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

만능 해결사 – 무엇이든 해결해드립니다

참으로 위대한 철학의 문제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을 괴로워하며 살 값어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기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 A. 카뮈

미래스페셜컨설팅주식회사 (MSC)

MSC는 10여 년 전 특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법인이다. 사회적으로 늘어나는 특별한 수요에 부응하여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공인된 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유선전화 : 070-4488-5301, 팩스 : (02) 588-4040, e-mail : msc2010@hanmail.com).

그러므로 무슨 악덕 기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본사는 송파구 가락동 가락농수산물도매시장 근처 뒷골목에 있는 엘리베이터 없는 작은 4층 건물 전체를 임차해서 쓰고 있다.

그날은 새벽녘부터 차가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진눈깨비로 변했다. 그날 오후 늦게 본사 컨설팅팀의 김재원 팀장이 회사의 유선전화를 받았다.

“거기가…… 죄송합니다. MSC인가요? 어디선가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만…… 틀림없는가요?”

“그런데요. 말씀하십시오.”

“제가 뭔가 상의할 게 있어서…… 어떻게 하면 되죠?”

“선생님께서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은데…… 우선 선생님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현재로서는…… 밝힐 수가…… 그냥 X라고 해두죠.”

“저희 회사로 연락하는 분들은 처음에는 그렇거든요. 혹시 말입니다. 이메일로 요약해서 보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고객님께서 의뢰하는 일이…… 그러니까 이삿짐센터의 일인가요? 혹은 역할대행팀인가요? 탐정팀의 업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보다는 더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살조력팀의 업무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업무가 해당 될 수 있겠지요.”

“그렇군요……?”

“우선 가격을 알 수 없을까요?”

“업무의 종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죠. 먼저 현장을 방문해서……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가격을 산정해야 합니다.”

“어차피 한 번쯤은 오셔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가격을 결정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입소문이지만…… 그렇게 들었습니다.”

“좀 더 본론으로 들어갈 수 없을까요?”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컴퓨터도 없고 이메일도 없고 핸드폰도 없지요.”

“요즘 세상에…… 21세기 대명천지에…… 설마 농담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 전화는……?”

“전화는 불가피하게 대포폰을 쓰지만 끝나면 곧바로 땅속에 묻어버릴 겁니다.”

“우편물을 보낼 주소지는 있는가요? 또는 특별한 연락 방법이 있는가요? 원하시면 우리 직원이 찾아뵐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 주소지가 있습니다. 우리 집은 무허가 건물이어서 건축물대장에도 나오지 않지요. 하지만 우편 배달은 가능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제가 회사의 주소를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우편물을 보낼 때 선생님의 정확한 주소지와 구구한 사연을 상세하게 적은 편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등기속달로 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검토하고 나서 우리 직원이 선생님을 찾아가 면담할 수 있습니다.”

“먼저 회사의 계약서를 보내주세요. 자세히 검토하겠습니다. 저는 정확한 계약서 없이는 업무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걸 아셔야 합니다. 계약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계약서의 내용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계약서는 휴지 조각이 되는 거죠.”

그 고객의 목소리는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높낮이 없이 부드러웠다. 지극히 사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회사의 사무실 벽면에는 ‘죽음으로 삶을 완성할 수 있다’, ‘만능 해결사 – 무엇이든 해결해드립니다’, ‘고객의 비밀은 철저히 지킨다’라고 굵은 글씨체로 쓴 표어가 들어있는 세 개의 대형 액자가 걸려있다. 그게 회사의 기본 목표였고 규칙이었고 업무 지침이었다.

그들의 업무는 합법과 불법, 탈법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엄연히 주식회사였기 때문에 영업이익을 내는 것은 회사의 존립을 위해서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그들은 자선 사업을 하는 게 아니었다.

MSC는 회사 업무 전반을 기획 조율하는 컨설팅팀, 탐정 업무를 담당하는 탐정팀, 심부름센터, 역할대행을 주선하는 역할대행팀, 이삿짐센터 (야반도주 전문 포함)와 특수청소팀, 자살조력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컨설팅팀과 역할대행팀, 자살조력팀은 본사 직속이었다.

컨설팅팀은 회사 내부에서는 기획 관리팀으로 통한다. 회사의 두뇌에 해당한다. 회사의 발전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기획 업무, 인원의 채용과 배치, 회계 처리, 업무의 조정을 담당한다.

본사 건물 1층에는 에덴파견주식회사의 사각형 목재 간판이 걸려있고 그 회사가 운영하는 연극교실과 분장실은 지근 거리에 있는 별도 건물 5층에 자리잡고 있다.

어쨌거나 그들 간에는 정확하게 업무 분담이 되어 있어서 칸막이가 철저했고 독립채산제에 의해 매출과 수입 등을 별도 회계 처리한다. 그러므로 팀원들의 수입도 차별이 있었고 난이도가 높은 특수 업무를 처리할 때에는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각 팀은 업무특성상 경쟁이 불가피했고 업무수행 과정에서 협업할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만만치 않은 인생살이에서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들이었고 이 회사는 그들이 일하러 갈 곳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었다. 그들에게도 젊은 시절 한 때 인생의 꿈과 낭만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했으며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직원들은 회사를 자신의 사업체처럼 생각했다.

창업주인 김성수 대표이사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 MSC를 설립한 후에도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했지만 회사는 점차 안정되고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오랜 경험에 의해서 기업 경영은 최소한 10퍼센트의 이익률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왜 회사의 이름에 미래 (未來)를 붙였나? 회사의 신사업들은 10년쯤 지나면 사회적 수요가 더욱 폭발해서 일취월장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리고 준비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오지 않는 법이다.

MSC는 뚜렷한 사회적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모든 직원은 그 목적 의식을 공유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진실을 밝혀내면 따라서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이 노력한 대가로 정당한 이익을 취득하는 것이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일과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일은 그들의 관점에서는 일거양득인 것이다.

꿩을 잡아서 몸통은 쫄깃쫄깃한 꿩 매운탕을 끓여 먹고 그 알은 삶아서 술안주 하면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MSC는 고의적으로 인터넷 웹 사이트에 회사 이름이나 위치를 제대로 표시해 놓지도 않았으며 어디에도 광고를 한 적이 없고 무슨 전단지를 뿌린 일도 없다. 고객들이 만능 해결사라는 알음알음 입소문을 듣고 암암리에 직접 찾아오거나 이메일이나 전화를 해서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회사의 업무 추진에는 틀림없이 크고 작은 무수한 장벽을 만나게 되어 있었다. 인간도 세상도 복잡다단하니까. 그 장벽을 돌파하는 것은 결국 각 팀의 최종 책임자인 팀장의 몫이었다. 팀장이 지니고 있는 열정과 에너지가 중요했다.

MSC는 주식회사이다. 주식회사와 주식은 자본주의의 꽃이다. 주식회사가 없다면 주식도 없고 주식 거래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식 매매를 한다. 하지만 개미들은 대부분 돈을 잃는다. 그럼에도 마약 중독처럼 끊을 수 없다.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회사는 비상장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도유망한 회사라고 해도 이 회사의 주식을 살 수는 없다. 이 회사의 주식 지분은 대표이사가 40퍼센트, 네 팀의 팀장이 15퍼센트씩 소유하고 있다.

자살조력팀

특수 비밀 조직인 자살조력팀은 이 회사의 은근한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해야할까? 언젠가 세상이 돌변하면 버튼만 누르면 수초 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안락사 캡슐’ 또는 ‘안락사 키트’이건 자살약 판매가 편의점이나 인터넷에서 가능한 시기가 도래할지 모르니까.

자살조력팀의 조성식 팀장은 뒤늦게 미국 대학에서 복수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범죄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생리학, 사회학을 전공했고 오랫동안 민간 단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심리 상담과 프로파일링 업무를 수행했다.

심리 상담사는 심리 상담과 분석을 통해서 정신적, 정서적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는 주로 정신병원 퇴원 환자, 약물중독 치료 시설에서 일정 기간 치료를 받은 사람, 교도소 출소자, 소년원 퇴원자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그런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게 하는 고도로 숙련이 필요한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업계에서는 실력이 아주 출중한 상담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이나 TV 등에 얼굴이나 신분 등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인생 최초 직업은 부산의 중형병원 응급실에서 의사를 보조하는 임시직 응급 구조사 역할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수까지 했지만 원하는 최고 명문 대학의 경제학과에 입시가 실패하자 자포자기하고 백수 생활을 하던 무렵이었다.) 앰뷸런스와 병원을 연결해주는 브로커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응급실에는 빨간 전화기가 있었고 벨이 울리면 응급 상황이기 때문에 장갑을 착용하고 장비를 켜놓고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부산항 제3부두 40세 초반의 항만 노동자가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오고 있었다. 그 환자는 거의 30분 동안이나 맥박이 없다고 했다. 심장이 제대로 뛰지 못하면 산소가 부족해서 뇌가 죽는다. 환자가 들것에 실려 응급실로 들어왔고 외상용 가위로 옷을 자르고 정맥주사인 에피네프린을 주입하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지만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죽은 채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필요한 응급 처치를 시도해야 했다. 기적이 일어나기 바라면서. “할 만큼 했다니까. 더이상은 무의미해.” 그러고 나서 의사는 죽음을 인정하고 선언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감추기 위해서 밖에서 볼 수 없도록 침대에 흰색 커튼을 쳤다.

조성식 팀장은 21세기 대명천지에 어떻게 하여 그렇게 자살이나 고독사가 유행하는지 그 이유와 사연을 알고 싶어서 그가 한때 연구원으로 근무했던 한국자살예방재단의 ‘심리부검과 프로파일링 면담 분석 보고서’를 검토했다. 또한 자살학적 관점에서 자살 신화와 자살의 전염과 연쇄자살, 자살의 잠재적 위험요인과 경고 신호 등에 대해서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무엇이라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자살은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무려 절반이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빠져있다. 어쩐 일인지 세상은 날이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불공정하고 부조리해졌다. 너무 부당한 사회적 대우와 모욕 등은 분노를 유발했다. 깊은 좌절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들은 중증의 불면증을 호소한다. 그래서 조사 대상자의 상당수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자살이란 무엇인가? 자기를 살해하는 행위 아니겠는가? 칸트가 말했듯이 모든 자살은 일종의 타살 아니겠는가?

자살 이외의 고백의 피난처는 없다고 했으니까 자살은 곧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인생에 패배했다는 걸 혹은 인생을 절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고백하는 것인가?

성경 말씀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자살은 살인이라는 일종의 범죄로 보았고, 자살의 이유로 육신이 곤고하고 마음이 혼란하여, 생이 허무하여, 분노를 참지 못해서, 고통이 극심해서, 자책하여 등을 들고 있다.

자살한 사람은 죽어서 말이 없다. 결국 죽음의 문제이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일상적 존재 양식으로 삶의 연장선 상에 있다. 삶의 종점에 불과한 것이다. 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해야만 하는가? 죽음은 그 누구도 빗겨갈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사무엘 하 14:14; 로마서 6:23)

자살하는 힘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A. 테니슨)

자살조력팀 (assisted dying team)의 경우에는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진실을 캐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접 만나서 시간을 아끼지 않고 면담하는 게 중요했다. 그의 작은 몸짓 하나, 얼굴 표정, 숨소리, 눈빛을 살펴보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심장은 단지 혈액을 순환시키는 펌프가 아니다. 생명의 상징이고 영혼이 깃드는 곳으로 생명력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고객의 자살 의사 또는 의지가 확고해야 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했다. 둘째는 자살의 이유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어야 했다. 단순한 안락사의 경우는 안 된다. 주로 심리 분석과 프로파일링 기법을 사용한다. 프로파일링은 범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범죄자 프로파일링은 심리학, 정신과학, 사회학, 범죄학 등을 토대로 하여 범죄자의 심리와 행동을 분석한다. 고객의 심리와 행동 특성을 프로파일링 기법으로 분석해서 자살의 동기와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셋째가 가장 애매했다. 자살의 의사와 이유가 명백하지만 고객이 마음이 흔들리면서 망설일 경우이다. 그럴 경우에는 고객을 설득하고 격려해서 자살을 감행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거나 자살할 특별한 이유나 동기가 없어서 자살해서는 안 될 사람은 세뇌를 해서라도 살 수 있는 희망을 심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다.

하지만 고객에게 폭행이나 협박 등을 행사하거나 고객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세심증, 강박증, 병적인 죄책감을 일으키는 교묘한 심리적 수법이나 고객의 흔들리는 자아를 조종하는 가스라이팅 같은 수법을 사용해서 자살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

자살방조죄는 이미 자살을 확고하게 결심한 사람의 자살행위를 도와주어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하면 성립된다. 그 방법에는 자살 도구인 총, 칼 등을 빌려주거나 독약을 만들어 주거나 조언 또는 격려를 한다던가 기타 적극적, 소극적, 물질적, 정신적 방법이 모두 포함된다 (대법원 2005도1373 판결). 그러나 위력자살결의죄 또는 위력자살결의방조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해 행위자 (피고인)의 자살자에 대한 폭행이나 협박 등의 위력이 자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여 자살자가 그 의사결정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거나 자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하여 자살자가 자살 이외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여 자살에 이를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 (부산고법 96노502 판결, 상고기각).

위력자살결의의 법정형은 살인죄에 준한다고 규정되어 있어서 행위자의 행위는 살인에 버금갈 정도의 죄책을 질 정도라고 보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다시 말하면 자살을 확고히 결심한 경우에도 마음이 바뀌어 번복을 하면 즉시 철수하는 게 원칙이다.

조 팀장이 자살조력팀을 만드는 데는 캐나다의 사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캐나다의 ‘임종 관련 의료 지원법 (MAID)’은 회복 불가능한 신체적 질환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성인의 경우에는 의사 두 명의 확인과 동의 절차를 걸쳐 처방받은 독극물을 직접 주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법이 그런 불가피한 경우에도 허용하지 않고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법을 어기면서 자신이 실행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한 것이다.

인터넷 자살 카페

하지만 자살조력팀은 ‘인터넷 자살 카페’의 개설자는 아니다. 당연히 그런 카페와는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어떤 카페는 카페 회원으로 가입시키기 위해서 (‘자살을 원하시면 가입하십시오.’라는 문구와 함께 동반 자살 카페의 이름, 카페의 인터넷 주소 등을 표시한다.) 또한 그 카페의 개설자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동반자살 카페 게시판에 글 남겨서 계획 세워 뜻대로 하세요. 자살 멤버 구하신 분들은 탈퇴하고 죽으세요. 자살할까 말까 고민하고 계신 분들은 조용히 탈퇴하기를 눌러주세요’라고 말한다) 회원들이 서로 자살의 당위성 및 자살 방법 등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도록 하고 (‘연탄은 타다가 산소가 부족하면 꺼지게 돼요. 꺼진다는 것은 충분히 일산화탄소를 배출했다는 거겠지요. 좁은 밀실에서 피우면 더 효과적일 거라고 보는데 혹시 모르니 두 장 사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두 장을 쌓아 놓으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동반 자살자를 물색한다.

또 다른 카페는 전국적으로 회원이 수백 명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탐정팀이 조사 확인한 바로는 그보다는 훨씬 많다는 것이다.

카페의 모토는 ‘우리는 단 한 번 죽는다’였다.

그 카페의 개설자는 자살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개의 가명을 번갈아 쓰기 때문에 본명은 알 수 없다. 그는 철저하기 자신을 숨기는 은둔자였다.)

2018년 늦가을 경이던가. 북한산 국립공원이 보이는 도봉구 A빌라에서 신부전증으로 투병을 하고 있던 남편이 진통제의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목을 스타킹으로 감은 후 아내에게 “여보! 여보! 너무 고통스러워. 도저히 살 수 없다니까. 죽여줘. 죽여 달라니까.”라고 간절하게 하소연했다. 아내는 그 스타킹을 힘껏 잡아당겨서 목을 졸라 질식으로 죽게 하였다. 하지만 그 아내는 재판을 받고 촉탁 살인죄로 징역 4년에 처해졌다.

