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이청해의 네 번째 소설집 [악보 넘기는 남자]
(문이당, 2004년 11월 30일)

1991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소설 '하오'로 등단한 뒤, 일상적이고 평범한 존재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감각으로 인생의 미묘함을 포착하는 작가로 평가받는 이청해의 네 번째 소설집. 책은 생의 유턴 지점에 선 인물들을 통해 삶의 진정한 모럴과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만든다.

수록된 7편의 중.단편들은 두 사람의 만남을 모티프로 한다. 지은이는 상반된 삶에 놓여 있는 한 쌍의 인물을 극한적 상황에 몰아놓고 인생의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만든다. 파산을 겪고 빚 독촉에 시달리는 최광일과 암으로 위와 비장까지 들어낸 채 빚을 받으러 다니는 신용보증기금 사내와의 만남을 다룬 '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 가난한 삶을 이어가지만 순수하면서도 낭만적인 인물을 통해 생의 초라한 진실성을 드러내는 '악보 넘기는 남자' 등의 소설을 만날 수 있다.

책 속에서
「아저씬 너무 진지해. 진지하면 사람들이 싫어해.」
「내가 너무 진지해? 진지하면 싫어해?」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런 건 이제 조롱거리야.」
「조롱거리? 넌 세상을 확실히 아는 것 같구나. 네가 옳을까?」
「옳고 그르고가 문제가 아니잖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문제지. 아저씬 틀렸어.」
「틀렸다는 건 나도 알아. 근데 넌 나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척하면 착이지. 악보 넘기는 거 보니까 버얼써......」
나는 비아냥내는 입매로 피식 웃었다.
「그렇지만 네 생각과 다른 것도 있을걸. 난 그렇게 불행하지 않아. 악보를 넘길 때 난 긍지를 느껴. 이렇게 좋은 음악을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이 뿌듯해.」

이청해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문학사상」에 중편 '강'이 당선하면서 등단하였다. 장편소설로 <초록빛 아침> 이 있고 소설집으로 <빗소리>, <숭어>, <플라타너스 꽃> 등이 있다.

저자의 말
올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동안 미루고 피하기만 해왔던 일들이 아람 벌어 터지듯 여기저기서 툭툭 터졌다. 악몽 같은 소용돌이였다. 결과적으로, 내 인생이 커다랗게 구획되고 정리된 느낌이다. 이제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네 번째 소설집을 낸다.

흐르는 물 가운데 여울이 있듯 이번 책이 조그맣게 솟구치는 무엇이면 좋겠다. 멀리서 햇빛에 굽이치는 물이랑을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었으면. - 이청해

추천글
이청해의 새로운 소설집 <악보 넘기는 남자>의 대주제는 생의 유턴 지점에 선 인물들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모럴과 가치를 고민하도록 한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볼 때 표제작에 해당하는 '악보 넘기는 남자'에 나타난 순수하면서도 낭만적인 인간상에 시선을 다시 한 번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는 유행, 세태, 풍속에 민감하면서도 인생이라는 문제를 놓고 깊은 사색을 추구하는 작가가 자기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순수성을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