리는 포플라 나무 아래를 당신과 함께 지납니
다. 당신과 나의 산책길에 모네의 <포플라> 연작이 펼쳐집니다. 들고 온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우리는 바람과 햇빛에 온몸을 맡기고 흔들립니다. 투명
한 잎새로 흔들리는 당신을 바라보며 내 우듬지로 수액이 흘러들지요. 아, 나는
일렁이며 나를 감싸안는 바람이 펼쳐진 책장을 어느 방향으로 넘겨갈 지도 알
것 같습니다. 이렇듯 섬세하게 드러나는 바람의 길, 그 길에서 만나는 지베르니
의 에프트 강변 포플라 나무들은 어느 날 문득 이 별에 다다른 순례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대기와 물 속, 두 개의 차원을 함께 살며 수평의 대지와 수직
상승하는 기도가 만나는 자리. 그러나 이 별은 둥글어서 실은 수평도 수직도 없
고 그저 흘러가는 바람의 길 위에 부려진 구름과 햇살의 흔적들이 있을 뿐, 이
무아의 상태에서 하나의 차원은 둘, 셋, 넷, 다중의 차원으로 열립니다. 하늘과
물, 우주와 대지의 접신목인 지상의 나무들이 바람 속에서 잎새들을 나부낍니
다.
순간의 바람이 포플라 잎새 하나를 떨구고 갑니다. 잎새 하나만큼 나무는 가벼
워지고 잎새 하나 만큼의 무게의 알을 낳으러 먼바다에서 연어가 회귀합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도약하는 빛들의 혼융... 모네의 화폭에 숨쉬는 카오스적 색
채들은 카오스야말로 자연의 숙명이며 질서이자 아름다움의 단초임을 증거합니
다. 순간을 사랑한, 순간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실존의 잔혹한 아름다움 말이지
요.
당신과 함께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에 가고 싶습니다.
하늘과 바다와 땅을, 이 고독하고 아름다운 어머니들을 사고 팔고 점령할 수 있
다고 생각하는 이 천박한 시대에, 그곳은 당신과 나의 영혼의 풍경을 보여줄 겁
니다. 바람으로 멱을 감는 꽃과 나무들이 있고 수련이 저를 여는 적요로운 음악
이 있는, 그곳에 당신과 나란히 누워 한나절 영원의 순간을 잠들었다 깨면 당신
은 한 그루 빛나는 은사시나무가 되어있을 지도 모르구요. 우리는 서로의 등을
두드려 몰래 내려온 물방울들을 털어내며 웃겠지요. 물방울들은 꽃잎 속으로 다
시 여행을 떠나겠지요.
(2001.1.15 제 19호 BOOKIAN 수록)
*그림은 모네의 [수련구름](1903년작):
참고 홈페이지 http://myhome.naver.com/monetmuseum/main.htm
처음 올린 날: 2001년 11월 9일(금)
김선우(시인)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했다.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시「대관령 옛길」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힘' 동인으로 활
동중이며, 지난해 초 첫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을 창
작과비평사에서 출간했다.
홈페이지: http://my.netian.com/~kswpo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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