그는 그 무렵 신문에서 그 사건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이미 고인이 된 그 남편을 내심 비난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나? 비겁하지 않았나? 결단코 스스로 죽어야 했다. 왜? 그 가련한 아내가 4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는 불치병을 앓고 있던 가까운 지인이 모진 고통 끝에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했지만 그 방법이 서툴러서 실패로 끝났고 그 후유증으로 몇 달 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가 칼로 배를 찔러서 과다 출혈로 죽은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도저히 회생할 가망이 없는 불치병 환자들이, 병들고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몰라서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의료와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지금 세상에서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죽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단체인 ‘엑시트 인터내셔널 Exit International’에서 출간한 온라인 자살 설명서인 「평온한 약 안내 Peaceful Pill Handbook」를 읽는다.

여러 군데 동물 용품 가게에 들려서 다량의 수면제를 사서 먹으면 된다. 의식을 잃을 만큼 진통제를 먹으면 며칠 만에 죽을 수 있다. 펜토바르비탈 성분이 들어 있는 넴뷰탈을 먹으면 신속하지만 급작스럽지 않게 잠에 빠져 죽을 수 있다.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지도자가 말했다. “약물을 사용하세요. 간단하고 편리합니다. 굶어서 죽는 거, 목을 매다는 거, 차 안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가스를 마시는 거, 사무라이처럼 칼로 배를 갈라서 과다 출혈로 죽는 거 등등 모두 옛날식이에요. 편안하게 죽는 게 중요해요. 아시겠죠.”

탐정의 세계

MSC의 탐정팀 (대외적으로 통용되는 정식 명칭은 탐정법인 솔로몬이다) 사무실은 광진구 구의동 옛날 서울동부지청 근처 변호사 사무실이 즐비한 거리의 4층 건물 전체를 쓰고 있는데 1층에서부터 3층까지는 심부름센터가 사용하고 있고 4층은 탐정팀이 사용하고 있다. 건물 입구는 물론이고 형광등이 희미하게 비추는 복도에는 간판도 상호도 보이지 않는 사무실이다.

탐정팀은 ‘모든 법률문제, 법률상담을 원하는 분은 오세요’라는 선전 문구를 내걸고 법률 카페를 이미 개설했다. 많은 돈을 주고 탐정 업무를 의뢰하는 사건은 거의 반드시 법률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온라인 법률 카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카페에는 법률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와 생성형 AI로 판례를 분석하는 전문가 2명이 함께 근무했다. 그래도 변호사법 위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무료 상담을 진행했지만 그러나 돈 버는 방법은 따로 있다. 단골 변호사 사무소에 은밀하게 사건을 연결해주고 착수금의 30프로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차제에 별도로 유한회사인 법률사무소를 정식으로 개설해서 서초동에 사무실을 내는 게 어떠냐는 둥 의견이 분분했다.

2020년 신용정보법 개정으로 탐정 사무소가 합법화되면서부터 미검증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그들 업체는 사무실도 없이 핸드폰 또는 대포폰 하나로 업무를 수행한다. 말이 탐정이지 정보 브로커일 수도 있다. 출신이 불분명하거나 조직에서 밀려난 조폭 출신이 신분을 숨기고 탐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러니 민간 탐정 자격증이 남발되고 탐정사무소가 여기저기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터넷에서도 수백 개의 탐정사무소가 눈이 빠지게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MSC 탐정팀 직원 대부분은 경찰청 등록 탐정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탐정사 배지를 소지하고 한국공인탐정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탐정팀장은 대표이사가 겸직했다. 강력계 형사 출신으로 모 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탐정 법무를 전공했다.

그는 전남 목포 출신으로 목포상고를 졸업한 후 뜻한 바 있어 아주 일찍 경찰에 투신해서 줄곧 고달픈 강력계에서만 처음부터 끝까지 근무했다. 본인이 희망한 것이다. 하지만 승진은 지지부진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서 경찰 내 호남 인맥이 비로소 기를 펼 때쯤 진급할 수 있었다. 그는 성질이 급한 열혈 형사였다.

인천의 경찰서에서 근무할 당시 어느 날 폭력과 사기 전과 5범인 지저분한 피의자가 높은 사람과 친척 관계라는 둥 돈이 많다고 뻐기는 둥 잘난 척하자 그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흠씬 두들겨 패준 게 말썽이 되어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파면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사표가 처리된 게 다행이었다.

그의 별명은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평생 불독으로 통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애매함이나 타협을 배제하고 일을 어정쩡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경찰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서로 협력할 일이 생기면 그는 과거 경찰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60대에 접어들면서 다부진 몸매에 여전히 열정이 넘쳐 흐르지만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은 숨길 수 없었다.

그들은 탐정법인 솔로몬의 이름으로 홈페이지, SNS, 유튜브, 블로그를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때로는 불법이나 탈법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 그렇지만 홈페이지에는 선전용으로 그들의 과거 탐정 실적을 보란 듯이 잔뜩 과장 미화하여 올려놓았다.

탐정팀은 지금도 인원이 제일 많고, 차량, 첨단 장비 등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지만 경찰처럼 조직을 갖추는 게 목표였다. 조만간 산하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퇴직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고가의 포렌식 장비를 갖추고 필적 감정이나 지문 감정, DNA 감정, 랜섬웨어의 암호를 풀고 데이터를 복구하는 작업, 디도스, 랜섬웨어, 피싱 등 형태를 가리지 않고 해킹을 시도하는 꽁꽁 숨은 해커를 색출하는 작업, 삭제된 메일이나 인터넷 사용 기록을 복구하고 비밀번호를 해제하는 작업을 전담할 사설 감정센터를 신설할 예정이다.

특히 DNA 분석은 장기 미제 살인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분야는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고유 영역이다. 하지만 민간 영역인 친생부인의 소, 부를 정하는 소, 인지청구의 소나 인지취소의 소, 친생자추정 등에서 증거자료로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STR 부분을 분석하는 DNA 분석은 부모 자식 간 혈연 관계를,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은 형제 자매 간 혈연 관계를 완벽하게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 DNA 분석 기법은 점점 그 활용도가 높아질 것이다. 유전자의 조합이나 연결을 통해서 완벽한 짝 찾기를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선남선녀들은 속궁합이 맞거나 천생배필인 자신의 짝을 찾는데 애를 먹고 있지 않은가?

디지털 유산

끔찍한 교통사고, 항공기 사고, 화재 사고 등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족을 잃었을 때 황망한 가운데 사망자의 지인들에게 부고를 알리고 싶어도 연락처를 알지 못해 속을 태우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특히 스마트폰 암호는 본인이 아니면 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가족이라도 (삼성전자, 애플 등) 스마트폰 제조사나 (KT, SKT, LG U+ 등) 통신사, (네이버, 카카오 등) 플랫폼이 이를 알려주지 못한다. 법률이 엄격하게 규정하는 개인 정보 보호 원칙에 따라 회원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같은 개인 정보를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망자가 생전에 동의한 경우에는 스마트폰 속 연락처나 소셜미디어의 기록 등 디지털 유산을 유족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금 고인이 남긴 기록을 디지털 유산으로 지정해 상속 가능하도록 하는 디지털 유산 제도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도입이 한창 논의되고 있다.

스마트폰 제조사들 역시 최신 제품에는 생전에 지정된 사람들이 고인이 작성한 글들, 음성 파일들, 연락처 등이 저장된 클라우드를 열어서 열람할 수 있는 기능을 설치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 법률의 규정에 의해 꽉 막혀 있고 다른 대안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망인의 가족들은 궁여지책으로 솔로몬으로 고인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와서 연락처나 소셜미디어의 기록 등을 풀어서 알려달라고 은밀히 의뢰하는 것이다.

옛날의 탐정 업무는 불륜사건 조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간통죄 폐지 후 불륜 현장을 급습하던 경찰 업무는 탐정사무소로 넘어갔다. (2015년 2월 헌법재판소는 간통한 기혼자와 상간한 자를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게 한 형법 제241조에 대해서 위헌 결정을 내렸다. 1953년 성립된 간통죄가 62년 만에 폐지되면서 그 무렵 피의자 1779명이 즉시 혐의를 벗어났다. 하지만 피해 배우자가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할 경우 수고스럽게도 직접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요즈음 탐정팀의 다양한 업무는 세상이 복잡해지고 세분화되니까 그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기업이나 개인의 신용, 재산 상태, 개인적인 비행 따위를 몰래 조사하고, 밀수업체의 불법행위를 밝힐 수 있는 증거자료를 채증하고, 경쟁 회사의 제품 개발 정보를 탐색하면서 시제품이나 레시피를 빼내고,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구입하여 설치한 변형된 불법 카메라를 탐지하는 일, SNS에 ‘청소년 환영’이라고 대놓고 홍보하면서 학위증명서, 성적증명서, 어학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등 각종 공문서와 사문서를 위조하는 위조자를 잡는 일, 대학과 유학원의 의뢰로 불법 체류하는 유학생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 수배자와 도주자를 추적하는 일, 횡령 배임을 하고 도망간 회사 직원을 잡는 일, 실종자를 찾는 일, 행방불명자를 찾는 일, 은닉 재산을 찾는 일, 유명회사 제품과 유사한 가짜 상품을 유통시키는 유통업자를 잡는 일, 랜섬웨어를 이용해서 금전을 갈취하는 도박 사이트를 찾아내고, 산업 스파이를 색출하고, 꽁꽁 숨은 해커들을 특정해서 잡아내고, 거액의 돈을 사기치고 잠적해버린 사기꾼을 추적하는 일, 야반 도주한 불쌍한 채무자를 찾는 일, 어느날 갑자기 이별을 통보하고 숨어버린 애인을 찾는 일을 한다.

탐정팀은 고객의 요청에 따라 증거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한다. 거액의 사기를 당했다는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의뢰인이 말했다. “지금 단계에서 경찰에 고소할 수는 없어요. 우선 잡고 나서 돈을 받아내야 해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기꾼이 직접 운전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메르세데스 마이바흐를 발견한 후 3개 팀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를 따라갔다. 서로 신속하게 연락을 주고 받으며. 차에는 운전 기술이 뛰어나고 경험이 풍부한 운전자와 좌우 감시 역할을 하는 두 명의 요원이 타고 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어느새 눈치를 채고 6차선 도로를 빠르게 달려 교차로에 접근했는데 마침 신호등은 초록색이다. 노련한 거물 사기꾼은 직진하지 않고 우회전하고 나서 다시 불법 좌회전을 두 번씩이나 하면서 잠깐 멈춰 서는가 싶더니 속도를 내서 직진했다. 갑자기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그리고 시야를 벗어나 사라진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탐정은 사내 컴퓨터 포렌식을 통해서 회사 내에서 발생하는 임직원의 비리, 횡령 배임 행위를 적발하고 특히 한창 개발 중인 극비 기술이 유출될 경우 신속하게 수사를 의뢰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증거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수사기관이 직접 수사에 착수할 수 있도록 관련 증거를 수집해서 제공함으로써 수사 공백을 메꾸는 것이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학교 폭력 조사관 행세를 하면서 학교 폭력 피해 학생 부모들이 요청하는 가해자의 집 주소, 부모의 신원을 조사하기도 한다. 대도시 뒷골목 지역 유흥협회의 의뢰를 받아 유흥가 골목에서 암암리에 불법 영업을 하는 유흥업소를 파악하기도 한다.

사설 경호 업무도 탐정팀에서 수행한다. 때로는 거래처의 요청에 따라 진짜 정예 경호원을 파견하기도 한다. 그들은 무술 유단자이면서 청와대 경호처 은퇴자들에게서 비밀 경호 업무에 대해 철저히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경호 요원들은 누굴 경호하느냐에 따라 복장부터 달라진다. 정 · 재계 고위 관계자라면 요원들도 이들에게 맞춰 정장차림의 양복을 입는다. 연예계 아이돌일 땐 캐주얼한 차림을 한다. 남자 요원은 머리칼에 무스나 왁스를 바르고 여성 요원은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단단히 묶는다. 그들은 선글라스를 자주 쓴다. 범인이 요원의 시선을 잘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경비업법에 따르면 사설 경호원은 경비 업무를 수행할 때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거나 정당한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호원이 다른 사람에게 협박 위력을 과시하거나 물리력을 행사하면 경비 업무의 범위를 벗어난 행위가 된다.

경호원에게는 직관이나 직감이 아주 중요하다. 도발적인 상황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칼날이 눈앞을 스쳐도 총소리를 들어도 두려움에 떨거나 겁에 질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솔로몬은 열심히 영업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큰 이익이 나지 않아서 겨우 적자를 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의뢰인에 대한 청구금액은 보통 시간당으로 계산하고 소요되는 비용은 따로 요구한다. 선불 조건이 원칙이고 따로 성공 보수금을 책정하기도 한다.

MSG 탐정팀은 발 빠르게 탐정 업무를 확장하고 있다. 현재는 소송 증거 자료 수집에 강점이 있다. 고객의 의뢰를 받아 소송 당사자의 신원이나 행적을 조사한다. 이혼소송에서 유리한 증거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증거물을 수집하고 몰래 카메라로 촬영하고 대화를 녹취한다. 그러므로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지만 초고성능 카메라와 녹음기는 필수품이다. 누군가를 몇 시간씩 또는 며칠간이나 잠복해서 기다리고 미행해서 밀회 사진을 찍어온다.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하다면 불법적인 도감청이나 자동차의 적당한 위치에 위치추적기(GPS)를 다는 것도 불사한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은 애매모호하다. 그들은 업무 수행을 위해서는 식은 죽 먹듯이 경계선을 초월해버린다.

지금 MSC 탐정팀의 주된 고객은 (결국 타인의 불행으로 먹고사는)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들과 사건 브로커들이다. 브로커들은 법원이나 검찰청 주변에 득실거린다. 서울에만 만 명이 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브로커는 변호사와 공생한다. 어떤 간 큰 브로커는 수하에 막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새끼 변호사를 몇 명씩이나 고용해서 거느리고 있다.

그들은 온갖 수법을 동원해서 돈이 될만한 사건을 물색하거나 아예 사건을 만들고 변형시키고 심지어 조작하는 등 혈안이 되어 있다.

늙고 노련한 단골 사무장이 말했다.

“요즈음 거기 법률 카페는 뭘 하고 있는거야? 혹시…… 우린 단골 거래처야. 계산은 항상 정확했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다른 데 주면 안 되지. 악마처럼 덤비는 걔들과는 다르단 말이야. 우리 변호사는 부장 검사 출신이지만…… 마약 수사를 전담했던 검사가 사표를 내고 나서 마약 사범을 변호하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야.”

“저희도 잘 알고 있어요. 절대로 이중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절대가 어디 있어?”

“절 믿으세요.”

“이번 건 역시 이혼소송이야. 우리 쪽은 남자야. 남자는 광양 출신이지.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해. 채소와 과일 도매로 큰돈을 벌었다고 하더군.”

“큰 건인가요?”

“단가가 높지.”

“얼마나……?”

“재산분할이 100억 대라니까.”

“정말 큰 건이네요.”

“몇 년 만이야……?”

“얼마나 받을 건가요? 모처럼 만난 천재일우의 기회인데 뜯어낼 수 있을만큼……?”

“영업비밀을 왜 물어……?”

“그쪽도 양심이 있기는……하나요?”

“양심이 밥 먹여 주나?”

“그래도……?”

“요즘 당사자들은 옛날과는 다르지. 다 알고 온다니까.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니까 은근슬쩍 넘어갈 수가 없어.”

“그건 그쪽 사정이고요. 우리는 우리죠. 몇 주일…… 몇 달간이나 고생 고생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때국놈이 번다고…… 그런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의 직업적 불만 때문에 무겁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가끔 온 밤을 차 안에서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자야한단 말입니다.”

