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책 소개>

『바람과 떨림』은 열린 세계를 열망하는 문학평론가의 근황을 압축하고 있다. 이 평론집은 튼실한 리얼리즘과 아름다운 언어로 우리 현실과 문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이들과 동고동락한 현장비평가의 초상을 잘 보여준다. 외국문학을 전공한 이의 학문적 사색과 우리 문학을 사랑하는 이의 문학적 감성이 공생할뿐더러, 문학과 사회의 이분법적 분리가 아니라 그 둘의 변증법적 통일을 추구함으로써, 이 저서는 문학과 지성의 조화, 사유와 실천의 일치를 선명하게 지향한다. 그리하여 이 평론집은 소통과 통섭의 시대에 절실한 비판적 지식인의 바람직한 행로를 제시한다. 게다가 이 책은 지은이의 사소한 일상도 노출함으로써 우리 시대 실천적 지성인의 후미(後尾)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마당도 기꺼이 제공한다.

<책 머리에>

실로 오랜만에 책을 펴내려고 예전에 발표한 글을 정리하며 지난 10여 년을 되돌아보았다. 불가피하게 맡은 학교 일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을 만큼 분주하게 그 기간을 대부분 보냈다. 그럼에도 그동안 내 삶을 지탱한 것은 ‘바람’과 ‘떨림’이었다.
나는 예로부터 우리 사회가 처세의 승자들이 모든 걸 차지하는 ‘당신들의 천국’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민주적인 ‘우리의 공동체’로 진화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았다. 자유를 평화롭게 외치고 평화를 자유롭게 호소할 수 있는 사회를, 천부적 인권을 숭상하고 문화적 차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들과 한통속이었던 것도, 소수에게만 완전히 개방된 폐쇄적인 세상이 아니라 굳게 닫힌 각종 문 앞에서 갈 곳 몰라 하는 민초에게도 활짝 열린 세계를 줄기차게 그리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게 나의 오랜 희망이었고 그리움이었으며, 마침내 나의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속도와 방향이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런 바람은 분명 내 삶을 추동한 큰 파도였지만 종종 그것은 우리를 고통의 골목으로 몰아넣기도 하였다. 그럴 때 나는 종종 문학의 동굴로 은신하곤 하였다. 그곳에서 문학과 더불어 노는 사사로운 즐거움에 빠지곤 하였다. 그 은밀한 교감은 남모르는 감동과 발설하기 민망한 흥분으로 나를 인도하였다. 이따금 그것은 떨림의 단계를 넘어 전율로 전이되기도 하였다. 문학과 함께 지내는 사이에 나는 두려울 것도 숨길 것도 없는 자유자재한 존재가 되는 황홀한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나는 한때 지독한 문학 중독자였음을 고백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내가 잠시 두고 온 현실로, 아름다운 문학이 암시하는 더 큰 사회로, 복귀하는 데 절실한 에너지를, 인간과 사회를 더 넓고 깊게 보는 힘을 제공하였다. 그러니 문학의 드넓은 바다에서 맛보는 다채로운 떨림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이 책은 한 시절 나를 압도했던 그런 바람과 떨림의 흔적을 말로 옮긴 것인데, 잠시 이 책의 골격을 누설하겠다.

