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征韓論者의 고향 가고시마

고운기

도쿄의 우에노(上野)공원 입구에 동상이 하나 서 있다. 겉은 내 눈에 일본식 잠옷 차림처럼 보이는데, 종아리가 드러난 강인한 몸매에 으스스한 표정은 다소 위압적이기까지 하다. 동상의 주인공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隆盛).

옆에는 일본종 도사견이 목줄을 사이고의 한 손에 맡긴 채 서 있다. 더욱 으스스해 보인다.

우에노공원은 봄철의 벚꽃놀이 장소로 이름을 날리지만, 국립미술관이며 박물관 그리고 과학박물관 등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문화적인 공원으로도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그런가 하면 도쿄예술대학이 바로 옆에 있는데, 여기 미술관과 음악당에서 열리는 전시회나 공연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다.

그렇듯 문화적인 분위기에 비한다면, 사이고의 동상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나마 공원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음이 다행인지 모른다.

사이고는 누구인가. 에도(江戶)막부 말기에 사쓰마번(薩摩藩)의 주인이었던 그는 메이지유신에 적극 참여한다. 강파르게 훈련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교토의 국왕이 도쿄로 입성할 때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진두에서 지휘한 용장이다. 그때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우에노공원의 저 동상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서슬 푸른 카리스마 하나만으로도 이 일을 가능하게 했다 짐작하리라.

그런 그가 패배의 쓴잔을 마신 것은 다름 아닌 정한론(征韓論)을 두고 벌어진 내부 권력 다툼에서였다. 1873년, 조선과의 국교를 맺기로 한 일본의 유신 정부는 당초 사이고를 조선 정부에 사신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사이고의 사신행차는 거절과 전쟁 개시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그것은 사이고가 노린 바였다. 조선을 전쟁으로 농락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기회에 중앙 정권을 확실히 거머쥘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온건파들이 반대를 했고, 사이고는 이 싸움에서 패배, 고향인 사쓰마로 돌아간다.

쓸쓸한 낙향이었다. 사실 그의 정한론은 정권 다툼의 빌미에 지나지 않았다. 패배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그는 고향에서 학교를 만들고 학생들을 훈련시킨다. 그 사이 중앙의 유신 정부는 착실히 안정된 정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규모의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중앙정부에 대해 나름의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사이고는 그 같은 분위기를 타 반란의 기치를 올린다. 낙향한 지 4년 만인 1877년의 일이었다.

일본인들이 ‘서남(西南)의 역(役)’이라 부르는 이 전쟁은 처음에 기세도 당당하게 중앙을 향해 쳐올라가는 듯했다. 병사 가운데는 사이고가 자신의 학교에서 훈육시킨 학생이 많았다. 사쓰마사쓰(薩摩札)라는 돈을 발행하여 군자금을 모으는 등, 사이고가 심혈을 기울였던 메이지유신기 최대 최후의 이 전쟁은, 그러나 1년 만에 정부군의 완승으로 끝나고 만다. 사이고는 마지막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런 사이고가 요즘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다. 내달 중순에 열리는 한·일 정상회담의 개최 장소가 가고시마(鹿兒島)로 결정되면서부터이다. 가고시마는 다름 아닌 옛날의 사쓰마번이다. 대표적인 정한론자의 고향에서 회의를 열어야 하느냐 하는 입방아가 일어날까봐, 외교통상부의 관계자가 일본 쪽에 장소 변경을 요구했단다. 당연히 냉소어린 대답을 받았으리라.

사이고에 대해서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용감한 군인으로 보는가 하면, 다이쇼(大正) 시대의 ‘사이고와 뚱보 아가씨’라는 희곡에 나타나는바, 시대와 명분에 헛갈리며 살아간 사람이라고도 여긴다. 다분히 다이쇼 시대의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반영됐을 이 희곡 작품에서, 사이고 집안의 뚱뚱한 하녀 오타마가 그를 위해 충성하는 모습이 희화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사이고를 평가하는 관점이다.

진정으로 걱정할 일은 따로 있다. 회의에서 무슨 주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 걱정만으로도 머리가 빠질 지경일 텐데, 이런 일까지 염려해야 하는 관리들의 노심초사(勞心焦思)가 안쓰럽다.

[문화일보 2004년 11월 11일]

고운기1961년 전남 벌교 출생. 한양대 국문학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이 당선되어 등단. 1987년 첫시집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간행. 1995년 두번째 시집 [섬강 그늘] 간행. 1999년부터 일본 케이오대학 문학부 방문연구원으로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