“이거…… 왜 이래? 한두 번 거래했어……? 싫으면 관둬. 탐정 회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리가 뭘 해야 되죠?”

“남자 쪽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하려고 하는데…… 남자가 소 제기 전에 10억을 준다고 하면서 합의이혼을 종용했다네.”

“그런데요? 뻔하네요. 여자가 그거로는 응할 리가…… 없죠. 여자는 먼저 법률 카페에 들어가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었을 거에요. 그러면 사건이 없어서 굶어죽게 생긴 변호사들이 벌떼처럼 덤벼들게 뻔합니다. 변호사들이 가만두지 않겠지요.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길 겁니다. 합의하면 절대로 안 되죠. 어떻게든 사건화시켜서 돈을 뜯어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걸 누가 모르겠어. 넘어가자고. 남자는 꼭꼭 숨겨둔 다른 여자가 있으니까. 그런데 여자 역시 자기보다 서너 살 아래인 남자가 있다는 거야.

지금은 별거 중이야. 뻔하지. 날마다 부부 싸움이 격렬해지니까 여자가 견디지 못하고 결국 집을 나갔어. 잠실 석촌 호수 근처 빌라라고 추측하고 있더군.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다는 거지.

그거만 확실하게 잡으면 협상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거든.”

“그거 잡으려면 보통 문제가 아녜요. 여자의 임시 거처를 찾아내야 하고. 걔들이 밀회를 하는 모텔도 찾아내야 하고. 걔들 엄청 신경 쓸 텐데요. 다시 말하면 동거까진 안 갔을 겁니다.”

“돈 걱정은 하지마. 곱빼기로 할 거니까. 그러니까 오랫동안 미행하고 잠복해야 할걸.”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우리가 늘 하던 겁니다. 방법은 많이 있어요.”

“실력을 발휘하라고. 그 결정적 장면을 몰래 카메라로 찍고 녹음하면 끝내주는 거지.”

“우리야 뭐…… 돈만 많이 준다면 못 할 거 없죠.”

탐문 조사부터 시작했다. ‘탐문에서 시작해서 탐문으로 끝난다’라고 했지만. 탐문 조사는 모든 조사의 기본이자 문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래도 탐문 조사를 하면서 여자의 고등학교와 대학의 동창생들을 여성 요원이 만나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여자의 이름은 오인우이고 전남 여수 출신으로 순천의 모 대학 영문과를 나왔다. 여자는 집을 나와 이혼한 후 혼자 사는 언니 집에서 임시로 살고 있다).

남자의 경우 직장과 출신 고향, 졸업한 지방 대학을 알아냈다 (남자의 이름은 장영태이고 전남 고흥 출신으로 모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광주에서 3년간 공무원 생활을 했고 그 후 전직해서 현재는 어느 중견 식품회사에서 영업팀 과장으로 있다). 그들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사이였다. 하지만 남자는 자가용 승용차가 없었고 오직 지하철로만 이동했다. 탐정팀은 한 달여 동안이나 모자와 안경을 착용해서 변장한 채 미행과 잠복을 계속하면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들이 밀회를 하는 은밀한 장소이건 모텔이건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용의주도했는지 아니면 뜬소문과는 달리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탐정팀은 더 이상의 추적을 포기했고 성공보수금도 하늘로 날아가 멀리 사라져버렸다.

노련한 탐정은 귀중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경찰관이나 변호사, 사무장, 브로커 행세를 하거나 때로는 기자, 인플루언서, 공연 기획자, 프로듀서, 음악 비평가, 신흥종교 사이비 교주, 가톨릭서 면직된 가짜 사제, 가짜 신분증 위조업자, 부동산 공인중개사, 펀드 매니저, 회계사, 공인 감정사, 독심술사, 의사 등 전문직 행세를 하고 심지어 조폭 두목 노릇까지 한다.

탐정에도 탐정 철학이 있고 탐정윤리강령이 있다. 법률에 위반되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비밀유지 의무, 불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사건의 수임 금지, 이익충돌 회피 의무, 정직 및 진실 유지 의무도 있다. 하지만 솔로몬의 직원들은 지킬 수 있는 건 지키고 지킬 수 없는 것은 간단히 지나쳐버린다.

탐정은 사건의 세밀한 부분을 구별할 줄 아는 ‘곤충의 눈’과 독수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듯이 사건을 전체적 거시적으로 파악하는 ‘새의 눈’이 필요하고, 물고기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도 감지할 수 있는 ‘물고기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얕지만 광범위한 전문적 지식을 조금씩 갖추고 있어야 하고 의사 소통의 달인이어야 한다. 얼굴 표정이나 작은 몸짓, 마음의 창인 눈을 통해서 인간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고객들이 모두 진실만을 말하는게 아니었다. 그들은 숨길 것은 숨기고 공개할 수 있는 것만 말할 수도 있었다. 의뢰인과 일종의 심리 게임을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착수금과 비용은 반드시 선불 조건이어야 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지 않은가. 사건이 끝나고 나면 오리발을 내밀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변에다 유머 감각을 한껏 발휘해서 상대방의 혼을 빼놓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심부름센터 (혹은 흥신소)

2020년 8월 신용정보법이 개정되면서부터 탐정업이 합법화되었다. 오랫동안 우리나라 탐정업은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암암리에 몰래 영업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기업이나 개인의 신용, 재산 상태의 조사, 사람 찾기, 불륜 현장의 증거 잡기, 학교 폭력 가해자 관련 증거 수집, 개인 정보 데이터베이스의 불법 유통, 스토킹, PC나 휴대폰 해킹, 위치 추적기(GPS) 몰래 부착하기, 각종 뒷조사 등을 돈을 받고 몰래 조사해서 알려 주는 민간 조사 업체 또는 탐정사무소를 흥신소 또는 심부름센터라고 했다. 경찰에서는 전국적으로 4,000여 군데의 흥신소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들은 공원이나 건물의 공중화장실에 공공연히 광고 스티커를 붙여놓는다. 의뢰인들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이름이 꽤 알려진 정치인이나 대기업의 오너 등도 익명으로 몰래 의뢰했다.

MSC 탐정팀은 당초 암암리에 ○○심부름센터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신용정보법이 개정되면서 발 빠르게 대외적 명칭을 법무법인 솔로몬으로 해서 탐정업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그간 쌓아온 은밀한 고객들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센터를 당분간 계속 운영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이다. 다만 그 시점에서 앞으로는 전통적인 탐정 업무는 탐정팀이 담당하고 심부름센터 업무는 완전히 분리해서 진짜 용역업체 업무만 수행하기로 업무 분담이 되었다.

어느새 세상은 많이 변했다. 택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퀵서비스 때문에 용역업체의 고유업무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들과 경쟁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먹고 살려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무슨 짓이든지 해야 했다. (하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센터의 업무가 너무 심하게 아슬아슬 합법과 불법의 영역을 넘어 들고 있었으므로 위험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확고한 경계선을 설정할 필요가 있도록 절감하고 있었다.)

옥바라지 업무는 한사코 사양한다. 옥바라지는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재소자들이 의뢰하는 유해 간행물인 성인 잡지, 담배나 (극히 정교한 수법이 필요한) 마약의 교부, 펜팔을 원하는 여자들과의 연결, 스포츠 도박의 대행 등 심부름을 말한다.

이들 업체는 전국적으로 100여 개가 있다. (형집행법 제26조는 수용자의 경우 물품소지를 허용하고 있고, 제27조는 허가를 받으면 외부인의 수용자에 대한 금품교부를 허용하고 있다. 이 법 규정을 탈법적으로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학교 폭력의 경우 피해 학생의 부모나 친척들이 거액을 제시하면서 가해 학생이나 끝내 정식 사과를 거부하는 학부모를 죽지 않도록 때려주라는 부탁은 한사코 거절한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마약 거래와 마약 투약이 전방위적으로 침투하고 있다. 굴지의 대기업 정상적인 직원에서부터 전문직 종사자들, 대학 동아리 멤버들, 심지어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까지 암암리에 확산하고 있다. (마약류 중독이 되면 평생 동안 유혹에 시달려야 하는 만성 재발성 질환인데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의학으로도 도저히 가망이 없는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받고있는 환자들, 철딱서니 없이 자살 자체를 스스로 과장 미화하면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 우울 강박에 시달리는 젊은 여자들과 남자들은 안락사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흥분하고 매혹되어서 적극적 안락사를 간절히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마약과 안락사 약의 은밀한 배달이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단가가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약도 구해달라고 하면 딜러라고 하는 마약 판매상으로부터 대신 사다 준다. 안락사의 경우에는 고객의 요구 사항에 맞춘다. 가령 몸무게가 70kg이면 약은 20g이 치사량이다. CCTV가 없는 비밀스러운 곳에 ‘물건’을 넣어두면 고객이 스스로 찾아간다.

심부름센터는 보안 메신저를 이용한다. 여기서 물건은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된 스위스나 네덜란드 등 해외에서 사용되는 B성분 의약품을 말한다. 국내에서 이 약은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진정제와 마취제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약국이나 개인 간 거래는 엄격히 금지돼 있다.

보통 비트코인으로 50만 원을 송금하면 드로퍼 (Dropper)가 물건을 집 근처까지 가져다준다. 그들은 ‘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 있다’거나 또는 ‘평화롭고 고통 없는 죽음을 제공한다’고 노골적으로 광고한다.

마약에 호기심이 많은 고객들은 대개 랜덤채팅 앱을 통해 처음 마약을 접하게 된다. (식욕 억제제 디에타민의 별칭인) 나비약 중독에 빠지면 어느새 필로폰 중독으로 넘어간다. 랜덤채팅 ‘앙톡’ ‘즐톡’ 등에 ‘ㅋㄷ구해요’라는 글을 수차례 반복해 올린다. ‘ㅋㄷ’는 마약 투약자들 사이에서 엑스터시를 가리키는 ‘캔디’의 약자이다.

랜덤채팅 앱이 마약의 유통과 소비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얼음 넣고 술 같이 한 잔할 분 찾아요’라고 글을 올린다. 또는 ‘차가운 술 드실 분?’이라고 올린다. ‘차가운 술’과 ‘얼음’ ‘아이스’ 등은 모두 마약 투약자들 사이에서 필로폰을 뜻하는 은어이다. 그렇게 유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심부름센터의 직원이 그들을 낚아채서 비밀스러운 장소로 유인한 뒤 필로폰을 건네준다. 하지만 회사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직원은 절대로 함께 투약하거나 기타 성추행을 하거나 성관계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심부름센터는 마약 운반을 담당하는 직원을 채용할 때 엄격하게 심사를 했다. 운반책이 중간에 돈을 빼돌리거나 마약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도망가는 경우가 가끔 있었기 때문이다.

마약 판매상들이 모인 은밀한 대화방이 있다. 마약을 공급하는 판매상들은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대화방을 개설하여 수천만원 상당의 마약을 들고 잠적한 마약 운반책의 신상 정보를 박제 (공개)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불량한 드로퍼의 이름과 나이, 주민등록번호, 가족들의 정보를 공유한다. 운반책을 잡는 사람에게 돈을 주겠다며 막대한 현상 수배금을 걸기도 한다.

역할대행팀 (또는 파견 회사)

역할대행팀은 본사 건물 1층과 2층을 사용하고 있다.

원래 역할대행팀은 결혼식 하객 동원이나 장례식 조문객, 무슨 수상한 행사의 참석자, 전시장의 모델,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의 데모 참가자 동원이 가장 많았다. 장례식에도 상주의 체면을 세워주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줄 수 있는 정장 차림에 검은 넥타이를 맨 수십 명의 조문객이 필요했던 것이다.

거물 사기꾼들은 역할대행 업체를 통해 가짜 기자와 경호원 등을 동원한다. 조폭 두목의 경우에도 유흥가 골목의 보호 업소를 순찰할 때 대동할 조무래기 경호원을 의뢰하기도 한다. 거액의 투자금 유치를 위한 바람잡이를 파견하는 등 불법의 소지가 있는 업무도 마다하지 않는다.

파견 회사는 온갖 종류의 업무를 대행한다. 새로 뜨는 대행 업무는 퇴사 대행 서비스다. ‘사표를 대신 내드립니다’라는 업무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또 다른 직장을 찾아서 바로 이직하는 잡호핑 (job-hopping) 족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직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 직원이 경쟁 업체로 이직할 경우 극비 자료인 핵심 기술이 넘어가거나 회사의 제품 개발 계획 또는 영업 비밀 등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회사는 입사 당시 퇴직 후 전직 금지 약정을 맺는다. 전직 금지 위반이 발견되면 어김없이 소송이 진행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장래가 불안정하니까 직장을 그만두고 내 사업을 하겠다고 사업 아이템을 찾아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퇴직자, 얼마 전 회사에서 사전 통보도 없이 느닷없이 짤렸다는 고위직 퇴직자들도 고객이었다.

그들은 모두 퇴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는 것 자체를 참으로 어려워했다. 그들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극도로 위축되어 불안해했다. 그들은 딱한 처지를 호소했다. 그러면서 퇴직 대행을 의뢰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쪽 사람들은 당분간 쳐다보기도 싫어요.”

대기업 회사의 인사부장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오랫동안 회사에 다닌 부장급 사원이 퇴사 대행 서비스를 신청해서 대신 전화했다는 것이다. 역할대행팀은 본인을 만나 절차를 상의했다.

그가 말했다. “오라고 하는 회사가 있어요. 하지만 계속 망설였죠. 새로 온 직속 상관인 상무가 업무용 메신저로 너무 괴롭힌단 말이에요. 그 양반 명문 대학 출신에다 유학파고 커리어가 화려하죠. 회사의 오너 회장님과도 연결고리가 있으니까 이너 서클 멤버라고 할 수도 있어요. 제 목줄을 쥐고 있죠. 그러니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겠어요. 그렇지만 업무 시간도 아닌데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와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단 말이에요.

문제는 말입니다…… 한밤중에도 걸려 온다는 겁니다. 그때 모처럼…… 근 한 달 만에 발동이 걸려서…… 그 황홀한 순간에 말이죠…… 아내가 기분이 날아갈 거 같아서 노골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순간에…… 절정으로 치닫는 그 순간에 걸려 온단 말입니다. 도저히 안 받을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랬다가는 다음날 난리가 나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역할대행팀은 고객의 요청에 따라, ‘본인과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직접 연락하지 마세요. 개인 물건은 우편으로 착불로 보내주십시오.’라는 단서가 달린 사직서를 회사로 송부했다. 역할대행팀은 월급과 퇴직금의 정산, 퇴직연금이나 기타 회계 처리, 회사의 영업비밀이나 특수 비밀을 준수한다는 내용의 비밀준수 약정, 퇴직 후 다른 회사로 전직할 경우 전직 조건 등에 관하여 회사와 합의했다.

세상은 돌고 도니까 언제 다시 만날 수도 있는데 감정적 앙금을 남기지 않고 작별하는 게 중요하다.

애인 대행 서비스

남부터미널역 6번 출구. 두 남녀가 약속한 시간 20분 전.

초가을 늦은 햇살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서쪽으로 지고 있다.

여자로부터 핸드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오고 계신가요? 6번 출구 앞 롯데리아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브라운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있어요. 지금 무슨 옷을 입고 계신가요? 혹시 안경을 쓰고 계신가요?”

그들 남녀는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이다. 피차간에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연락처도 모른다. 오직 스마트폰으로만 연락할 수 있다. 어차피 오늘 딱 반나절 동안만 빌린 요즘 한창 유행하는 렌털 여친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며칠 전 포털사이트 검색을 통해서 렌털 친구를 소개해 주는 전문 업체를 알게 되었다. 그 업체의 운영자는 이용 요금의 40퍼센트 선결제를 요구하며 원하는 여성의 연령대와 혹시 마음에 품고 있는 이상형이 있는지 물었다.

오늘 딱 세 시간 동안 빌린 이른바 렌털 여친. (렌터카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여자는 그 업체의 운영자가 요청해서 MSC의 역할대행팀이 보내준 여성이었다.

