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책 소개>

『귀천의 길목』은 이재욱의 첫 소설집이다. 이재욱은 이미 고교시절 한 지방신문의 신춘문예 학생부에 소설이 당선될 정도로 문학에 열정적이었다. 타고난 이야기꾼의 기질을 오랫동안 삭히고 있던 그가 최근 작품 활동을 시작, 왕성한 창작의 결과로 첫 창작집을 묶게 되었다. ‘귀천의 길목’ 에는 표제작‘귀천의 길목’ 을 비롯하여 ‘절골의 설화’‘절름발이 사랑’‘두 어머니’‘일리갈 베이비 코피노’ ‘고니와의 해후’‘브라보, 레니’‘학창시절의 추억’ 등 8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귀천의 길목은 점차 고령화되어가는 우리 사회에 노인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 주고 있다. 마누라를 먼저 하늘로 보내고 시골의 외딴 집에서 홀로 살아가던 김 노인은, 노환이 깊어지자 며느리의 수발에 거동을 의탁하기 위해 서울의 아들네 집으로 들어간다. 며느리에게 아랫도리를 내보이는 것은 물론, 오락가락하는 정신까지도 맡길 수밖에 없는 형편으로 귀천 길목을 서성거리는 김 노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아들 내외와 손자의 이야기가, 가족애의 상실로 온기를 잃어가는 우리 사회에 따뜻한 불씨를 던져준다.

「두 어머니」역시「귀천의 길목」의 연장선상에 있다. 생모가 죽자 아들은 홀로 된 아버지를 위해 새어머니를 모셔온다. 그러나 그날 이후 집안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술주정꾼인 새어머니가 항상 말썽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오히려 혼자 사는 것보다 더 힘들게 되고, 심지어는 새어머니마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다시금 아내의 장례를 치르는 아버지와 그것을 지켜보는 아들의 시선은, 마치 숙명적 인연이기라도 한 듯 시종 따뜻하기만 하다.

이렇듯 이재욱 소설의 제재나 배경은 한국적 일상의 범위를 묵묵히 고수하고 있다. 우리네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정을 배경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죽음의 문제를 제재로 삼아, 새삼 엷어져가는 휴머니즘을 부각시키고 있다. 인생의 문제를, 고백하듯 솔직하고 섬세한 관찰로 직조해 내는 천부적 작가의 소질과 함께, 소도구를 활용한 특이한 기법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며, 삶의 여러 문제와 더불어 죽음까지도 축복으로 받아들이려는 작가의 철학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책 리뷰>