1부 「창밖의 꿈」에는 몇 편의 문학평론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문학은 나의 눈과 귀를 앗아간 첫사랑이었지만, 그 사랑도 근래 퇴색하고 있다. 시간의 무게 탓만은 아니다. 어느새 정면을 바라보던 눈은 침침해지고 어두움에 솔깃하던 귀는 둔감해지고, 양심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뜨거운 가슴은 나날이 휘발되고 있으니, 누굴 책망하고 무얼 탓하랴! 그 풍파 속에서 요즘 나의 문학은 기다리다 지친 애인처럼 창밖에서 서성인다. 제대로 사랑하기는커녕 간수하지도 못하는 사내를 더는 참을 수 없다는 표정과 어디론가 홀연히 떠날 쓸쓸한 사람의 행색을 한 채 그이는 창밖에서 오락가락한다. 나는 그 애인을 흔쾌히 보내지도 못하고 따뜻한 안방으로 들어와 같이 살자고 붙잡지도 못하는 兩難에 빠져 있다. 내 것인 것 같기도 하다가 내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한 문학을 와락 끌어안을 품이 내게는 지금 부족하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내 애인의 꿈을 되새기다 보면 문학이 나와 일심동체가 될 새로운 ‘봄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이 공간을 마련하였다.
나는 어찌하여 독문학을 섣불리 선택했던가. 문학청년의 눈에 한국문학은 왠지 속 좁고 아무 때나 접근해도 괜찮은 만만한 상대로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독일문학은 갑자기 젊은 날 내 열망이 되었다. 그 열망으로 내 삶은 수선스럽고 고단하였지만 간간이 새로움을 발견하는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국문학은 늘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도 주었다. 그 생경함이 독문학을 항상 곁에 두지는 못하게 하였다. 그 이국적인 벗을 이따금 제쳐 놓고 낯익은 우리 문학에 한눈을 팔았던 속사정이 여기에 있었다. 2부 「잘 가라, 내 젊은 날의 열망이여」의 글은 그런 독문학을 더러 공부하며 얻은 것이다. 물론 우리 독자가 독문학을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장만하려고 애썼다. 학문적 탐구보다 외국문학을 우리의 독자가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다는 뜻이다. 내 젊은 날의 피를 온통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던 그 독문학도 이제는 나의 문학이 아니다. 그 독문학을 쏜 화살처럼 속수무책으로 보낸다. 부디 잘 가라. 임자를 만나지 못해 고생한 독문학이여, 안녕!
3부「세상 속으로」에는 젊은 대학생을 위해 쓴 두 편의 에세이가 있다. 행복은 어떻게 오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글과,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쓴 글인데, 모두 스무 살 전후의 젊은이에게 던진 투박한 글이다. 계몽적인 목적이 뚜렷한 에세이인 것이다. 이에 덧붙여, 지역 일간지에 칼럼으로 썼던 몇 편의 글도 수록하였다. 그러니까 이 글은 유효 기간이 좀 지났다. 그 글이 발표되고 세월이 한참 흘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실감하고, 과감하게 그 글을 모았다. 세상은 기대만큼 빨리 변하지도 않고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기다림은 여전히, 그러나 더 절박하게, 이어진다는 걸 느낀 탓에 이 글을 묶기로 하였다.
이 책에서 특이한 무대는 4부「소통을 위하여」다. 이곳의 글은 나의 일상을 주로 반영한 것이다. 대학교수나 문학평론가도 산문집을 내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 한 그런 책을 쉽게 낼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여건에서 이런저런 기회에 기록한 사적이고 일상적인 글을 두루 수집하였다. 그것은 공적 발언에 치중한 글과 달리 사생활의 상당 부분을 가감하지 않고 담았다. 이곳에서는 주변 사람과 주고받은 적나라한 말이 중심을 이룬다. 누드조차 숨기지 못한 글이 이처럼 살아남은 것은 공식적인 행사나 사적인 일조차 글로 남기는 유별난 버릇 때문이었다. 그 글은 버리고 싶지 않은 감정과 생각을 진솔하게 담았지만 독자의 읽을거리로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문학 현장의 활기가 넘치는 글을 주축으로 삼으면서도 사색의 심연과 감성의 밀실을 보여주는 책을 내고 싶다는 野心을 ‘봄밤’에 품으며, 새로 출발하는 길에서, 작은 징검다리 하나를 놓아 본다. 내 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문학과 그 주인 덕분에 이 작은 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었다는 건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안부조차 제때 묻지 못하며 긴 세월을 축냈는데, 이 책이 그들과 나의 인연을 추억하는 사진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이참에 내본다.

개성적인 남자와 동행하느라 고행을 면하지 못하는 아내와 나를 친구로 여기는 순박한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다. 아는 남자와 모르는 여자, 이름 없는 남성과 이름 모를 여성, 가진 것 없어도 늘 따뜻한 사람과 가진 게 많아도 적절히 나누어주는 착한 인간 등 우리 사회를 당당하게 수호하는 이웃사촌들의 배려와 후원 덕분에 우리네 삶이 유지된다는 생각은, 山川이 아무리 변해도, 依舊하다. 그러니, 수많은 無名氏에게도 고마움을 고루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뭐라 해도, <한국학술정보>의 조은영 선생님의 호의와 독려가 없었다면 이 책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감사함을 감추지 못하겠다!
2011년 봄김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