정확히 20분 뒤 거기서 그들은 처음으로 만났다. 초면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얼굴에 가볍게 미소를 띠며 그를 맞이했다.

역할대행팀에는 전화 문의가 자주 왔다. 그래서 젊고 아름다운 20대 말이나 30대 초반의 여성은 밤낮으로 데이트 일정이 잡혀 있었고, 심지어 주기적으로 만나는 단골 고객도 여러 명이 되었다.

일단 오후 6시였으므로 길 건너 이층에 있는 일식당으로 향했다. 거기서 남자는 나머지 60퍼센트 잔금을 계좌 이체했다. 송금이 끝나자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서로의 이름이 밝혀지는 순간이지만 그 이름이 실명인지 가명인지 알 수 없다.

여자가 먼저 말했다. “제 이름은 김혜선…… 그렇다고 해두죠.”

남자가 말했다. “저는 글쎄요…… 진짜 진중한이에요. 본명을 못 밝힐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런가요…… 호감이 가는 얼굴인데…… 여친이 없다는 게?”

“글쎄요…… 내 인생이 잔뜩 꼬인거죠. 기회가 있다면 차차 이야기할 수 있겠죠.”

“오해가 없도록…… 미리 말씀드려야겠네요. 오늘 만남은 일정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는거죠. 그 이상은 안돼요. 회사의 방침이거든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실망했네요. 남녀 간의 경계선이란 게 물감이 번지듯 흐릿한 게 아닐까요?”

그때 주방장의 그날 추천 메뉴인 특별한 모둠 스시가 나왔고 곧이어 아사히 생맥주 두 잔이 나왔다.

그쪽 세계도 경쟁이 심하므로 렌털 업체마다 다르지만 시간당 5만~20만원 수준이고, 세 시간 혹은 네 시간 이용이 보통이다. 물론 밥값, 커피값, 술값 등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별도 부담한다.

저녁 식사 후 교대역 근처 와인바로 자리를 옮겼다. 길을 걸을 때는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미리 그 운영자로부터 ‘스킨십은 불가능하다. 만약 여자 쪽에서 먼저 슬며시 요구하면 응해도 된다.’는 고지를 받았다. 일부 업체는 손을 잡기, 팔짱 끼기 등을 옵션으로 제공하지만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는다. 불필요하게 과도한 불쾌감을 줄 경우 곧장 서비스는 종료된다. (음흉한 목적으로 데이트 매칭을 신청하는 진상을 피하고 성을 상품화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인이라기보다는 말동무에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요즘 애인 대행 서비스의 인기는 확산하고 있다. 전문적으로 서비스하는 국내 업체는 10곳 넘게 늘었다. 서비스 지역이 서울과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곳곳 제주도까지 뻗어있다.

남자 쪽 의뢰인은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뿐만 아니라 회사원, 학교 선생님, 공무원, 군인 등 고객의 직업군은 다양하다. 30대 초반의 회사원은 말했다. “나는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에요. 회사에 다니지만 절친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렇다니까요. 여태 살면서 여자 친구와 영화관이건 음악회건 함께 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 로망을 실현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들 업체의 소식통에 의하면 고객의 성비는 남녀가 6대4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데이트 요청만 있는 건 아니다. 특히 여성 고객은 동성의 절친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밥 먹고 카페, 술집, 노래방, 영화관에 가는 평범한 데이트도 있고, 놀이공원이나 워터파크에 놀러가기도 하고, 음악회나 미술 전람회에 함께 가기도 한다.

21세기 대명천지 AI 시대에도 너무 외롭고 삶에 지친 사람들은 많다. 너무 홀로 외롭게 지내는 사람은 끝내 마음의 병이 생기는 법이다. 우리 모두의 고민은 우리가 고독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데서 생긴다.고 했지 않는가.

복잡한 세상에서 인간 관계의 단절은 더욱 더 심화됐지만 그걸 해소하려는 정서적 욕구 역시 여전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서비스가 아니면 데이트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래도 가장 단가가 높은 역할대행은 상간자 역할이다. 잘못하면 뺨을 얻어 맞거나 더 험한 꼴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가가 워낙 높다보니까 그런 알바 회사가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어서 인터넷 검색만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백 퍼센트 비밀 보장’이나 ‘10년 이상 경력과 전문 배우급 연기력’ 등을 내세운다.

A녀는 십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자녀가 두 명이나 되지만 전업 주부이다. 그 착한 남편이 바람을 피우다 걸렸다. 하지만 간통죄가 사라진 지금 고소를 할 수도 없고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거나 이혼 후 혼자 생계를 꾸려날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편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가 떠나버린다면…… 자신과 애들이 버려진다면……?

하지만 그녀는 질질 짜지 않는다. 매달리지 않는 대신 자신의 분노를 터트린다. 남편에게 대들고 악을 버럭버럭 썼다.

“내가 나가서 죽어버릴거야. 그러면 됐지……” “진정하라니까…… 잠깐 실수였어.” “실수였다고…… 그렇지……? 남자는 실수할 수 있지.” “그렇다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착한 당신은 잘못이 없어. 모두 그년 때문이야. 알겠어? 그렇게 정리하자고……” 남편은 울상을 지으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맹세하고 그 증거로 상간녀를 데리고 와서 아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게 했다. 아내는 너무 분한 나머지 컵에 든 물을 얼굴에 뿌리면서 “나쁜 년 같으니라고……!?”라고 욕을 했다. 상간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거듭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제 잘못이에요. 남편 분이 너무 잘생겨서 제가 처음 보는 순간 푹 빠져 버린 거에요. 여자의 본능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제가 온갖 아양을 떨면서 스토커처럼 달라붙은 거에요. 그러니까 저분은 눈곱 티끌만큼도 죄가 없어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뭐라고……? 진짜란 말이지……?” “맹세합니다. 진짜입니다.” “그럴 리가…… 옛날에는 그랬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지금은 배가 튀어나오고 머리는 반쯤 벗겨졌는데. 내가 가발을 쓰라고 그렇게 애원해도 귀찮다고 하면서……” “아니에요. 제 눈에 안경이라고 했어요.” “그렇긴 하네. 그런 줄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죄송…… 정말 죄송하다니까요.”

하지만 그 상간녀는 역할대행을 하는 가짜였다.

그 후에도 그 남자는 상간녀와 계속 밀회를 즐겼다. 다시는 들키지 않게 만반의 조치를 취하면서. 밀회란 한 번 맛을 들이면 마약 중독보다 더 지독한 것이다.

모든 사물, 모든 인물이 대체 가능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온갖 종류의 유명 인사들, 예컨대 연예인, 스포츠 선수, 정치인, 유튜버, 작가, 인플루언서나 셀럽 등등만 하더라도 발에 치일 정도로 넘쳐난다. 그런 인간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어느 순간 금방 사라진다. 매일 평생을 봐도 도저히 볼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작품인지 콘텐츠가 사이버 세상에 쏟아지고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대상이 사람이건 무엇이건 모든 게 아주 쉽게 대체할 수 있다. 도대체 대체 불가능한 게 있을까? 그러므로 애착심을 갖고 너무 깊게 사랑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금방 잊어버리고 기억조차 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역할을 대행하기에 딱 알맞은 시대에 살고있는 것이다.

지금은 만능키 역할을 하는 생성형 AI와 휴머노이드 로봇, 딥테크가 활개 치고 소셜미디어가 끊임없이 유해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대이다. 그것들이 너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어서 알고리즘 네트워크를 조작하거나 해커가 침입해서 신호를 조작하는 등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특히 AI가 퍼뜨리는 딥페이크 영상이나 특정인의 목소리를 복제한 딥보이스가 문제가 된다.

현실적인 위기가 코앞에 닥치고 있는 것이다. AI 생성물이나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서 심부름센터 업무이건 역할대행팀의 업무이건 잠식할게 틀림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강력한 원투펀치를 날리면 말이다.

최근 불황에 빠진 역할대행 업체 일부는 물불 가리지 않고 고약한 종류의 불법행위도 불사하고 있다. 그들이 암암리에 동원한 인물들은 마약류 구매자와 판매자, 경찰이나 변호사, 기자, 주식투자 전문가, 경영 컨설턴트, 벤처기업 사장, 연예기획사 상무, 심리상담사, 안락사 전문가, 약사, 의사, 유품 정리사, 경매 전문가, 개인 파산 전문가, 기업 회생 전문가, 사회복지사, 강남의 안과병원이나 성형외과의 환자를 유인하는 알선 브로커, (객석에서 고도화된 비밀 촬영 방식과 장비를 이용해서 공연을 몰래 촬영하는 행위인) 밀캠의 영상을 다수 보유한 판매자, 국회의원 비서, 정치인, 노조 간부, 부동산 중개인, 사진만 보내면 인공지능 (AI) 기술로 이를 합성해서 음란물을 제작해주는 서비스 업자, 무슨 일이든지 해결하는 해결사를 사칭하고, 또는 거만한 사람, 불평꾼, 동성애자, 외국인 교수, 목사, 전과범, 인간 혐오자, 사회 평론가 등의 몸짓과 언어를 능숙하게 연기한다.

강남의 대형 건물 화려한 사무실에서 투자금 유치 설명회를 하는데 옆에서 추임새를 넣으면서 바람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부유한 이미지의 연기자가 필요하다고 의뢰하면 역할대행팀은 검은 정장과 넥타이를 매고 부유한 티가 나며 금융거래 관련 대화를 청산유수처럼 할 수 있는 인물들을 골라서 보내준다. 그 경우 단가가 높아서 한 명당 50만~100만 원을 받는다.

그들 일행은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것처럼 했지만 은근히 다른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대화를 했다.

“요즘은 주식 투자야. 그렇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지. 예금 금리는 거의 제로야. 부동산 투기 그거 번거로워. 그리고 깜빡 속기 쉽지. 부동산 기획사…… 걔들 완전히 사기꾼이거든.”

“금융 쪽에 인센티브가 있단 말이지. 부동산 보다는…….”

“지금 밸류업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지. 안 그래? AI와 로봇 열풍도 불고 있고.”

“투자하는 건 좋은데 위험은 없을까?”

“그러니까…… 이 사람을 믿어도 되나? 긴가민가해서…….”

“오래 살려면 돈과 건강이야.”

“위험이 없는 투자는 없어. 리스크를 감당하지 않고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냐고? 투자에는 우선 순위가 있지. 지금은 주식 쪽이란 말이야. 주식 시장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니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

“여길 못 믿으면……? 투자의 귀재야. 아니야 천재라고 해야지. 시장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을 때 정확하게 맥을 짚을 줄 안단 말이지. 오죽했으면 너무 높은 수익률을 쉬쉬하면서 숨기고 있을까.

아무나 받지 않는단 말이야.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만 가입시킨다고. 통계적 수치는 필요 없어. 너무 어렵다니까.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단 말이야. 매니저는 천재야. 틀림없다니까.”

“기회는 항상 오는 게 아냐.”

일행 중 누군가 귓속말을 했다.

“저 친구 진짜 맞아……? 어쩐지 냄새가 난다니까.”

“알게 뭐야? 우린 대행이야.”

(그 사모펀드 매니저는 화려한 경력을 뻥튀기한 희대의 사기꾼이었고 수백억 원을 편취한 뒤 해외로 먹튀했다.)

파견 회사는 온갖 종류의 연기를 잘할 수 있는 배우 지망생, 얼굴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삼류급 배우, 인생이 일종의 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회사를 퇴직한 사람들, 인생을 은퇴한 사람들의 인재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국 단위로 아르바이트생을 확보하고 있다. 일류 배우 뺨치는 십여 명의 노련한 요원이나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프리랜서도 있다. 다양한 국적의 수십 명 외국인 남녀 아르바이트생도 확보하고 있다.

그는 진짜 목사 출신이다. 젊은 시절 개척교회를 설립해서 오랫동안 수익성이 좋은 알짜 기업처럼 키웠고 교회가 반석 위에 올라서자 60대 초반 완전히 은퇴하고 큰아들에게 담임 목사직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저 소일거리로 여행도 다니고 등산도 하지만 뭔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고 설교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모 특수기관 담당자가 어느 날 에덴 사무실로 찾아와서 의뢰했다.

모종의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남파된 거물 간첩을 체포해서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가를 제공하는 등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일 년이 넘게 온갖 설득과 회유를 해도 전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전향하기만 하면 대북 선전용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터였다.

그 가짜 목사님은 과거 남파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체포되어 전향한 다음 정착해서 호의호식하며 잘살고 있는 여러 건의 사례를 들먹이고 하느님의 이름과 성경 말씀으로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남파 간첩은 자기는 목숨을 걸고 공산주의 신념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전향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만남은 강남에 있는 평범하게 생긴 5층 건물의 3층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다. 헤어질 때 남파 간첩이 말했다. “목사님!? 진짜 목사님인가요? 하시는 말씀이 하나도 진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궤변이고 인민의 아편입니다. 목사님 말씀은 독약을 제 입속으로 쑤셔 넣는 짓입니다.”

이 파견 회사는 산하에 연극교실과 분장실을 갖추고 있다. (여기 연극 교실의 선생님은 바로 에덴파견회사의 조선행 사장님이다. 그는 삼류 배우 출신이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은 도저히 일류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연극 학교에서 연극 이론과 실기를 공부했다. 대학로에서 잠시 연극 감독을 한 후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연기 지도자는 실제 상황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말인데 진짜처럼 상황에 맞게 진실하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 흉내를 내거나 연극적 발성이나 몸동작, 기교는 금물이다. 그러면 의심을 산다.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경직되어서도 안 되고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한다. 말을 많이 해서도 안 된다. 대사를 완벽하게 암송해서도 안 된다. 대사가 가물가물하면 그것도 안 되지. 그건 연습이 불충분했다고 볼 수밖에 없어.

수줍음을 타서도 안 된다. 제멋대로 상황을 분석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도 안 된다. 실감나게 연기하고 싶은 유혹을 자제해야 한다. 능동적이어야 하고 자유스러워야 하고 본능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분위기가 어색하면 십중팔구 실패한다. 엉뚱한 농담을 여러 개 준비해서 그럴 때마다 골라서 사용하라. 연극은 유머가 필수 요소란 말이야. 웃겨! 실컷 웃기라니까!?

역할 대행은 결국 연극이야. 연극 중에서 가장 리얼한 연극이야. 인생도 한바탕 연극이라니까. 연극이라고…… 당신들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주연이 될 수도 있고…… 조연이 될 수도 있고…… 또는 단역으로 끝날 수도 있어.

그렇다면 죽음도 별거 아니야. 감각의 휴식일 뿐이지. 삶이 우아해야 하는 것처럼 죽음도 우아해야지.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은 배우야. 배우는 선택 받아야하는 직업이니까 기다림은 숙명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처음에는 조연을 맡았어. 내가 리허설 과정에서 엉망이니까 감독이 대본을 찢어 던지면서 노골적으로 화풀이를 하는 거야. ‘됐어! 됐다고!! 그만 하자고……’ 두 번째는 젊은 노인 역의 단역이었는데 내가 ‘하하하하하’ 하면서 유쾌하게 웃어야하는데 호흡이 짧으니까 ‘히히히히히’ 하면서 말 울음 소리가 나는 거야. 그래서 끝장이 난 거지. 연극 무대는 실연이니까 절대로 실수가 용납되지 않지.

실수하면 끝장이야. 역할 대행도 마찬가지야.

무엇보다도 필요한 관련 지식과 전문 용어를 습득해야 한다.”

분장실에는 온갖 종류의 복장과 필요한 소도구, 장비들이 갖춰있다. 전문 분장사는 현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 역할에 맞게 옷매무새를 갖췄는지를 점검하고 가볍게 분장을 해준다.

하지만 역할대행팀은 살인이나 폭행, 상해 등 범죄 청부업만은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한사코 사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 선과 절대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없다고 그 한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악인 감별사로 자처할 순 없다.

