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열려라 귀!

하성란

신문을 펼쳐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편성 시간표를 확인했다. 거기에 적힌 대로라면 저녁 여섯 시부터 중계 방송이 시작될 것이다. 시간이 되어 텔레비전을 켰다. 코나미컵 아시아 시리즈 결승전 장면은 찾아볼 수 없고 연예인들의 미팅 프로가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라디오를 꺼내 왔다.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 야구장의 아나운서 목소리가 선명하게 잡혔다. 한 장면이라도 놓칠까봐 라디오를 가까이 끌어다 놓고 귀기울였다. 야구 경기를 라디오 중계로 듣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중간중간 광고 방송으로 넘어갈 때마다 아나운서는 “지금 여러분은 코나미컵 결승전을 듣고 계십니다”고 말했다.

선취점은 일본이 먼저 냈다. 뒤이어 우리가 한 점을 내자 해설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쿄 하늘에 태극기가 더욱더 힘차게 펄럭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다는 돔 경기장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제 5구 스위잉!” 아나운서의 말끝에 해설자가 혀를 찼다. “저 정도는 돌아간 것이 아닌가 보이는데요.” 사이사이로 일본 관중의 응원 소리가 들려 왔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박한이 선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런데도 자꾸 말을 놓쳤다. 내 귀는 경기를 따라잡지 못했다.

어릴 적 사진 몇 장에 그 라디오도 찍혀 있다. 작은 라디오에 벽돌 만한 배터리를 고무줄로 친친 감아 들었다. 아버지가 사진을 찍는다고 마당으로 불러낼 때도 드라마의 한 부분을 놓칠까봐 꼭 들고 나갔다. 그런데 언제 내 귀는 이렇게 퇴화되었나.

수없이 반복되는 리플레이 장면이 아쉽다. 카메라는 공을 따라 우리의 눈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설명이 필요없다. 배영수 투수의 직구가 2점 홈런을 허용하자 해설자는 “차와 차가 부딪친다고 볼 때,대형과 소형이 부딪치면 뻔하잖습니까, 그럴 땐 피해가야죠”라고 했다가 스스로를 위안하듯 “삼성 입장에서는 줄 점수를 다 줬다고 보면 됩니다”고 말했다.

9회 초 5 대 1로 지고 있던 삼성이 두 점을 보탰다. 투 아웃,투 스트라이크,투 주자인 손에 땀이 배는 긴박한 상황. 해설자의 목소리도 격앙되었다. “소란스러워지는 도쿄돔입니다.” 결과는 스트라이크 아웃. 5 대 3,일본 롯데 지바의 승리다.

깊은 새벽,뒤늦은 중계 방송으로 경기를 다시 본다. 박석민 선수가 안타를 냈다. 수비수의 실책으로 쏜살같이 2루로 달려간다. 상대편 감독이 초조하게 껌을 질겅거린다.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게임 속으로 너무 쉽게 빨려들어간다.

[국민일보 2005년 11월 14일]

하성란 1967년 서울 출생.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풀'로 등단. 도시의 일상과 현대인의 고독한 삶을 뛰어나게 그려내면서 새로운 소설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 소설집 [루빈의 술잔],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와 장편 [식사의 즐거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