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시인 최성수의 세 번째 시집 [천 년 전 같은 하루]
(삶이보이는창, 2007년 9월 18일)

그동안 교육문예운동에 힘을 기울이며 창작활동을 지속해 온 최성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천 년 전 같은 하루』가 출간되었다. 최성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동남아시아와 몽골, 이 땅 곳곳으로 이동하며 순환적 시간을 탐구하고 있다. 그것은 직선적 시간과 함께 빠르게 떠밀려온 현대인들이 오늘날 직면한 위기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과 갈망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그 속에서 시인이 만나는 흑백의 풍경들은 오래 전에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이다. 시인은 ‘지금-이곳’으로부터 훌쩍 도피하여 몸을 이동시키지만, 그의 도피는 실상 모순된 세계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부와 정신 그 자체와 직면하기 위한 여정에 다름 아니다. 시집에는 그의 맨발에 묻어온 고비사막의 모래와 맨얼굴에 스쳐간 칼바람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최성수
1958년 강원도 안흥에서 태어났다. 1987년 『민중시』3집에 「나무를 심으며」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이 있고, 장편 소설 『비에 젖은 종이비행기』, 『꽃비』, 산문집 『가지 많은 나무가 큰 그늘을 만든다』등을 냈다. 지금은 경동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책 속에서

고비에서

육탈한 말이 햇살 아래 누워 있다.
얼마나 먼 길을 헤매야 저렇게
제 육신조차 벗어버릴 수 있을까?

눈 높이에 떠 있는 구름, 마른 풀 위에 닿을 듯 나는 새들
야생의 낙타들이 순례자처럼
깃들 곳을 찾아 가고 있다.

길은 어디에 있을까? 사방으로 누운 풀들이
누군가 지나간 흔적처럼 남아 있을 뿐
무한 천공의 벌판에 나는 길 잃은 낙타 한 마리로 떠돌고 있다.

낮은 구릉 아래 숨어 있는 겔에서는 어린 날 사진 속의 내 누님 같은 아낙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신 아이락*을 따라주며 벌판 끝을 바라보던 그 아낙, 집 떠난 낙타를 찾아 칠백 리가 넘는 물가로 갔다는 남자를 기다리며 들꽃처럼 곱게 늙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함께 있으면 칠백 리도 지척이라는 뜻일까?

밤이 와 불빛 하나 없는 고비에 등불 대신 별이 켜진다.
구름 높이에서 빛나는 별, 큰 붓으로 그려낸 듯 중천에 가로누운 은하수
야생의 낙타처럼 고비에 둥둥 떠
나는, 흘러간다,

별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풀이 되고,
풀은 끝내 저 혼자 흘러 흔적이 된다.

*아이락: 말 젖으로 만든 몽골의 술, 마유주.

::시인의 말

모래 먼지 벌판인 사막에서 용케 뿌리 내리고, 몸 녹이는 열기를 견뎌내는 낙타풀에는 온통 가시가 돋아 있다. 낙타는 사막 길을 가다 허기가 지면, 가시투성이 낙타풀로 주린 배를 채운다고 한다. 혀를 찔러대는 가시조차 맛으로 느껴야 하는 낙타의 허기, 그 아득함을 생각하며 나는 고비와 타클라마칸을 낡아 빛바랜 햇살처럼 떠돌았다.
중국 운남성에서 티베트로 가는 경계쯤에 ‘더친(德欽)’이라는 작은 골짜기 마을이 있다. 티벳어로 극락태평(極樂太平)이라는 뜻의 그 마을은,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의 깊은 골에 숨어있다는 것 말고는 전혀 이상향 같은 곳이 아니었다. 변변한 풀조차 없이 막막한 주름뿐인 산맥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곳, 그저 산자락 물기 조금 있는 곳에 밭을 일구고, 나무 몇 그루 심어놓고 일생을 살아야 하는 그곳은 외지인의 눈으로는 결코 극락이 아니었다.
시와 잠시 떨어져 있던 때, 나는 숱한 길들을 떠돌았다. 내가 떠돈 길들 중에서 유독 타클라마칸 사막과 더친의 히말라야 마을이 기억나는 것은, 그 두 곳이 모두 극한의 대조를 지닌 곳이었기 때문이다. 낙타풀의 가시와 낙타의 허기, 손바닥만 해서 더없이 푸르른 밀밭과 나무 한 그루 없이 깎아지른 산 주름, 그 대조가 삶을 더 처연하게 느끼게 했다.
십삼 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낸다. 나는 이 시집 속의 내 시가 어쩌면 낙타의 허기나 히말라야 산맥의 주름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막막함, 아득함 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쓸쓸함 말이다.
요즘 나는 내 고향 보리소골의 온갖 것들과 사랑에 빠져 있다. 꽃들과 나무들과 그리고 아침이면 자욱하게 깔리는 안개와, 안개를 헤치며 울어대는 새소리들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부디 이 사랑이 늘 쓸쓸함과 함께 하기를, 쓸쓸함과 사랑이 몸과 마음의 관계임을 결코 잊지 않기를!

2007년 여름 강원도 보리소골 산자락에서, 최성수

::추천글

오랜 침묵 끝에 나온 이 시집엔 그간의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시인은 타클라마칸을 ‘낯설고 정겨운/ 내 마음의 빈 먼지 벌판’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인은 모래와 열기와 열풍밖에 없는 황막한 사막도 따스하게 느끼고 살아 있는 것 일체를 피붙이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그의 외형적인 삶 저 밑바닥에 잠겨 있는 독특한 정서가 울려온다. 시의 내용이 설산이나 샹그리라, 혹은 아이딩호라 해도 그의 시 속에는 이웃집 밥 냄새와 아욱국 끓이는 냄새 그득하고, 동네 골목마다 매운 연기 자욱하다. 국경이 없는 원시농경사회를 꿈꾸는 사람처럼 인간과 자연을 보는 그의 시선이 근원적이고 생명적이다. 나도 이 시집 속에 들어가 시인과 한솥밥을 먹으며 살고 싶다.
-신대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