그들이 하는 업무 중에는 입사용 자기소개서를 대신 작성하는 일, 석박사 학위 논문을 대필하는 일, 주례를 설 사람을 선정하고 신랑 신부가 원하는 대로 신랑 신부의 학벌이나 가정환경을 뻥튀기하는 주례사를 작성해주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국회의원 총선을 출마하려는 고위직 관료 출신들에겐 출마 선언과 동시에 출판기념회를 연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서전이나 회고록 등 책을 출판하려고 하면 하루 이틀에 뚝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인생역정을 대충 엮어내는 그런 책이라고 해도 집필을 하고 편집을 하고 인쇄를 하려면 최소한 서너 달이 소요된다.

대필 작가 섭외는 대필작가협회나 선거 기획사, 출판사 등에서 소개를 받는 게 일반적이다. 대필 작가는 프리랜서 작가로 혼자서 은밀하게 작업을 한다. 현재 서울에는 10~20명의 A급 대필 작가가 활동 중이다. A급 대필작가의 경우 기본 원고료만 1,000만 원부터 시작하는데, 의뢰하는 정치인의 정치적 중량감이나 요구하는 책의 내용과 완성도에 따라서 5,000만 원까지 올라간다.

책의 내용은 거의 판박이로 비슷한 패턴을 띤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청장년 시절의 역경과 극복, 성공, 국가 사회와 지역발전을 위한 정치 투신의 계기를 개발새발 늘어놓는다. 당연히 과장과 미화, 생략 등이 포함된다. 과거 불미스러운 일이나 범죄 전력은 생략되거나 일거에 역전시켜 미화되고 자신의 이력이나 성공담은 과대포장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대필 작가는 비밀 유지 계약에 서명하도록 요구받는다.)

출판기념회가 목적이기 때문에 책 자체의 내용이나 테마는 거의 무시한다. 선거를 앞두고 뚝딱 만들어진 책이지만 출판기념회에선 불티나게 팔린다. (그 출판기념회가 성황리에 개최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수많은 참석자를 동원하는데 그때는 가짜 참석자들이 빈 봉투를 집어 넣는다.) 출판기념회 지나면 그 책은 증발한다.

역할대행팀은 일찍부터 자서전 대필이 돈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B급 대필작가를 고용해서 대충 그럭저럭 자서전을 써주고 거액의 돈을 청구했던 것이다.

이삿짐센터

MSC의 이삿짐센터와 야반도주 전담팀은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 수원지법 성남지원 건물 뒤쪽 3층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1층에 이삿짐센터가 있고 2층에 야반도주팀이 있고 3층에 특수청소팀이 있다. 건물 정문 입구에는 성남이삿짐센터라는 목재로 된 입간판이 걸려있다.

야반도주팀과 특수청소팀은 이삿짐센터 산하에 있다.

염공수 팀장은 원래 화성시 어느 구청의 청소과 소속으로 오랫동안 재활용품 수거 작업을 했다. 작업 반장까지 올라갔다. 고된 작업에 비하면 지나치게 박봉이어서 그 일에 지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대표이사의 전도 유망한 벤처기업으로 성장 산업이라는 유혹적인 말에 현혹되어 창설 멤버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퇴직금을 투자하여 주주가 되었다.

성남이삿짐센터의 실제 주된 업무는 밤중에 은밀히 야반도주를 하는 채무자의 이삿짐을 운반하는 일이다. 불법 대부업체들은 과도한 이자율을 적용한다. 그 수금 역할은 조직폭력배가 담당한다. 제때 돈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에게 온갖 협박을 하고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결국 견디다 못한 채무자들은 야반도주를 할 수밖에 없다.

그 악덕 사채업자는 구로구 오류동역 근처에 한 평짜리 유령 사무실을 열어 놓고 등록 번호도 없이 플랫폼 광고를 한다. ○○ 급전대출은 ‘전화 한 통이면 대출 OK’라고 선전한다. 상담원은 채무자의 이름과 나이, 직업, 재직 기간, 월급, 급여일, 기존 대출 유무, 그리고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물었다. 500만 원이 필요하다고 하자 그는 아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출 조건을 알려줬다. “500만 원 차용하면 30일 뒤에 900만원으로 갚으시면 됩니다.” 연이율로 따지면 973%였다. 연 20%인 법정 상한의 약 50배였다. 더욱이 기일에 변제하지 못하여 연체가 되면 위약벌로 이율은 배로 올라갔다. 그러니까 1,946%가 되는 것이다.

일단 야반도주 계약이 체결되면 일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다. 어두컴컴한 밤에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검은색 담요와 커튼을 들고 나타난다. 재빨리 창문을 가리고 이삿짐 포장이 이루어진다. 방수포로 완전하게 감싼 이삿짐을 실은 소형 트럭은 비밀 장소로 이동한다.

야반도주하는 날은 긴장이 철철 넘친다. 혹시나 대부업체의 폭력배들이 들이닥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고객들이나 직원들도 극도로 예민해진다.

특수청소팀

MSC의 특수청소팀은 총 다섯 명의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염공수 팀장과 세 명의 직원은 현장 업무를 담당하고 여자 직원 한 명은 사무실에서 고객 관리와 회계 업무를 처리한다. 직원들은 인터넷 구인광고를 통해서 입사했다.

하지만 특수청소업은 청소업이긴 해도 특수했기 때문에 도중에 여러 직원들이 퇴직했고 새로 신입들이 들어왔다. 회사는 성장하는 특수산업이라고 선전했고 기본급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각종 수당 역시 공사장 일용직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았기 때문에 지원자들은 처음에는 특수라는 마법적인 단어에 이끌렸던 것이다.

틀림없이 성장 산업이었다. 노인뿐만 아니라 청장년 층에서도 남녀를 불문하고 고독사가 증가하고 있고 자살 역시 유래가 없을만큼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의 동반사도 늘어나고 있다. 주인이 죽으면 십중팔구 반려동물도 죽어서 사체는 썩고 인간만큼이나 오염과 병원균 덩어리가 된다.

그들은 고객으로부터 특수청소를 의뢰받으면 먼저 직원 한 두명이 현장에 출동해서 현장 상황과 작업량, 난이도를 조사하고 나서 견적을 내고 의뢰인에게 금액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러한 업체들 역시 난립하고 있어서 경쟁이 심했으므로 무턱대고 높은 금액을 부를 수는 없다. 그들은 말한다. “인터넷에서 가격을 검색해보세요. 비교해 보시라니까요. 최저 금액이란 말입니다.”

이삿짐센터의 유선전화기가 울렸다.

염공수 팀장이 직접 전화를 받는다.

“성남 이삿짐센터입니다.”

“집 청소를 의뢰하고 싶은데요.”

“제가 먼저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단독 주택인가요? 아니면 아파트인가요?”

“성남동에 있는 단층 주택이죠.”

“집 크기는 어느 정도 되나요?”

“대지가 40평이고 집은 30평쯤 될 겁니다. 그 정도 크기면 비용은 얼마 정도……?”

“현장 상황에 따라서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지요. 집을 그냥 보기만 해서는 안되고 오염 상태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구역질을 견딜 수만 있다면 현장을 직접 청소해도 될 겁니다. 우선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쪽이 청소업 중에서도…… 특수청소가 전공이라고 하던데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최고의 업체이죠. 이미 인터넷에서 이쪽 사정에 대해 충분히 검색해보았을 텐데요.”

“어떤 젊은 여자에게 월세를 주었는데…… 보름 동안이나 연락이 안 돼서…… 사람이 죽었어요.”

“경찰이…… 경찰은 뭐라고 합니까?”

“경찰이 왔다 간 지 열흘이 지났어요. 자연사인지…… 고독사인지……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걸 아셔야 합니다. 죽은 시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젊은 사람인지 노인인지, 자살인지 고독사인지 타살인지 여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건 틀림없을 겁니다. 국과수에서도 그렇게 감정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반려 동물의 시체는 없었나요.”

“웬걸요…… 당초 임대차계약서에는 반려견은 키울 수 없도록 못을 박았는데 소용없더군요. 세 마리나 키운 것 같습니다. 개 시체가 3개나 나왔거든요.”

“어쨌거나 비밀 유지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소문나면 세를 주기로 어렵고 매매도 잘 안 됩니다.”

“좀 빨리 서둘러 주셔야겠습니다. 냄새가 밖으로 나가면 즉시 이상한 소문이 날 거 아닙니까. 경찰도 제가 손을 써서 밤에 몰래 왔다가 갔거든요.”

작업은 현장 상황에 따라 일의 순서와 작업 매뉴얼 또한 의뢰인의 요구 조건에 맞춰서 신속 정확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다만 의뢰인이 집주인인지 세입자의 부모나 지인인지 여부에 따라 요구 조건이 조금씩 달랐다. 세입자의 고독사나 자살, 기타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으로 널리 소문이 나면 귀신이 나온다거나 재수 없는 집이라고 해서 집값이 폭락할 수 있고, 다시 세입자 구하기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특수 청소는 이웃집도 모르게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한다. 작업자들은 이삿짐센터 사람이거나 보건소 직원처럼 보이도록 행동한다.

한 사람이 살다가 떠나간 흔적은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없다.

집안에 서려 있는 악취뿐만 아니라 악령까지 퇴치해야 한다.

현장에서는 희미하게 풍겨오는 슬픈 분위기를 감지한다.

특수청소팀이 하는 일이란 쓰레기로 가득 찬 집 안을 청소하거나 이사 후에 남겨진 폐기물의 처리, 혹은 집세를 안 내고 도망간 세입자가 남긴 폐기물의 처리, 화재 또는 범죄 현장의 청소, 악취 제거, 고인의 유품을 정리해서 유족에게 배송하는 일, 그리고 사람이 사망한 현장을 정리하고 소독하는 일을 담당한다.

특히 돌연사나 고독사한 경우 연고자가 없을 때 시체를 옮기고 사망 현장을 청소하는 일이 가장 주된 업무이다. 시체흔을 치우고 고인의 유품을 정리한다.

사건 현장에는 경찰 쪽 감식반이 먼저 와서 지문과 모발과 족적을 채취하고 다른 중요한 증거자료를 수집하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 시체는 부검하기 위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옮긴다. 경찰이 하는 일은 거기까지이다. 경찰이 쓰레기를 치워주거나 시체흔을 제거하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

사건 현장은 어김없이 악취가 너무 심하고 눈이 따갑다. 오래 방치된 미생물 쓰레기 속에는 세균이 숨어있고 쓰레기에는 파리떼나 쥐들이 들끓고 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체액은 감염병의 온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특수청소팀은 화학물질 대응 장갑인 아우터를 끼고 장화를 신고 공기호흡기나 방독 마스크를 쓰고 방호복을 입고 고글을 쓴다. 작업이 끝나면 방호복 등은 소각용 상자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소각한다. 그러므로 매번 일회용처럼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망한 현장을 정리하고 소독하는 일은 참으로 고달픈 작업이다. 사망한 지 일주일 이내에 발견했을 경우 비교적 시신의 훼손과 부패 정도가 적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일 처리는 쉬울 수도 있지만 만약 사람이 사망하고 한 달 이상 지나서 발견하거나, 온도가 높은 현장에서 발견되면 고역이 기다리고 있다. 고열로 인해 시신에서 발생하는 악취와 파리 및 구더기 등 해충의 대량 번식과 그에 따른 부패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망 현장에는 배설물이 굴러다니고 혈흔과 더불어 시체가 부패하며 생긴 사체흔과 흘러나온 체액이 바닥과 실내에 확산되어 있고 시신이 부패하면서 단백질이 산화되어 생기는 엄청난 악취가 난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풍기는 냄새는 달리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의 성별과 나이였다. 노인보다는 젊은 사람이, 여자보다는 남자 쪽이 지독한 부패 냄새가 더욱 심했다.

특수청소팀은 살충제를 사방팔방에 뿌려 파리와 구더기들을 퇴치하고 나서 탈취제로 지독한 냄새를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소독약을 뿌린다. 이 팀은 시중에 나오는 탈취제나 살충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효과가 더욱 빠르고 확실한 스스로 특수하게 혼합하여 제조한 제품을 사용한다.

사고 현장 내 병원균이 잔뜩 묻어있는 가구와 물건들을 폐기해야 하고 각종 쓰레기를 처리해야 하며 장판과 벽지를 뜯어내서 특수약품과 기계로 하루 종일 혹은 며칠 내내 살균과 탈취를 반복하고 나서 그 후 소독하고 원상회복까지 해야 한다.

그러므로 특수청소는 작업 자체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틀림없이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3D 직종이다. 현장 상황에 따라서는 아무리 직업이라고 해도 극심한 정신적 쇼크도 동반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인간의 추악한 면을 많이 보게 되는 직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열심히 청소해 주었더니 청소 비용을 깎자고 하거나 청소가 구석 구석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억지를 쓰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청소업체가 고인이 숨겨놓은 유산을 몰래 빼돌렸다고 의심하면서 유산이 어디 갔냐고 따지는 경우도 있다.

사회복지사

자살조력팀의 조성식 팀장과 직원 한 사람이 SUV를 타고 아침 일찍 고객을 면담하기 위해서 출발했다. 탐정팀에서 사전 조사한 기초 자료와 상세한 약도를 보내왔었다. 거기에는 망원 렌즈로 찍은 고객의 전신상과 얼굴 사진 수십 장도 들어있었다.

탐정팀은 고객의 신원과 과거 이력을 조사하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의료보험증, 신용카드 등 기초 자료는 물론이고 금융거래 실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고객의 주변에 가족이나 친인척, 친구, 이웃 등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세밀한 탐문 조사도 불가능했다.

역할대행팀의 여성 요원이 화천읍에서 나온 사회복지사인 것처럼 가장하고 나서, 가족 관계, 기초생활 수급자로 등록되기를 원하는지, 생활에 큰 불편은 없는지, 식사는 혼자 해결할 수 있는지, 전기는 잘 들어오는지, 우물 문은 안전한지 등 간단한 조사를 했고, 탐정팀의 사진사가 한참 떨어진 나무 뒤에서 초망원 렌즈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을 뿐이다.

사회복지사가 말했다.

“할아버지…… 가족은 어디에 있어요? 너무 쓸쓸해 보여요. 혼자 살면 안되죠. 제가 찾아봐 드릴까요?”

“그럴 필요 없소.” 그가 어떤 감정이나 동기가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면서 아주 단순하게 말했다. “날 내버려 두세요. 그게 절 위하는 길입니다.”

그래도 그녀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건강은 괜찮으세요? 고혈압이나 고지혈증이 있는 거 아니에요? 배변이나 배뇨 상태는 어때요? 종합 비타민이나 건강보조식품을 복용하고 있나요?”

그는 무슨 약점이 노출되지 않도록 공허하지만 어느 정도 절제된 얼굴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만……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니……”

“제가 보니까…… 괜찮을 리가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으시니까. 무릎이나 허리에 관절통이 있을 것 같은데요? 식사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나요?”

“아직 건강하니까 혼자서 충분히 해결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는단 말씀인가요?”

“그렇고 말고…… 복지사님과 내가 산타기 경주를 해볼까요. 상대가 안 될 겁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숲속에서 살면…… 정말 좋아요.”

“최근에 건강 검진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그런거 필요 없어요. 내 몸 상태를 스스로 잘 알아요.”

“국가에서 무료로 해주는데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는 아주 건강하고 혼자서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사회복지사는 자신의 명함을 내밀면서 사회복지사다운 말투로 차분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연세가 많이 드셨잖아요. 미리미리 챙기는 게 중요하지요.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그러면 제가 다시 오겠습니다. 차를 타고 오면 읍사무소에서 여기까지는 아주 가까워요. 아시겠죠?”

