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정의 첫 단편집 [도둑게]
(문이당, 2006년 4월 10일)

<물속의 사막>,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의 작가 김이정의 첫 단편집. 비정상적이거나 파탄 직전에 놓인 위태로운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회와 개인의 문제가 응축되어 나타나는 가족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8편의 소설이 실렸다.

<도둑게>의 주인공들이 택하는 삶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가족과 일상의 무사한 외형을 유지한 태 도피와 고립에 침잠하는 것, 다른 하나는 현실 제도가 용인한 가족과 일상의 틀을 거부하고 그 밖으로 일탈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와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의 가족은 한국 현대사의 혹독한 멍에를 짊어진 아버지를 등장시킴으로써 갈등 구조를 드러낸다. '도둑게', '수의', '태내여행'의 주인공들은 모두 혼외정사로 태어난 인물들이다. '근속', '개미의 집', '오디오'는 삶의 압력을 견디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빨리 성장을 완료한, 혹은 건너뛴 인물들의 이야기다.

김이정 1960년 경북 안동 출생.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물 묻은 저녁 세상이 낮게 엎드려'가 당선되어 소설가로 데뷔.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 속의 사막> 등이 있다.

::작가의 말

첫 창작집에 엮일 살붙이들을 이 바다 위에서 떠나 보냅니다. 거칠 것 없는 이곳에서 훨훨 떠나 보낼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떠나 보내기 위해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참 오래도 어눌하게 더듬거렸습니다.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요? 서툴고 어리석고 엄살투성이며 좁고 얕으며 가볍고 비틀린 내 모습들이 인도양 햇살 아래에 남김없이 드러나 보입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인도양은 내게 속삭입니다. 외면하지 말라고, 두 눈 부릅뜨고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떠나 보내라고... 모두 떠나 보내고 나면 자유로워질까요? 모두 텅 비우고 나면 인도양 바다 같은 푸른 물이 다시 차오를까요? 그 물을 양수 삼아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 김이정


::책 속에서

엄마는 무거운 쇠문을 열고 다시 집을 나섰다. 긴 겉옷을 벗어던지고 얇은 블라우스만 입은 채 공장으로 난 길을 걸어가는 엄마의 등줄기가 어느새 산등성이처럼 곧추세워져 있다. 미숙은 엄마가 걸어간 길을 두 눈 부릅뜬 채 쳐다본다. 좁고 남루한 그 길고 검푸른 이내가 포충망처럼 드리워지고 있다. 미숙은 엄마가 미웠다. 엄마가 먼저 차지해 버린 길 때문에 미숙이 갈 수 있는 길들이 모두 막혀 버린 것 같다. 아니 엄마가 미숙의 길을 모두 막고 서 있는 것만 같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갈수 있을까. 미숙은 문밖으로 난 검푸른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개미의 집' 중에서


::추천글

김이정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오래된 양철 지붕에 스며든 푸른 녹과도 같은 중첩된 그늘을 품고 있다. 낯설고 이상한 문명 속으로 아우성치며 밀려 나가는 오늘날 소설문법의 세태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도 귀한 미덕이다. 개인의 눈물겨운 삶과 잔인한 세상의 구조 사이를 고요하고도 분주하게 오가면서, 정감 있고 미려한 문체로 그늘 속의 그늘을 타고난 수예점 여자처럼 꼼꼼히 바느질해 내고 있는 김이정의 소설은, 정중하고 쓸쓸할 뿐 아니라 클래식하다. - 박범신 (소설가)

그 옌네, 이정이라는 작가. 안개꽃이나 강어귀 운무처럼. 어느 곳에 앉아도 처음부터 그곳에 있어 온 것 같은 사람. 하여, 얽힌 업 껴안고 산맥 너머를 향해 고르지 않는 길 떠나곤 했는데, 제 혼(魂)도 무거워, 말(言語)마저 무거워 끝내 쓰러지고 그렇게 허리뼈 무너져 내릴수록 시선 더욱 깊어 가더니 사리 하나 말갛게 구워 냈구나. 허, 그 옌네. 천지가 불쌍해 늘 눈시울 젖는, 작가 이정. - 한창훈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