삶에 대한 따스한 성찰과 그 우직한 진실성- 이재욱 소설집 <귀천의 길목>

이재욱의 이번 소설집은 자잘한 일상들이 주 배경이며 등장인물들도 우리 주위에서 언제라도 마주칠 듯한, 말하자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장삼이사들의 이야기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늘 그렇듯이 눅진하며 피곤하고, 때론 끈적거리며, 또 때론 잡스럽기까지 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씨줄 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 고단함의 밑바탕에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생에 대한 진실이 깔려 있다. 작가는 화려한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지도, 특별한 구성적 기교를 부리지도 않으면서도 그 우직한 진실성을 무기 삼아 장삼이사들이 엮어내는 상황들을 예리하게 절개하여 우리 앞에 휙 내던진다. 그리하여 작가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거창한 명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 들게 한다.
표제작 <귀천의 길목>은 그 대표적 예이다. 제목에서 엿보이듯 홀로 떨어져 사는 촌로가 노환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상황을 형상화한 이 작품에서는 이렇다 할 특별한 사건이 없다. 노인의 가족들의 모습 역시 여느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아들과 병수발에 지쳐 짜증을 내는 며느리, 그리고 죽음을 목전에 둔 할아버지에게 힘을 주려 노력하는 손자 등이 등장하여 장삼이사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인간관계를 그리는 것이 이 소설의 주목적은 아니다. 이 소설은 철저하게 노인을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를 획을 긋듯 분리시켜 독자에게 내보인다. 결국 왕후장상이나 촌로나 그 개개인 죽음의 무게만큼은 결코 다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한 노인이 자연스레 스러져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지만 이 작품의 울림은 크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무로 돌아가는 과정을 가감 없이 무섭도록 객관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리라.
<절골의 신화>는 70년대와 50년대 한국전쟁을 오가는 일종의 액자소설이다. 전쟁 속에서 빨치산에게 남편 조철호를 잃은 황해도 댁의 비극적 이야기가 한 축이라면, 유복자인 아들 경환이 농촌에서 성장하여 간신히 도시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는 내용이 또 하나의 축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아픔을 지니고 있다. 황해도 댁은 남편을 일찍 잃었고, 경환은 가난한 시골 노총각이며, 그와 결혼하게 되는 도시 처녀 정아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 이 세 인물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가족과 사랑의 의미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결혼을 했음에도 시골에 적응하지 못한 정아는 시댁에서 도망쳤다가 친정엄마의 권유로 다시 시골로 돌아온다. 그리하여 정아가 모든 마음을 열고 상황을 받아들이지만 이 가족의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게 전개된다.
작가 이재욱의 이번 소설집이 가진 또 다른 특징이라면 ‘열린 결말’의 수법을 빈번하게 사용한다는 점일 것이다. 작가는 결정적인 클라이맥스에서 붓을 휙 던져놓고는 모르는 척 시침을 뚝 떼버린다. 마치 학생들에게 복잡한 고차방정식 문제를 내고 뒷짐을 진 채 빙긋이 웃으며 해법을 기다리는 수학선생처럼 말이다. 무언가 딱 부러지게 이것이면 이것, 저것이면 저것하고 확실하게 결말을 내주어야 만족할 독자들이라면 조금 불편할 수 있을 것이나, 열린 결말이 주는 상상의 재미를 아는 독자라면 그 또한 특별한 즐거움으로 받아드릴 것이다.
<절름발이 사랑>은 1인칭 소설로 화자가 강지애란 이름의 여성이다. 독신인 그녀는 사업에 실패하고 우연히 떠난 여행에서 유부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는 지속되는 불륜의 관계에서 오는 내적 갈등과 본부인과의 만남 등은 극적 긴장을 높여간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여성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는 이 글의 작가가 나이 지긋한 남자였다는 사실을 잠깐 깜박하게 만든다. 흔하디흔한 소재의 신파적 진행은 결말에서 이 소설의 미덕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을 미워할 수 없는 따스함이며 인간 본성에 대한 희망을 가져온다.
<두 어머니>는 등장인물들이 마치 펄펄 뛰듯 살아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인물의 형상화가 절묘한 작품이다. 영목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현재는 제법 성공한 인물이다. 어머니가 죽자 1년도 안되어 아버지를 위해 새어머니를 들인다. 영목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좋아하여 이래저래 살뜰하게 챙긴다. 영목의 여동생은 살아생전 어머니에게 그 반만이라도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행복하셨을까하며 아버지를 야속하게 생각한다. 갈등 속에서도 그럭저럭 유지해나가던 아버지의 결혼은 점차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새어머니가 금세 본성을 나타내 술주정뱅이가 된 것이다. 점점 그 농도가 심해진 새어머니는 마침내 중병에 걸리게 되고 대소변도 못 가릴 지경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런 과정 속에서 갈등하고, 부딪치는 동안 인간 군상들의 허물이 벗겨져 속살들이 허옇게 들어난다. 여기에서 작가의 노련하고도 깊이 있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엿보인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작가가 재구성한 인간은 역시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것이다. 주인공 영목은 죽은 친어머니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무식한 술주정뱅이인 새어머니에게 지극으로 헌신한다. 아무리 아버지를 위한 일이라고는 하나 인간 본연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일리갈 베이비 코피노>는 필리핀 이주 여성노동자의 삶을 다룬 아주 특이한 작품이다. ‘일리갈 베이비 코피노’란 ‘한국인과 필리핀인 사이에 태어난 불법적인 아기’라는 의미이다. 외국 노동자들을 다룬 그동안의 다른 여러 작품들이 주로 불법적인 근로형태나 극악한 근무조건, 악덕 임금체불이나 인종 차별 등 사회적인 문제를 짚었다면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주 노동자 문제를 접근한다.
주인공 쟈스민은 필리핀 출신의 노동자로 한국에 입국하여 취업하자마자 성폭행을 당하는 등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여기저기 공장을 떠돌다 한 도배풀 공장에 와서야 안정적으로 취업한 그녀는 다리를 저는 40대의 마음씨 따뜻한 사장과 뜻하지 않은 사랑을 하게 된다. 인종적인 문제는 여기에는 거의 취급되지 않으나 둘의 사랑은 장벽이 존재한다. 사장은 이혼한 경력이 있는 독신이어서 별 문제가 없지만 쟈스민은 필리핀에 남편은 물론 초등학교 2, 4학년 아들과 딸까지 둔 유부녀였던 것이 문제였다. 작가는 문제를 에둘러 돌아가지 않는다. 무수한 갈등 속에서 쟈스민이 임신하게 되어 ‘코피노’ 아기를 낳기로 결정한 순간 필리핀의 본남편이 한국으로 취업하러 곧 오겠다는 편지를 받게 되는 ‘열린 결말’로 맺음 되는 것이다. 열린 결말은 독자에게 오히려 묻고 있다.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풀었으면 좋겠느냐고. 사랑과 현실의 사이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고.
소설 중간 중간 현장감을 높이기 위해 영어가 사용 되는 등 필리핀 노동자들의 실제적 삶의 모습들은 작가가 이 작품에 들인 공을 짐작케 한다.
<고니와의 해후>와 <브라보, 레니>, <학창시절의 추억 브라보, 레니2>는 작가의 성장기였을 60년대의 학창 시절을 각각 다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온 나라가 춥고 배고팠던 그 시기를 작가는 아주 능청스럽게 낭만적인 풍경으로 바꾸어낸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고달픈들, 어디에서나 싱싱한 젊음이 있었고, 그 속에는 당연히 가슴 설레는 풋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이 이야기를 60년대의 추억으로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긴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자, 오늘의 이 시대에 옛날 그 사랑을 다시 만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위선으로 겹겹이 무장한 독자에게 던진다.
작가 이재욱은 이 소설집을 통해 인간성 본연의 진실한 삶의 조건을, 현실과 사랑의 함수관계 문제를,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제기하고 독자에게 해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최현규-소설가, 한국작가회의 회원

<작가소개>

이재욱(1947~)
충북 단양 출생. 1963년 고교시절 충청일보 신춘문예(학생부)에 단편소설 <우정> 다음해에 동화 <훈이와 토끼> 당선. 이후 작품 활동을 접고 살다가 부천 문화재단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함, 작품으로 <가슴앓이> <무언의 유언> 등이 있고 소설집 <귀천의 길목>이 있음,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현 복사골 문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