경춘 국도, 가을

그들이 탄 SUV는 본사를 출발하여 서울 춘천 간 옛날 경춘국도를 타고 춘천으로 가서, 거기서 느긋하게 이른 점심을 먹은 후 화천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운전은 주민호 과장이 했다. 그는 조 팀장이 가장 신임하는 조수이다. 대학원에서 범죄심리학을 전공했지만 경찰로 진입이 실패하자 일 년여 전에 MSC로 들어온 것이다.

조 팀장은 차가 출발하자마자 닳아빠진 낡은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뒷좌석에 나른하게 반쯤 누워있다.

그는 가끔 약간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눈에 띄는 화려한 넥타이를 매기도 하지만 오늘은 수수한 양복에 흰 와이셔츠 차림이다. 검은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매면 공식적이고 사무적이 되면서 분위기가 딱딱해져 대화는 겉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상대방은 나이 많은 늙은 고객이므로 그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대화는 소통이야. 그렇다니까…… 스토리텔링인 거지. 스토리라인이 막힘없이 쭉 뻗어나가야만 할 거야. 인터뷰어는 들을 줄 알아야 한다니까. 완벽한 답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질문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가 쌓아둔 높은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조수는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구리시를 지나면서부터 속력을 높이면서 시속 80킬로미터로 운전하기 시작했다.

조 팀장이 말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금요일……” “금요일이란 말이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가요?” “아니야. 그런게 아니야. 내가 궁금한 건……?” “무슨…… 말씀인가요?” “글세…… 나도 모르겠어. 혹시 말이야…… 다시 확인하고 싶은데?” “속 시원히 말씀하세요.” “왜? 여길 들어오게……?” “저도 잘 몰라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갈 데가 없었어요. 저도 낯짝이 있지…… 언제까지 집에서 빈둥빈둥할 수는 없었어요.” “경찰은……?” “거기 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명함도 못 내요. 미국에서 범죄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학위를 가진 사람이 지원하거든요.” “그랬던가? 내가 미국에서 학위를 따서 돌아왔지만…… 대학은 험한 곳이었어. 자기들의 완벽한 패밀리가 있더라고. 도대체…… 뚫고 들어갈 수가 없더라니까. 내가 혈혈단신 미국 L.A.로 건너가서 거의 10년 동안 온갖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그 결과물인 학위가 무용지물이더란 말이지.” “팀장님…… 피곤하실 텐데…… 한숨 푹 주무세요. 제가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아주 천천히 달리겠습니다. 강변 경치를 감상해야 하거든요. 가을 단풍이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느 시인이 ‘오매 단풍 들것네’ 했잖아요.” “아마 김영랑 시인일 거야……” “그런가요?” “대성리도 그렇고…… 가평도 그렇고. 아주 오래간만에…… 가을은 어쩐지 쓸쓸해.” “천고마비의 계절에는…… 골프가 딱 아닌가요?” “어쩐일인지…… 모르겠네. 골프는 질색이라네. 그건 놀이가 아니라 중노동이라고 해야 할 걸.” “그 노인 분하고 대화가 잘 진행될지 모르겠군요?” “글쎄말이야……” “요즘 세상에 구식 핸드폰은 물론이고 유선 전화기도 없어요. 시간 약속을 잡기가 불가능했단 말입니다. 그냥 찾아가서 만날 수 있으면…… 다행일 겁니다. 어쩌면 숨어버릴 수도 있어요.” “어쩔 수 없지…… 뭐.” “당연히 집은 상태가 엉망일 거에요. 틀림없이 술에 절어서 살았을 거고…… 아마 마약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영락없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거란 말입니다. 제정신이…… 헤롱헤롱하거나…… 아니면 삐딱하게 나올텐데…… 대화가 제대로 되겠어요?” “인내심이…… 필요할 거야.” “어쩐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왜 그래? 갑자기 감상주의에 빠져가지고…… 우리 업무는 반드시 냉정해야만 되는 거야.” “왠지 그래요?” “아니야…… 나 역시 왠지 마음이 무거워. 탐정팀의 보고서를 검토해보니까 그렇다니까……” “그 짧고 애매한 보고서 말씀인가요?”

그 짧은 보고서의 내용은 애매모호했다. 그 나이 많은 고객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탐문 조사를 해도 도대체 본인을 만날 수 없고 (역할대행팀의 가짜 사회복지사가 한 번 만난 게 유일했다), 주변에서 지인을 만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심리 부검이나 범죄 프로파일링에 의한 분석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의 위험 요인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 또는 모든 시간을 거의 혼자서 보낸다. 반사회적은 아니고 불가사의한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개성이라고는 없는 무미건조한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생활 속으로 누가 비집고 들어올까 두려워한다고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노인은 아직 신체 건강하고 (walkie-talkie) 정신적으로도 특별한 문제점은 없어보임. 유체이탈 (OBE)을 경험했거나 논리의 영역을 넘어섰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살의 동기를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없다고 했다.

적의조치 (適宜措置) 바람.

탐정팀은 최선을 다했는가? 적의조치 바란다고? 왜? 나에게 모든 걸 떠넘기는 거지?

탐정팀의 청구서는 금액이 결코 적지 않았다. 청구 금액은 투입 인원과 시간을 고려해서 산정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각들이 순서도 없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간은 흐리지 않은 채 정지된 것처럼 매우 길게 느껴졌다.

조 팀장은 생각했다. ‘나는 냉정하게 혹은 냉혹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본능으로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도 멈추고 자신의 참된 자아 다시 말하면 아름다운 영혼의 차원으로 내려가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겸손했던가?

자살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삶과 죽음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인생이 이 모양인데. 내가 왜 자살조력팀의 책임자가 되었을까?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여전히 심리 상담사로 행세한다. 명함에는 심리 상담사와 심리학 박사라고 박혀있다. 그러니까 내 진짜 직업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과 정서상 자살을 조력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무슨 괴물 취급을 하지 않겠는가?

내 인생에서 무지개의 일곱 빛깔이 떠올랐던 시절이 있었을까? 나의 인생 여정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어떤 시련의 관문들이 있었던가? 부산 시절 어느 날 갑자기 ‘내게 너무 낯선 나’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낯선 환경인 미국으로 떠났지 않은가? 그 여자는 왜 헌신짝처럼 버리고 내 곁을 떠났을까?

이별은 너무 급작스럽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아? 내가 울면서 매달릴 줄 알았던 거야? 만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친밀감을 표시하는 아주 젊고 예쁜 여자가 있지. 그녀가 지금 뭘 원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야. 아마 점차 노골적으로 접근할 거라고. 심리 상담을 받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야.

어쨌거나…… 자신에게 솔직하자고. 만약 그녀가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이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이지 않았는가. 그래서 대의명분이 필요했다. 우리에게 대의명분이 있는가? 그게 필요한 것인가?

항상 업무의 부담, 특히 마음의 부담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어떤 사람이 삶의 고통으로 힘들어할 때 내심 그 고통에 함께 아파하기 보다는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있지는 않았는가? 내가 느끼는 압박감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직업의 특성상 절대적으로 감정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불안 강박, 우울감에 시달린다.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위선을 버려야 한다. 고객의 첫인상이나 느낌으로부터 자신을 멀리 떼어내는 법을 내면화해야 한다. 직관이나 직감은 악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자신의 의도, 상상력을 억제해야 한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시신을 보고 싶지는 않다. 절대로…… 옛날 응급실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말이다. 여지껏 어떤 종류의 주검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건 특수청소팀의 소관이다.) 시체는 침묵한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쓰디쓴 슬픔을 느낄 줄 아니까…….

그때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한 사람의 생명을 끊기 위해서 최선의 조력을 해야 하니까 인간은 모순 덩어리이고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자살은 비겁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비이성적인 절망감이나 인간성의 나약함 때문에 자신의 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거니까 그 선택을 경멸해야 하지 않을까? 십계명은 ‘살인하지 마라’고 했는데 자살은 자기를 살해하는 행위 아닌가?

하지만 자살은 인간이 존엄성을 획득하는 유일한 길이고 자유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노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권리는 오직 창조주만이 갖는 게 아니다. 인간은 혼자서 세상에 나와 혼자서 떠난다고 했는데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숭고한 결정권을 갖고있는 게 아닐까. 이게 진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60대 중반인데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은 어머니가 생각난다. 대변을 쏟아내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굴욕감에 시달리며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그때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어머니는 가족의 보살핌에 기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과 마주하면서 사랑하는 가족이 오랫동안 겪게 될 불필요한 고통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때 가족이라고 해봤자 직계가족으로는 나 혼자였다. 외가쪽으로 연로하신 이모님 두 분이 전부였다.) 그래서 일찍 자신의 삶을 끝내려고 결심했다. 외아들인 나는 그때 어쩔 수 없이 무력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몹시 그리웠다.

어머니가 말했었다. “내가 죽으면 천국으로 갈 거야. 거기서 꿈에도 그리던 네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거지. 난 지금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어. 삼킬 수 있는 약을 가져오너라.”

자살의 이유, 동기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자살이 불가피하다면 자살의 방법을 알려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숭고한 자살을 돕는 일, 편안하게 임종하는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이 대의명분이 없었다면 회사에 입사하지도 않았을 거고…… 혹은 곧바로 퇴사했을 것이다.’

몹시 피곤했다. 이틀 밤을 연속해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몽롱한 상태였던 것이다. 출발하기 직전에 에스프레소를 넉 잔이나 연거푸 마셨지만 소용없었다.

어느새 조 팀장은 마구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가수면 상태에 빠져들었고 차는 가을 단풍으로 아름답게 치장한 북한강을 끼고 달리면서 강촌 유원지를 지나 의암호 둘레길을 통과해서 춘천 시내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구도심인 조양동 골목길 허름한 닭갈비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지글지글 끓는 닭볶음탕의 구수한 냄새는 목구멍을 자극해서 간절하게 술 생각이 났다. 조수가 말했다. “술 한잔해야…… 꼭 한 잔씩만…… 그렇지 않습니까?” “글쎄 말이야. 회사의 규칙은 업무 시간에는 술을 단 한 잔이라도 못 마시게 하니까 어쩔 수 없네.” “왜…… 회사가 술 먹는 것까지 간섭하죠?” “규칙은 규칙이야. 반드시 지켜야만 하지.” “너무하다니까요. 술 한잔 가지고…… 그런데 말입니다…… 두주불사하는 사장님하고 팀장님이 술 마시기 내기를 하면 누가……?” “엉뚱한 소릴…… 연극학교 선생님은 술이 약해. 폭탄주 한 잔만 마셔도 곯아 떨어지지. 연극쟁이가 그렇게 술이 약해서는 어떻게 연극을 할 수 있지? 의외로 술이 센건 특수청소팀 팀장이야. 엄청나지. 인생 경험도 풍부하고. 스트레가 많을 테니까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말이야…… 김재원이가 문제야. 그 나이에 MZ 세대처럼 군단 말이지. 저녁 술 모임에는 절대로 참석하지 않는 거야. 바로 집으로 퇴근한다니까. 가는 길에 헬스 클럽에 들려서 열심히 운동을 한다고 해. 정말 잘났어!? 우린 둘 다 비슷했어. 정통 폭탄주를 좋아하고. 하지만 나는 집에 가서 밤새 토했지.” “그 좋아하는 술을 딱 한 잔만 마시자는데 안된다는 거죠? 저는 음주운전의 대가에요. 떡이 되게 취해도 운전하는 건 문제가 없어요.”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언젠가 큰코다칠걸” “아니라니까요.” “다 이유가 있을 거야. 사람을 만나는 업무는 어려운 일이야. 맑은 정신으로 만나야 하는 거지. 술 냄새가 나면 끝장이야. 상대방의 신뢰를 잃게 된단 말이지.”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골목길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조 팀장은 그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세 잔이나 마셨다. 그래도 커피를 규제하는 회사의 규칙은 없었다. 그리고 출발했다.

파로호 破虜湖

약도에 나와 있는 고객의 집은 강원도 화천읍에서 화천대교를 건너 북한강을 따라 2차선 지방도로를 타고 북상하면 화천읍 풍산리 해산터널에 못 미쳐 수리봉 입구 울창한 숲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숲속 오솔길이었다. 그렇지만 전기가 들어오고 별채까지 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농가 주택이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줄지어 서 있는 붉고 노란 단풍나무들은 이제 아름다운 잎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색이 바랜 낙엽들이 길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다.

하늘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서 어두웠다.

지금 마음은 무겁고 불편하지만 감각을 자극하는 차가운 공기는 아주 신선하다. 그는 자신을 억누르면서 방해하는 장애물인 두려움에 맞서 떨쳐내야 한다. 진실을 캐내야 한다.

그 노인은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지고 얼굴에는 골이 깊은 주름살이 자글자글했지만 온화하고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뭔가 수수께끼 같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사실 얼굴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태연했다. 그에게서 뭔가 숨기려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허리는 꼿꼿해서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 나이에 비해서는 비교적 건강해 보였다.

“저희는 MSC에서 왔습니다.”

집주인인 현준호 고객이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늦가을이 되면서 산골은 너무 춥지요. 여기는 벌써 겨울이에요.

누추합니다만 집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작은 거실은 따뜻했다. 집안에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낡은 쇼파가 마주보고 있다. 그가 부엌 쪽에서 풍미가 강한 편이지만 단맛이나 신맛이 거의 없는 체다 치즈 몇 조각과 샴페인 한 병을 내왔다.

손님을 접대할 때 으레 나오는 커피는 없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침묵을 지켰다. 고객이 먼저 말했다.

“이거…… 죄송합니다. 산골짜기라……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샴페인이 어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모든 게 계약서에 적힌 대로 원만히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흔쾌히 마실 수도 있겠지요.”

조성식 팀장이 말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처음 만나자마자 으레껏 먼저 고향부터 물어본다오.”

“부산 기장이 고향입니다. 매일 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외아들로 태어났죠. 제 부친은 초대형 그물로 참치를 잡는 선망 어선의 선장이었죠. 바다에서 돌아가셨어요. 제 기억으로는 멋쟁이 마도로스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학교에 가지도 않고 며칠 동안이나 잠도 자지 않고 울면서 지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은 저에게 너무나 큰 상처였죠.

지금도 가끔 아버지 꿈을 꿉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구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바다를 철천지 원수로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몇 달씩 바다로 떠났을 때 얼마나 그리워하면서 무사히 귀환하기를 빌었을까요?”

“음……? 나는 육지 사람이요. 대구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살았다네. 초등학교 2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지. 그때는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곧바로 대구가 인민군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어. 우리 가족은 외가가 있는 청도 운문으로 몇 달간 피난을 갔었지. 그 고등학교가 대구에서 최고 명문이었다네. 한때 고교 야구 전성기 시절에는 야구로 유명했고. 일세를 풍미했던 영화배우도 거기 출신이야. 나보다는 몇 년 선배님이시지만…….”

“이런 일로 찾아뵙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이게 우리들의 직업이고 업무이지요. 우리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화두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겠지요. 아주 구체적이야 하죠. 그렇다고 소설을 쓰면 안되겠죠. 제가 귀찮은 질문을 드려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어떤 종류이건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 팀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 표정과 눈빛을 살짝 살펴보았지만 고객은 그렇게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우리 사이는 한 세대를 초월했으니까 부자 지간이 아니라 오히려 조부모와 손자 사이라고…… 비유할 수 있어요. 그러니 대화가 제대로 진행될지 의문이라네.”

“저희는 세대 차이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영업사원과 고객 사이의 업무적 대화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오? 잠깐만…… 너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귀사의 자살조력팀은 어떻게 된 거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암암리에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말이오.”

“지금…… 시대가 너무 변했어요. 자살이건 안락사건 수요가 급증하고 있지요. 안락사를 안사술이니 자비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우리나라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만 중단하는 소극적인 존엄사만 허용하고 있어요. 중환자가 약물 처방을 받아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조력 존엄사나 의사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환자에게 직접 약을 투약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모두 금지하고 있지요.

