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명랑의 첫 단편집 [입술]
(문학동네, 2007년 4월 23일)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 <삼오식당>, <나의 이복형제들>에서 영등포시장의 왁자한 삶의 활기를 구성진 입담으로 그려냈던 소설가 이명랑이 등단 십 년 만에 첫 단편집을 펴냈다. 총 아홉 편의 소설이 수록되었고, 1999년에 발표한 '미니 초코파이'를 제외하면 모두 2004년 이후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소설집 <입술>은 개발사업으로 인한 영등포시장의 소멸 속에서 작가가 새롭게 찾은 문학적 영토를 보여준다. 이번 소설집에서 궁극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비열한 세상을 향한 '적의'가 아니라, 그러한 세상과의 '화해'와 '용서'이다. 이들을 화해와 용서로 이끄는 것은 바로 생의 의지이다. 제목 '입술'은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이 저 '삼인칭의 세계'에서 만날 수많은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작가의 새로운 각오이기도 하다.

이명랑 1973년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 1999년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 무크지 「새로운」 제1호에 '에피스와르의 꽃' 외 두 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로 소설가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나의 이복형제들>, <삼오식당>, <슈거 푸시>와 소설집 <입술>, 산문집 <행복한 과일가게>, <복숭아 향기>, <위로 - 나를 일어서게 하는 선물> 등이 있다.

::책속에서


내부를 어둠으로만 채운 항아리 앞에서 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새긴다. 발을 잘못 디뎌 저 안으로 떨어졌다가는 내 힘으로는 절대로 올라올 수 없으리라. 자, 이제는 네 차례다. 누군가 당장이라도 저 허방 속으로 등을 떠밀 것만 같아 나는 뒷걸음친다. 어쩌면 내가 뒷걸음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아끈 것인지도 모른다. 등을 뚫고 들어온 냉기에 놀라 뒤돌아봤을 때 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들어온 것은 문고리를 악물고 있는 자물통이었다.

- '사령' 중에서


::작가의 말

무엇이든 끌어안기 위해 누구는 기도를 하고, 누구는 '용서'와 '감사합니다'를 되풀이한다면, 나에게는 글쓰기가 있습니다.
왜 쓰는지 더는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야말로 저 '삼인칭의 세계'로 나는 곧장 걸어갈 것입니다.
짐은 벌써 다 꾸렸습니다.

- 이명랑


::추천글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상인들은 시장에서 쫓겨나고, 영등포시장의 작가 이명랑 역시 그곳에서 추방된다. 이제 작가 이명랑은 새로운 문학적 영토를 찾아서 탐색을 시작한다. 그녀가 새롭게 발견한 문학적 영토는 어디일까? 그녀의 시선은 영등포시장 옆에 자리한 아파트 단지에서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 태국의 치앙라이까지 건너가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작품들에서는 어느 곳에도 머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돌고 있는 인물들을 그리기도 한다. 자신의 새로운 문학적 영토가 발견되는 순간까지 그녀의 탐색이 계속될 것이며, 작품집 <입술>은 이 년여에 걸친 탐색의 결과인 셈이다. - 김종욱 (문학평론가)

이명랑씨의 소설은 민첩합니다. 민첩성의 특징이 낯설지 않다는 데서 오는 만큼 장차 기릴만하지 않을가. 억지로 쓴 글이 아님에도 신선합니다. 주제와 밀접히 관련됨에서 온 것인만큼 표현이기에 앞서 구성이라 하겠지요. 또한 이명랑씨의 소설은 매우 무겁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정석대로 쓴 소설인 까닭. 정석대로 쓴 소설이라니? 리얼리즘을 가리킴인 것. 분단 문제나 노사 문제를 다룬 소설에 이 나라 문학판이 한동안 찬란했음은 모두가 아는 일. 이 찬란함을 이을 수 있는 소재란 새삼 무엇일까. 이 물음에 작가 이씨는 유력합니다. 그것은 가족소설에 귀착한 것. 오랜만에 정석에 속한 작품을 대했군요. 가족이 사라진 오늘의 처지에서 보면 실로 구식이겠지요. 일본 인기작가 하루키 붐이 이를 실증하는 것. 가족 없는 소설이 그것이며, 이는 시대성의 반영인 것. 이에 대들기라도 하듯 가족이 문제적으로 떠오릅니다. 이 문제적인 무거움을 한껏 심도 있게 부각시킨 것이 작가의 강점입니다. - 김윤식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