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이재무의 일곱 번째 시집 [푸른 고집]
(천년의시작, 시작시인선46, 2004년 10월 25일)

힘센 고집과 굵은 힘줄이 시펄시펄 살아 있는 그의 시편들은 댐을 박차고 나온 상류처럼 격동으로 굽이치고 있다. 마음의 골방에 자존의 족보책 한 권 구겨 넣고 떠도는 그의 시에 대한 고집과 불통은 수심(水深)보다 깊다. 그 깊음이 ‘횃불이 자신의 시로 인계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한 시인의 개벽적 연대기를 쓰게 하고 있다. 절망과 자부라는 상반된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그도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자신의 진액은 그러므로 울음이 아니라 식량이며 자신의 절망은 예술가가 아니라 애술가라고 자각하는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탁월한 인식력과 예지력으로 현실을 꿰뚫고 있는 그의 시편들은 그의 놀라운 발견으로 「푸른 고집」이란 절창을 부르고 있다.
물에는 뿌리가 없으니 고통도 없을 것이라는 이 한 편의 발견만으로도 한 시인의 고유한 세계를 적을 수 있다. 그의 발견은 현재를 발견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재로 하여금 다가오는 시간과 만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그것이 그의 시의 푸른 고집이며 그가 품은 시의 뜨거운 불이다. <푸른 고집>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시인에게 ‘그의 시는 곧 그다’라고 말하고 싶다.
─ 천양희(시인)

이재무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삶의문학』과 그후 『실천문학』『문학과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섣달 그믐』『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벌초』『몸에 피는 꽃』『시간의 그물』『위대한 식사』등이 있음. 제2회 난고문학상 수상. 현재 계간 시 전문지 <시작> 편집주간.

<自序>

오늘도 나는 보라매공원에 간다

일주일 서너 번 나는 무슨 의무처럼 보라매공원에 간다. 공원을 방문하는 시간은 일정치 않다. 보라매공원이 내게 특별히 어떤 생의 보람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공원은 내가 사는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요즘 들어 자꾸 늘어나는 허리의 군살을 빼기 위해 나는 그곳에 간다.
서울에 이만한 넓이를 가진 녹지가 조성되어 있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다. 갑갑증이 이는 나날의 일상에 작으나마 숨통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계절과 달과 요일을 불문하고 사람들로 붐비는 공원이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노출의 계절엔 더욱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연령과 여남 없이 천차만별의 개성이 찾아와 공원이 인색하게 베푸는 그늘에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가 가는 것이다.
공원에 펼쳐져 있는 갖가지 풍경이 눈길을 끈다. 소풍 나온 아이들의 재롱잔치, 노인들의 장기판, 교회의 맹신자들이 부르는 찬송가, 손을 잡고 그늘만을 골라 걷는 연인들, 운동장에 굵은 땀을 쏟아 부으며 헉헉 숨이 차 트랙을 도는 배 나온 중년들, 축구경기에 열중하는 청년들, 과자부스러기를 던져 비둘기 떼를 모으고 있는 할머니 등속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공원에 가면 운동장을 5바퀴 돈다. 한 바퀴 도는 데 10분이 소요되니 도합 50분을 걷는 셈이다. 트랙을 돌면서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나날의 기계적 일상이야말로 트랙을 도는 일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우울하다. 일상의 트랙을 벗어나고 싶다. 매순간 가출충동은 강렬하게 솟아나 등을 떠밀지만 그것은 언제나 현실적 자아의 통제 안에 있다. 아마도 나는 죽어서야 이 일탈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이다. 50분 정도 걸으면 더부룩한 배가 꺼지는 상쾌감이 든다. 지금 나는 몸의 군살을 줄이기 위해 안달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생의 군살이 아닐까.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힌다. 이 벤치를 다녀갔을 절망과 패배와 좌절과 실망과 그리움과 설레임과 기대와 허무 등을 떠올려 본다. 생활이 어려울수록 이 벤치는 더욱 분주할 것이다. 이 벤치에는 우리가 모르는 서사가 상당량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벤치는 그러므로 두꺼운 책이다.
공원 한 구석 버려진 소주병을 바라다본다. 저 푸른 몸의 사내는 한때 뜨거운 불을 품은 적이 있다. 그를 마시고 사람들은 피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가지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품은 불을 누군가가 다 소비했을 때 그는 저처럼 비참하게 버려졌다. 그 사내가 공터를 걸어 나오고 난 뒤에는 어떤 생이 펼쳐질 것인가. 대략 세 가지 유형의 삶이 전개되리라. 저 사내는 가공할 흉기가 될 수 있다. 저 사내는 재활용의 삶을 다시 경영할 수도 있으리라. 꽃을 자신의 몸에 꽂고 향기를 번지게 하여 타자의 눈과 코를 즐겁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아, 그러하니 저 빈 소주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영등포 역전에 가면 함부로 널브러진 소주병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비둘기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며 먹이를 찾는다. 디룩디룩 살이 찐 저 비둘기들은 더 이상 평화 혹은 자유의 표상이 아니다. 자본에 길들여진, 이기에 가득 찬 우리의 초상이다. 누군가 토해 놓은 밥알을 주워 먹는 비둘기들은 충분히 추하다. 날지 못하는 새는 더 이상 새가 아니다. 서울에서 꼬박 스무 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 또한 나는 법을 잊었다.
오늘도 나는 공원에 간다. 공원에 가서 물끄러미 천차만별의 인간군상을 바라다본다. 저들은 동시대를 사는 내 이웃들이다. 저들을 읽는 일은 곧 나를 읽는 일이 될 것이다. 최근 나의 시는 공원에서 상당량 쓰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