이건 국가가…… 다름 아닌 국가가 나서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법을 만들었어요. 어불성설입니다. 스위스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허용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건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수월하게 자살하는 방법이나 편안하게…… 존엄을 지키면서 죽는 방법을 알고자 하는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 빠르게 신사업을 발굴한 것이죠.”

“신규 사업이라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잘 아시겠지만…… 기업을 장기적으로 발전시켜나가려면 어떻게든 신규 사업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가요……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선생님의 편지에 의하면 자살의 의지는 확고한 걸로 보였습니다만……? 정말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그 시간의 끝이 죽음일 겁니다. 삶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불과하지요. 죽음을 피하려는 수많은 헛된 노력들이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하여간에 죽음을 회피하거나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요. 동정은 참을 수 없는 일이요. 계약서대로 해 주시오.”

“우리는 자살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냥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내 생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소.”

“선생님께서는…… 태어나는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가는 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요? 우리 인간은 모두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살아가면서 대체 가능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동의하실 줄 믿습니다.”

“나는 지금 지극히 건강합니다.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극한 상태이거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니란 말이오.

나는 안락사를 경멸하오. 그건 유치해요.”

“잘 아시겠지만…… 생명은 존귀해요.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되겠지요. 일시적 감정이 아닌가요?”

“생명이란게 복잡하고 섬세하고 교묘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 있을까?

아무튼 나는 모든 생명체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범신론적 유신론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말씀은……?”

“나는 지금 그렇게 한가한 게 아니요. 알겠소……? 언제든지 나도 모르는 새 죽을 수 있어요. 그러면 큰일 나요.”

“우리가 모르는 무슨 사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순전히 개인적 욕망 때문에…… 그럴 수 있나요? 혹은 즉흥적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를 낮게 잡고 있는 거 아닌가요? 오랜 시간을 두고 숙고를 했던가요? 그러고 나서 결론을 내린 건가요?”

“그게 아니라니까? 나는 확고해요.”

“지금 말입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게 있나요? 모든 걸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쓸데없는 일이요. 내 정신상태를 분석하겠다는 거 아닌가. 날 속일 수는 없어. 그러니까 진실을 알기 위해서 심리 게임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요. 그거 피곤한 일이요.”

“요즈음도 가끔 꿈을 꾸고 있나요? 꿈은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아니야…… 기억이 나지 않아. 불면증이 되면 꿈을 꿀 시간이 없단 말이야.”

“그래도…… 한 번 옛날 기억들을 떠올려 보세요. 어린 시절까지 소급해서 말입니다.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 아닌가요? 혹은 노스탤지어를 소환할 수도 있어요. 그게 일종의 정신적 질병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경우 감정적 상처가 오랜 기간 남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내 어린 시절은 잔혹한 전쟁기였어.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요.”

“말씀을 편하게 하세요. 그래야만 합니다. 물 흐르듯이 대화가 자연스러워져요. 나이 차이가 사십 년 가까이나 된단 말입니다.”

“……”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될까……? 기억이 한 번 밀려오면…… 그 기억을 집어들 수밖에 없다네. 그러면 무너질 수도 있어요. 내 안에 오랫동안 숨어 지내는 악마를 다시 깨우고 싶지는 않다네.”

“우리는 그 무너진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쓸데없는 일이라니까. 나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네. 내 이성이 작동해서 어느 정도 통제가 필요하지. 그럴만한 충분한 사연이 있으니까.”

“우리는 자살해야 할 납득할만한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편지에는…… 아주 간략하게 쓰셨어요.”

“아주 길고 긴 이야기를 해야만……. 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 작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네. 지금까지 내 스스로를 벽에 가두고 살았어. 상당히 긴 이야기가 될 거요…… 넋두리가 될 수도 있고…… 난감한 질문이니까.

심오한 메시지가 들어있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감동적이지도 않으면서…… 틀림없이 고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것인데…… 나는 그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정말 쑥스러워요.

아니야. 싫다니까. 고독이란 게 저마다 방식이 있는 것인데…… 이런저런 이유에 의해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할 수도 있어요. 당신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말씀드리자면…… 상당히…… 나는 최고의 명문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은행에 입행했소. 은행원 출신이란 거요. 은행 본점에서 영업부장도 했고 오사카 지점에서 3년간 근무하기도 했지. 은행을 퇴직하고 나서는 중견 기업에 재무 담당 상무로 근무하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직장을 떠나고 나니까 너무나 무료하고 앞날이 막막했단 말이야. 조급한 마음에 무언가 하지 않을 수 없었지.

퇴직이란게 갑자기 회장님의 말 한마디로 (“은행원 출신은 별수 없다니까……”) 쫓겨났을 때 예측이 어려워서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게 되었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거든. 수동적인 자세, 용기 부족, 나약함을 떨쳐낼 필요가 있었지. 비즈니스 세계에서 자기 사업을 하는 인간이 되고 싶었어. 방황과 심사숙고 끝에 무슨 펀드를 설립하려고 시도한 거라네.

그래서 은행원 출신이고 또 오사카 지점에서도 근무했기 때문에…… 오사카증권거래소의 옵션 상품에 관심을 갖고 모든 경우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검토했지. 죽을만큼 최선을 다해서 분석했지.

그러니까 돈 버는 길이 확실하게 보이더라고. 자신감도 생기고.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물론이고 친척들, 친구들, 기타 지인들까지 동원해서 막대한 투자 자금을 마련한 거야.

그때 내가 장담을 했었지. “틀림없다니까. 나를 믿으라고. 분석이 끝났다니까. 오사카 쪽은 내가 잘 알고 있다니까.”

그런데 옵션 상품의 지수가 어느 순간 계속 하락하자 증권사는 나와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내가 투자한 자산 전부를 강제처분 했어. 그걸 전문 용어로 반대매매라고 하지. 지수 변동에 따른 추가 손실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구실로 제멋대로 팔아버린 것이지.

하지만 강제로 청산한 순간 막대한 손실이 확정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어. 그대로 뒀다면 수익이 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 돌이켜보면 주책없이 과욕을 부린 거라네.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내가 지금 엄연히 살아있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느닷없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난폭한 일이 일어난다네.

막대한 손해를 본 피해자들을 볼 면목이 없었지. 그들이 아우성을 쳤으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단 말이야. 죽고 싶었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가치가 없는 인간은 죽어서 없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목숨은 끈질기니까.

나는 먼저 원칙주의자였고 그리고 완벽주의자였소.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파일에 정리하여 보관하고 메모하는 습관이 평생토록 몸에 배어 있단 말일세. 하지만 완벽주의…… 그건 망상이었어. 완벽은 추상에 불과하니까. 극한의 감정을 겪고 나서야…… 거기서 빠져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소.

그 무렵에는 나 자신을 향한 억제할 수 없는 분노가 끊임없이 들끓어 올라왔지. 점점 심연으로 빠져들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더라고…… 내게 너무 낯선 나가 되어버렸다니까. 그때 내 안에는 여러 인격체가 살고 있으면서 서로 격렬하게 싸웠어. 또 다른 나인 여러 명의 도플갱어들이 말이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뭐라고 하더라……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고 하더군.

피해자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고소파와 비고소파로 확연하게 분리되었지. 고소파는 결국 사기 횡령 배임 혐의로 나를 고소했어. 그게 막대한 손해가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긴 하지만…… 나는 법적으로 걸리는 것은 없어서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

하지만 도망 다닐 수밖에 없었어. 내가 아무리 핸드폰을 바꾸고 짙은 안경을 끼고 변장을 하고 낯선 지방 도시로 이사를 해서 숨어버렸지만 그걸로 해결될 수는 없었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까지도 어쩐지 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네. 나는 피해자들이 뒤를 몰래 밟으면서 감시하고 심지어 그들이 전과자를 고용해서 예리한 칼로 등과 목을 찔러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지. 어쩔 수 없이 피해망상에 걸린 거야.

그 지경이 되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일본으로 도망간 거요. 일본에서 영원히 사라지려고 작정했지. 오사카 지점에 근무할 당시 알게 된 재일교포 사업가를 통해서 취업 비자를 얻은 거지.

그때 아내는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 있던 서초동 아파트를 서둘러 팔고 나서 딸들이 있는 미국 LA로 도망치다시피 출국했어.

그 전에…… 사고가 터졌을 때 즉시 이혼을 요구하더군. 자신도 공범자이면서 시치미를 떼고 경멸하고 마구 비난했지.

너무나 비인간적이었지. 그래서 거절했단 말이야.

오사카에서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사는 가마가사키에서 3년 동안 살았어. 거기는 좁은 골목마다 쓰레기가 널려 있고 지린 냄새와 고약한 술 냄새가 진동하지. 뒷골목 여인숙의 이불과 요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방에 살면서 맨날 싸구려 식당에서 라멘만 먹었어.

거기에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몰리는 커다란 인력 시장이 있었으니까. 그 당시 건강했기 때문에 매일 공사판에 나가 일했어요. 일본말도 잘하고 생김새도 그렇고 옷차림도 일본 사람처럼 입고 다니면서 일본 사람이거나 재일교포 행세를 했거든.

잠시 가마가사키를 떠나서 오사카 외곽의 빈민촌인 일본의 불가족 천민들이 사는 동네에 가서 1년간 살기도 했어. 거기서는 잠시 젊은 여자와 동거했지. 그리고 나서 오사카를 떠난 거요. 갑자기 오사카가 신물이 났기 때문이야.

도쿄에서는 범죄자와 부랑자, 노숙자, 빈민들이 득실거리는 소굴이라고 할 수 있는 산야로 갔지. 거기는 도쿄의 게토이자 도시 속의 도시라고 할 수 있지. 거기에도 커다란 인력 시장이 있으니까 공사판에 가서 일을 할 수 있었어.

일본에 살 때는 항상 가방 속에 자살용 밧줄을 넣어 가지고 다녔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망명자의 신세로 객사할 수는 없었지.

그건 민족주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어. 내가 6년인가 7년쯤 지나서 돌아오니까 미국에 있던 아내가 변호사를 사서 실종선고를 청구했고 나는 실종기간이 만료된 때부터 사망자로 처리되었어.

잘 알고 있겠지만…… 실종선고는 사망으로 의제되기 때문에 결혼도 또한 실종기간이 만료하면 그때부터 해소된단 말이지.

다시 말하면 이혼과 똑같은 효과가 발생하는 거야. 얼마든지…… 법적인 걸림돌 없이 재혼이 가능하게 되지. 그러니까…… 그 여자는 그 무렵 새로 돈 많은 남자가 생긴 거라고 보아야겠지. 그 여자야말로 완벽주의자거든.”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추가적으로 귀국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 화천으로 올라오게 된 뒷이야기 등에 대해서 자세히 길게 말했다. 그는 봇물 터지듯이 모든 걸 털어놓고 나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들을 조금은 과장되게 말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커다란 위안을 얻은 게 분명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뺨을 타고 떨어졌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고객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다 이야기하고 나니까 홀가분하네. 이제부터 결론을 내려야지. 결론을 말이야……. 그때부터 나는 극심한 인간혐오증에 빠지게 되었소. 더욱더 자폐적이 되면서 완전히 인생을 자포자기했지.

세상을 등지고 살 수밖에…….

여태까지 주민등록증도 없고 의료보험증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고 신용카드도 없고 정부의 연금 혜택도 없어요.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요.

휴대 전화기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완전히 죽은 목숨이요.

유령이고 좀비라고 할 수 있소.”

“그래도…… 무난히 살았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나는 그때부터 여기에서 살고 있소. 십 년이 훨씬 넘었단 말이요. 추운 겨울날 견딘다는 것이 무척 힘들기는 하지만…… 그동안 사건 사고가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래서 심심하긴 했지.

불평불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네. 사정이 그렇다는 거야.”

그 말을 했을 때 다소 지친 기색이었다. 여전히 무언가 묵직한 짐을 마음속에 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선생님의 험난한 인생역정을 들으니까…… 마음이 숙연해지네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 인생…… 그거 별 거 아니야. 못들은 척 하게.”

“선생님은 지금 ‘나 같은 인간은 살아갈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

“어떻게…… 이 깊은 산골짜기에서…… 그렇게 홀로 사셨나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지. 이 세상과는 연결고리가 끊어졌다는 거지. 연결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인간관계가 깡그리 망가졌어. 바깥 세계와 완벽한 단절은 불가능했지만…… 다만 생필품은 화천읍 마트에 가서 구입했고…… 여기 텃밭에다 채소도 기르고 감자도 심으면서 거의 자급자족했지.

산에 가서 도토리를 줍거나 버섯을 채취하고 산삼을 찾아다녔지. 산새들과 바람과 풀잎과 나무들이 내 친구였지. 일본에서 알뜰하게 모은 돈을 가지고 그럭저럭 살 수 있었다고.

은행 거래를 할 수 없으니까 전부 현찰로 가지고 있으면서 곶감 빼먹듯이 빼먹으며 절약해서 살았지.

그게 말이지…… 내 삶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을 거야. 또는 배경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세상살이가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니까…… 그럭저럭 살 만하지 않습니까?”

“가을이 너무 좋다네. 천고마비의 계절에 솜뭉치 같은 구름이 하나하나 떨어진 상태로 태평스럽게 떠 있는 쌘구름을 볼 수도 있고 헝클어진 하얀 머리카락 다발을 길게 빗어 넘긴 것 같은 새털구름도 볼 수가 있지. 아늑하고 포근하면 가슴이 설레지. 그냥 그런 느낌이 너무 좋단 말이야. 어쩌다 밤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서 반짝이는 별들을 문득 발견하면 평온함을 느낀다네.

여름의 별자리인 궁수자리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가을의 별자리인 염소자리가 남쪽 하늘에 등장한다네.

나는 말이야 커피 맛에 무척 까다롭다네. 아마 커피 중독일 거야. 지독하게 쓴 걸 좋아한다네. 문뜩 떠오르지. ‘우선…… 커피 한잔을 해야겠어.’ 나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커피를 내릴 수 있다네.”

“선생님은 지금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저희는 그렇게 판단할 수 있어요. 극단적 선택이 올바른 일일까요?”

“나는 지난해 가을부터 ‘내가 진짜 죽고싶은 것일까’하고 자문자답을 했다네.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지.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말일세. 하지만 결론은 불가피했어.”

조 팀장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장 꺼내기 어려운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는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이 질문을 하면서 잠깐 멈칫거렸다. 오래전에 자신을 떠난 여자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긴 했던 것일까?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쉽게 홀연히 떠날 수 있었을까? 왜 하필 그때?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어떤 여자들은 헤어진 다음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선택이 정당했는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냉담하고 단호하게 떠났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뭘……?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나쁜 년…… 아무런 경고나 예고도 없이…… 군살이 없고 그렇다고 뼈밖에 남지 않은 것도 아닌 여자가 입술에 붉게 루주를 바르고 여행용 대형 가방을 끌고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던진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오해하지마. 절대적으로 섹스의 문제는 아냐. 당신의 벗은 몸에서 피 냄새인지 부패한 시체 냄새인지…… 그리고 당신의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유령인지…… 인간인지…… 그런 소리가 들린단 말이야. 웬일인지 그렇게 느낀다니까.

참을 만큼 참았다고…… 떠날 수밖에 없다니까. 영원히…… 우리 쿨하자고.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동의할 거야.”

내가 왜 죄의식을 느껴야 하지.

“부인과는 연락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부인에 대해서는 지금도 미련이 남아있는가요?”

“그 여자는 나를 먼저 버렸어. 그랬으니까 말이야…… 뭔지 모르지만 남아있을 턱이 없지. 우린 은행에서 만났어. 행내 결혼이었단 말이야. 나이 차이가 꽤 나지. 띠동갑이니까. 그때 어리고 때 묻지 않은 날씬한 몸매에 반해서…… 여자는 알 수 없다니까. 오십대에 접어들면서 폐경기가 되니까…… 그때부터 몸이 불기 시작하더니 목불인견이 되더라고. 신경질적이 되고 잔소리가 많아지고.

