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나날을 조이는 삶의 그물을/ 날렵하게 빠져 나오는 새벽마다/ 어머니 발걸음은 생선 지느러미보다 활기차다/ 한 꾸러미 옭아매던 근심들이 달아난다/ 짠내와 비린내가 어머니의 속 깊은 물결에 밀려난다// 아직 기울지 않고 조각달 희미하게 떠 있는/ 읍내로 나가는 길목/ 해산물 냄새 퍼트리며// 소리없이 밝은 아침이 되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새벽] 부분

어릴 적 노닐던 파도의 속살거림/ 패기로 파도를 사랑한 근육과 의지의 단단함/ 험난한 삶의 파편마저 넘나들던 유연함/ 그 뜨거움까지 희미해져/ 빛을 잃은 태양처럼 희미해져// 석양에 갈매기 끼룩끼룩/ 하얗게 나비 떼 같이 흐르는 듯 나는 듯// 하얗게 빛바랜 모습으로 서 계신/ 아버지
---- [아버지의 새벽에 바치는 노래] 부분

아버지의 시간을 이해하는 것은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사라지는 것들은 무용하다. 그 무용함 때문에 존재들은 잊혀지고 사라져 간다. 아버지의 시간들은 바로 이것을 말해준다. 유용함을 만들지 못하면 부성은 의미를 상실한다. 그것이 밥이 됐든 권력이 됐든 모든 아버지는 그 유용함을 만들고 그 유용함의 한계 내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잊혀 진 존재가 된다. 그를 부활시키는 것은 결국 그 존재의 시간들을 기억해내려는 사랑의 힘이다. 권순자 시인이 아버지와 또 다른 아버지들의 삶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황정산 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본래 아름다운 성정을 가지고 있는 권순자 시인은 고향인 어촌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주변부 인물의 삶을 시로 구성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대상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성정이 결곡하게 드러나는 이 시집을 읽어가다 보면 “빨래 줄에 희망 몇 벌 널어 말리시던/ 어머니의 그 하얀 손등”(「목련」)이라든가 “딸 아이 하나를 목발 삼아 짚고서”(「공원의 낙타」), 그리고 “그의 몸이 맑게 개어 다시 깰 때를 기다려”(「구절초」) 등의 빛나는 문장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시의 존재 의의도 이런 구절을 쓰고 읽는 기쁨에 있을 것이다.---공광규 시인

작가 소개

시인 권순자는 1958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경북대 영어학과와 국민대 교육대학원 영어학과를 졸업했으며, 2003년 『심상』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우목횟집}에 이어서 두 번째 시집인 {검은 늪}의 시적 주제는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권순자 시인은 [어머니의 새벽]이나 [아버지의 새벽에 바치는 노래]에서처럼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그것을 과장하거나 신화화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점점 사라져 가는 사랑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고투를 보여주면서, 그 사랑의 흔적은 찾아 다시 새겨 놓으려 한다. 권순자 시인은 그 사랑의 흔적을 자신의 육신의 기억으로 남기고자 하며, 그런 의미에서 {검은 늪}의 시들은 모두 사랑의 문신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