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자작나무의 정체 外 1편/ 나정욱:시인뉴스 포엠 (poetnews.kr)]
자작나무의 정체
북쪽 추운 지방에서 군락으로 자라는 저것을
남쪽 여기에서 본 것은 진실일까
자작나무를 자작나무라 할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나는 살고 있다
백양나무를 자작나무라 부른 것은 아닐까
자작나무를 백양나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러보면 저 나무가 흔들릴까
자작나무야 자작나무야 태워야만 자작자작
제 이름을 태우면서 재로 스러지는 자작나무야
내 애인의 이름처럼 애틋한 나무야
나는 너를 모른다 숲에 들어가면 나무들은
일제히 제 이름을 잎으로 달고 흔들린다
나무들이 제 잎을 흔들어 이름을 외치지만
나는 나무의 귀를 달고 있지 않아 숲에서
길을 잃는다 나는 나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나무는 나무의 언어로 내 이름을 부르지만
바람 소리로 웅웅댈 뿐 서로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작나무숲에서 나는 하얗게 죽는다
시래기국
한겨울 아침에 시래기국을 먹는다
시래기국을 먹으면서 생각해 본다
토끼도 아니면서
망아지도 아니면서
토끼처럼
망아지처럼
시래기를 오래오래 씹으면서 생각한다
토끼처럼 망아지처럼 유순한 눈빛을 지키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가슴 속으로 떨어지는 그것들의 큰 눈망울을 생각하며
시래기국을 먹는다
내일을 동지로 앞두고 시래기국을 삼키며
흰돌을 자신의 필명으로 가졌던
망아지처럼 키가 컸고 토끼처럼 유순한 눈을 가진
그이의 시를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고쳐잡지 않고 시를 써서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
호구를 해결하는 그 더운 입들을 생각한다
그 더운 입들에 딸린 더 작은 입들의
간절함에 자신의 이름을 팔고 살아가는 그들의
신춘을 생각하며
아직은
한겨울 아침에 시래기국을 오래오래 씹어
삼키는 것이다
※ 나정욱
1990년 <한민족문학> 창간호에 「실습 시간」 외 2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며칠 전에 써 두었던 내 문장에서 힘을 얻는다』
『눈물 너머에 시(詩)의 바다가 있다』
『라푼젤 젤리점에서의 아내와의 대화』를 출간함.
한국작가회의, 울산작가회의 회원.
회원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