물론 이게 본론은 아니야. 내가 작업을 할 때 컴퓨터를 다루면서 모든 계산을 도맡아서 했어. 계산 능력이 탁월했지. 돈에 혈안이 돼서 아주 들떠 있었단 말이야. 다시 말하자면 적극적인 조력자였단 말이지.

그런데 사건이 터지자 발뺌을 하고 이혼을 요구하고 그러고 나서 재빨리 아파트를 처분하고 미국으로 줄행랑을 한 거야. 참으로 약삭빨랐지. 머리 회전이 정말 기가 막혔단 말이야.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법적으로 매장시켜 버린거야. 나는 그때 사망한 거지.

결론을 내리자면…… 그 여자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네. 돈을 너무 사랑했어. 어쨌거나 상처 하나 없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미국으로 갔지.

지금도 자주는 아니고 가끔 악몽을 꾸는데 어김없이 그 여자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아니면 아주 슬픈 얼굴로 느닷없이 나타나지.

나는 그럴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긴장했지. 무슨 폭탄 선언이 터질 것만 같았거든. 그렇지 않나? 폭탄 선언이? 지칠 줄 모르고 나타나는 사나운 꿈속에서는 말일세. 꿈은 불길한 모험이야. 꿈이 현실과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불가촉 천민 출신 여자 말이야.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네. 그건 예의가 아니지. 그녀가 매번 똑같이 말하지. “왜? 한 마디 말도 없이 도망갔나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는데…… 내 꿈을 앗아가 버렸단 말이에요. 깊은 바다로 들어가서 죽어버릴 거에요.”

그때마다 나는 아무리 궁리를 해도 무슨 할 말이 없어서 먼 산만 바라보다가 꿈에서 깨어났어. 그 꿈들은 아주 고약했어. 그게 가끔 변주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는 꿈에서 깨면 식은땀을 흘렸어.”

“딸들이 보고 싶지 않나요?”

“왜……? 딸 이야기가 나오지?”

“딸은 여자가 아니라 자식인데요?”

“그게 아니야…… 걔들 다 컸고 자기 길을 가고 있을 거야. 걔들과 나는 세대가 다르지. 걔들에게는 걔들의 인생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인생이 있다네. 하지만 참으로 세월이 빠르지. 시간은 흐르고 소용돌이치고 두서없이 진행된다네.”

“반려 동물은 키우지 않으셨나요?”

“그걸 키우면 내 손으로 처치하고 떠나야 하니까…….”

“다시 한 번 뒤돌아보세요. 행복한 시절이 있었던건가요?”

“행복이…… 무어란 말인가? 행복 그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거야. 당신들은 여전히 그 유치한 단어들을 쓰고 있구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선생님도 한 사람의 인간인데 그 극단적 고립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마음을 닫고 타인을 철저히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 역시 거부해야만 그 상황을 겨우 견딜 수 있다고 했습니다만……”

“이런 고립된 상황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그게 정말 소중한 것인지를…… 늘 고민했다고 할 수 있지. 분명히 나에게도 자기만의 의미가 있는 소중한 것이 있었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잃어버린 것인지…… 잊어버린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그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소. 기억과는 관계 없는거요. 인간은 혼자서 세상에 나와 혼자서 떠난다고 했지만 고독은 정말 무서운 거요. 고독하면 틀림없이 불안 강박에 시달리고 동시에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지. 그 지독한 불면증 말이요.

나는 그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서 처음에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소. 알코올 의존증까지는 갔지만 알코올 중독이 되지 않도록 절제를 했소. 그렇지만 술로는 해결될 수 없었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약에 손댔지만…… 그거 신비로운 거야. 마음이 편해지고 걱정거리는 훌훌 다 날아가 버린다고. 고요하면서도 평화스러워. 모든 게 아름답고 순수하게 보이지. 하지만…… 그걸 하면 아주 잠깐 동안 천국의 환각에 빠질 수 있었는데…… 그다음에는 어김없이 지옥의 환멸이 따라왔어. 금단 현상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빠져나왔지. 내가 거기서 완전히 벗어났다니까.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마약을 끊을 수 있게 된 거야. 그런 유혹을 억제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네.”

“정말…… 훌륭하십니다. 그 강렬한 의지에 찬사를 보냅니다.”

“인간에게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원초적 욕구가 있지. 담배, 술, 마약, 섹스가 그렇단 말이지. 지금 나에게는 그런 욕구가 도대체 일어나지 않는다니까. 그런 거 없이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가 있는 거야.

그러니까 결론이 난 거야. 마침내 고독과 절망과 치열하게 싸울 것이 아니라 함께 오순도순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소.”

“선생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요?”

“내 정체성이랄까 주체성을 말하는 건가? 지금까지……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도 알 수 없어요. 결론을 내리자면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누군들 스트레스가 없고 트라우마가 없겠습니까?

트라우마로 인한 상처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곳곳에 만연해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것과는 도대체 비교할 수가 없겠지만……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요. 지금쯤 잊혀질 수도 있고 혹은 어느 정도 치유됐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옵션 상품에 투자한 건 말입니다. 선생님은 어떤 나쁜 의도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일을 추진했는데 어쩔 수 없이 결과가 나쁜 경우가 아닌가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중과부적이었단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시효란 게 있지 않습니까. 법률이 규정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진즉 시효가 끝났단 말입니다.”

“그건 아니야…… 아니라니까. 인간으로서 죽고 싶도록 수치심을 느꼈다니까.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원래 사소한 것이라도 아쉬운 소리 하기를 극도로 싫어했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기이하고 더 기이하다고 합니다. 구제 불능으로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선생님의 관점이 있을텐데요?”

“아니야…… 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네.”

“지금 살고 계시는 환경이 반드시 비정상적이거나 부자연스럽다고 볼 수는 없는데요. 집안과 주변을 아주 깨끗하게 관리하고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집안이 엉망진창이고 청소를 안 한 지는 10년도 넘는 경우가 흔하거든요.

우리가 보기에 선생님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활기차고 건강해 보입니다. 오래오래 살고 싶지 않으세요?”

“내가 현재 노망기가 든 것은 아니지만…… 그건 엉뚱한 소리요. 동의할 수 없어요. 뭘 잘못 보거나 잘못 판단한 거야. 나는 더 이상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아. 자네들은 회사의 영원 사원이야. 영업 사원에게는 시간이 돈이야.”

그들은 고객이 하고 싶은 말들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밤을 꼬박 새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객은 어서 빨리 결론을 내리려고 조바심을 치고 있었다. 진실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혐오했고 세상의 소리는 불편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조 팀장은 내심 복받쳐 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수치스러움과 소외감을, 자기 정당화를 억제하고 자신을 진정시키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냉소적인 생각은 진즉 사라졌다. 그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그가 내뱉는 질문들은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한 자기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고객이 절절하게 진심으로 하는 대답은 그 자신이 간절하게 듣고 싶은 것이었다. 인간적 연민을 느꼈지만 동정해서는 안 되었다. 연민과 동정은 다르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도 언젠가는 결국 자기 살해를 결심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조성식 팀장이 말했다.

“지금까지 그 모든 고통을 참아내고 잘 살아왔는데…… 자기를 살해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희는 곧바로 후회하거나 번복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지금이라도 번복하시면 아무런 조건 없이 바로 철수하겠습니다. 이건 회사의 엄연한 규칙입니다.”

“나는 스스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소. 그건 편안한 휴식이기 때문이요. 혹은 영원한 깊은 잠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나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끝까지 살아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맛보면서 살아야 한다. 나에게 죽음은 불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참으로 비겁한 일이다. 나는 지극한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할 자격이 없다. 이렇게 결심했단 말이요.”

“과거에…… 옛날 과거이건 가까운 과거이건 상관없이…… 자살의 유혹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요?”

“한동안…… 끊임없이 자기 살해를 고민했었지. 하지만 자살이란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어. 오사카의 이삿짐센터에서 일할 때 12층 고층 건물 테라스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순간 암흑 같은 심연에 홀리는 것처럼 유혹을 느꼈지. 그때 막 뛰어내리려던 찰나에 동료가 나타나서 정신을 차렸다네.”

“그럴까요? 그런데 왜……? 혹시 계절 탓이 아닐까요? 불가사의한 감정인 계절성 멜랑콜리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지금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아주 쓸쓸한 가을이에요.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새삼스럽게 세월이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도 있고…… 인간 존재의 필멸성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고 있지. 지금은 지극히 정상이야. 지병도 없고 암 같은 불치의 병에 걸리지도 않았지. 하지만 이대로 가면 일 년이나 이 년이 지나서……… 아니면 더 오래 살면서 자연스럽게 고독사하게 될 거야. 그래서는 절대적으로 안 되는 거야.

나는 혼자서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네. 굶어서 죽을 수도 있고……목을 맬 수도 있고…… 연탄을 피워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을 수도 있고…… 수면제 과용…… 일본 사무라이처럼 할복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거 성가신 일이야. 편안하고 품위 있게 죽고 싶네.”

“그렇단 말씀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나는 이미 사망했단 말이요. 내가 두 번이나 죽을 수는 없단 말이지. 그렇기 때문에 티끌만큼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서는 안 되겠지. 나의 경우 시체는 결국 쓰레기에 불과해. 내가 쓰레기를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니까. 나는 완벽하게 사라지고 싶소.”

“쓰레기라는 말씀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요?”

“내가 그런 식으로 죽게 되면 경찰이 달려올 거야. 내 추한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사진으로 찍고 증거물을 찾는다고 온 집안을 헤집겠지. 이것저것 뭘 채취하면서 기록하고. 국과수에서 부검을 하고 DNA 검사를 하면 내 가족 관계, 은행 근무 경력, 그 사건 기록이 들춰지면서 내 정체가 완벽하게 탄로 날 거란 말이지. 그건 내가 절대로 바라는 바가 아니야.”

“무슨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의식이 멀쩡해서 내 의지가 살아있을 때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네. 내가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말이요.

나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네.

그게 바로 존엄하게 죽는 거요. 우리 삶이 존엄하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해야 할거요. 내가 화장터에서 재로 변한 다음 그 재는 파로호의 강물에 날려 보내야 할 것이야. 거기가 최북단에 위치한 호수이거든. 6.25 전쟁 당시 파로호 전투 때 수만 명의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시체가 수장된 곳이라네.

그래서 말인데…… 꼭 부탁하고 싶은데…… 집안에는 내 DNA의 흔적이 남아서는 안 되는 거요. 별채에 꽉 찬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물건들까지 완벽하게 처리해 주게나.

내가 살려고 몸부림치며 매일 기록한 수십 권의 진녹색 가계부와 일기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검은색 탁상 메모 수첩은 며칠 전에 불에 태워버렸다네.”

일터이자 생활 공간인 별채에는 낡은 믹서기부터 선풍기, 청소기, 냉장고, 여러 자루의 크고 작은 괭이나 삽, 낫, 호미 같은 농기구 등이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페트병들, 쓰레기 봉투들, 잡목 목재, 땔감 나무, 말린 풀, 마른 도토리나 밤알, 포대에 들어있는 쌀이나 밀가루들, 수십 켤레의 해진 신발들이 여기저기 잔뜩 쌓여 있다. 집안 곳곳에도 십 년 넘게 묵은 아무런 쓸모도 없고 먼지만 쌓여 있는 수백 권의 책들과 오래된 신문 뭉치, 수십 점의 모조품 추상화 그림, 종이 가방이나 상자들과 같은 잡동사니들이 가지런히 가득 쌓여 있다.

그 고독한 노인은 ‘절대 낭비하지 않겠다’ 또는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완벽주의자는 아니었다. 멀쩡한 물건을 버렸을 때 낭비했다는 생각에 빠지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이 물건들은 언젠간 꼭 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단 보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추억이자 동반자였다. 그는 범신론자처럼 그런 물건 모두를 생명이 있는 것으로 의인화해서 존중했다. 그는 물건들에게 “널 오래 사용했는데…… 버리려고 하니까 도저히 안 되겠어. 미안하다니까.” 혹은 “넌 생명이 있는 존재야. 쓰레기 폐기장으로 가서 불태워진다면…… 그러면 안 되겠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특별히 소중한 추억이 깃들거나 귀중한 물건이 아니어도 자기 분신과 같아서 버리기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무엇인가를 후회하고 있나요?”

그는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을 풀고 약간 살짝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역시 후회하고 뉘우치는 나약한 인간임을 시인하는 체념의 미소 같았다.

“내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네. 후회도 두려움도 전혀 느끼지 않는 그런 마지막 순간을 덤덤하게 기다렸지만. 인생인지 일생인지 그거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네. 결국 인간은 무가 되지 않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어.”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날 어떻게 죽일 것인지 그 방법을 설명해 보시오.”

자살조력팀의 직원이 설명했다.

“저희가 드리는 이 약물은 특수 제작한 것입니다. 멜라토닌 성분과 전신 마취용 케타민, 초고농도 마약성 진통제 등이 혼합되어 있지요. 이 약을 먹으면 먼저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 영혼을 죽이기 위해 일종의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는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꿈결처럼 어린 시절, 아내, 딸들, 그리운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또는 빠르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꿈과 악몽을 꿀 수도 있고 천국과 지옥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후에 몸이 마비되면서 심장이 정지되는 겁니다.”

“정말 그렇단 말이지……? 그거 죽음의 과학이 아니라 죽음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네. 정말 환상적이군.”

“그럴까요?”

“그러면……? 그 약물을 주사로……”

“아닙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이 약물을 드리면 우리가 떠난 후에 스스로 삼키십시오. 그래야만 됩니다. 자살조력의 경우 위험부담이 크지요. 현행법상 결국은 자살방조죄가 성립될 수밖에 없습니다만.

자칫 잘못하여 재수 없게 걸리면 살인죄가 성립되거나 위력자살결의죄 또는 위력자살결의방조죄가 성립될 수도 있습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요. 그런 건 피하고 싶습니다.”

고객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계산을 정확하게 해야 할 텐데……. 내가 얼마를 드려야 하죠?”

그 직원이 말했다.

“고객께서 가지고 있는 돈 전부를 지불해야 할 겁니다. 고객이 죽으면 더 이상 돈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돈 액수가 적은 경우에도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지요. 가지고 있는 돈 전부를 그냥 주시면 됩니다.”

“합의가 성립…… 되었구먼. 우리가 샴페인을 마셔야…….”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샴페인 잔을 들고 부딪쳤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생각에 잠겼다. 침묵의 중압감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황혼역 어둠이 찾아왔고 하얀 순수한 눈송이가 차가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늙은 고객의 아련한 시선이 문득 창밖으로 향했다. 소나무들이 찬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갑자기 과거의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떠나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농가주택을 새삼스럽게 다시 돌아봤다.

고객의 시체는 딱딱한 몽둥이처럼 굳어 있었다. 거실 바닥에 반듯하게 누워있다. 그의 입술에는 엷은 미소가 어려 있다. 그 신비한 약물이 그의 고통을 멈추어주고 천국으로 안내한 것이다.

무슨 엄숙한 장례식은 없었다.

그다음 날 새벽녘 특수청소팀이 와서 시체를 공사장용 마대에 담아 가지고 가서 화장장에서 소각했고 그 재를 고객의 요청에 따라 파로호 강물에 뿌렸다. 그가 말했었다. “그 호수는 오랫동안 내 마음의 근원이었어. 그래서 너무 사랑한다네. 가끔은 푸른 물이 반사하면서 나를 유혹했어. 호수의 혼이 내 몸을 꼬아 휘감고 끌고 들어갈 것만 같았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나는 거기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걸세. 나를 품어서 안아줄 거니까.” 그리고 오후에는 모든 물건을 쓰레기 소각장으로 옮겨 불태운 다음 그 집에는 DNA가 안 남도록 깨끗이 청소하고 특수 약품을 뿌렸다. 다음날 다시 이사를 간 후 버려진 폐가처럼 보이도록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물건을 집안 여기저기에 흩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