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포엠 2022년 10월호 신작시 2편_ 나정욱]
미역의 시간들
미끄러운 미역의 시간들은 모두 미끄러져 바다에 빠져 허우적댄다
익사 직전에 부표를 끌어안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는 시간도 있으나 파도가 치면 미끄러운 시간들은 바다가 고향인 듯 다시 바다로 뛰어든다
첨벙첨벙 물개처럼 물범처럼 바다에 미끄러져 들어가 다시 자맥질하며 물 위로 머리를 들고 숨을 고르는 미끄러운 녀석들
바다를 떠나면 될 터인데 소금처럼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바다만 뱅뱅 돌고 있는 미끄럼틀의 자식들
미역에 시간의 포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미끄러운 바다와 씨름하며 크고 있다 바다에서는 미끄럼을 배우고 바다를 떠난 산에서는 미끄럼틀을 오르는 법을 배운다
바다에서나 바다 아닌 데서나 시간은 미역처럼 미끄럽다
삐끗,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을 간절한 바람이 바라더라도 중심을 잘 잡고 미끄러져서는 안 된다 떨어지는 순간 미역귀가 되어 미끄러운 바위를 붙들고 붙어야 산다
미역의 시간들은 모두 이 시간을 본능으로 배우고 있는 미끄러운 자식들이 꿰차고 있는 순간들이다 미역의 본능은 바다에 붙어 미끄러져 사는 데 있다
창작과 비둘기
열심히 너를 그린다고 그렸는데 결국 나를 그려 놓았다 부끄러워서 이번에는 너를 그리는 대신 더욱 열심히 나를 그려 보기로 하고 거울처럼 나를 그려 놓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사랑하는 네가 나를 측은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래서 단념이 빠른 내가 생각하길 창작이 그러거니 생각하고 그냥 그리고 싶은 대상을 그리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그려 놓은 대상이 모두 날개 지닌 새 종류뿐이라서 나와 너는 날개 있는 새의 후예일 거라 짐작만 하고 있다 그래서 창작의 요체는 자유라고 작가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거라고 또 그렇게 생각해 두고 있다
언젠가 사랑하는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당신은 영락없이 새를 닮았다고
특히 부리와 눈매가 그렇다고 그녀가 말했는데
오늘 내가 창작한 대상은 비둘기였다
비둘기가 뭔가를 물고 오길 고대하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그녀는 비둘기를 닮았는지
창작의 비밀은 끝이 없다
▲ 나정욱 시인
1990년 <한민족문학> 창간호에 「실습시간」외 2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19년에 시집 『며칠 전에 써 두었던 내 문장에서 힘을 얻는다』, 『눈물 너머에 시(詩)의 바다가 있다』를 출간하고, 2021년에 『라푼젤 젤리점에서의 아내와의 대화』를 출간함. 반 연간지 『상상인』 제4호(2022.여름호)에 「비의 아버지」를 발표함. 현재 한국작가회의,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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