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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설] 그 해 겨울
이름 유중원 이메일



그 해 겨울

 

 

겨울은 사람을 더 깊이 품어준다.

더 끌어당기지 않으면 사람도 계절도 더욱 참을 수가 없어서.

— 김남조

 

 

치안본부장은 1987년 1월 16일 오전 8시 30분경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취지로 박종철이 숨진 과정을 발표했다. 그러니까 14일 아침 8시 10분경 하숙집에서 연행했는데, 밤사이 술을 많이 마셔 갈증이 난다며 물을 여러 컵 마신 뒤 심문 시작 30분 만인 오전 11시 20분경에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하며 책상 위로 쓰러져 긴급히 병원으로 옮기던 중 차 안에서 숨졌다는 것이다.

치안본부장이 기자 회견을 하는 시간, 아버지 박정기는 아들 박종철의 주검을 실은 장의 버스에 몸을 싣고 영안실을 떠났다. 버스는 홍익동 경찰병원을 출발해서 청계천 고가도로를 달렸다. 중앙청 앞에서 좌회전을 하여 벽제 화장터로 향했다. 화장터로 가는 길에는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다. 비는 마치 관 뚜껑에 못질이라도 하듯이 내렸다. 화장터에서 관을 내릴 때 아내 정차순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 쓰러졌다.

화염이 널름거렸다. 하얀 연기는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젊은 육신이 타고 명징한 의식도 탔다. 두 시간 뒤 박종철은 분골실에서 한 줌 뼛가루가 되어 나왔다. 그들을 태운 검은색 승용차는 화장터를 떠나 파주읍과 문산읍을 거쳐 파주군 파평면 금파리 금파 삼거리에서 임진강의 지류인 샛강으로 빠졌다.

아버지는 작은 상자를 떨리는 손으로 열고 유골 가루를 싼 흰 종이를 천천히 풀었다. 아들을 임진강에 뿌렸다. 겨울의 날카로운 바람이 아들을 낚아챘다. 헐벗은 숲에는 나뭇잎 하나 없고 땅 위엔 꽃 한 송이 없다. 아들은 잿빛 가루로 흩어져 황량한 들판과 붉은 산굽이를 감돌아서 흘러오는 살얼음이 언 강물 위에 내려앉았다. 언 강이 녹는 봄이 오면 아들은 물결을 따라 먼 바다로 떠날 것이다.

아버지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 임진강 샛강가로 저를 찾지 마세요 / 찬 강바람이 아버지의 야윈 옷깃을 스치면 / 오히려 제 가슴이 춥고 서럽습니다 / 가난한 아버지의 ……

 

1월 20일에는 언어학과 사무실에서 고 박종철 학형 추모제가 열렸다. 그들은 누구인가 선창을 하자 울면서 따라 노래를 불렀다.

 

<친구 2>

어두운 죽음의 시대 / 내 친구는 굵은 눈물 붉은 피 흘리며 / 역사가 부른다 / 멀고 험한 길을 / 북소리 울리며 / 사라져간다 /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없다 해도 / 그 눈동자 별빛 속에 빛나네 / 내 맘 속에 영혼으로 살아 살아

 

<그날이 오면>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 내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곳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리고 학생들과 어머니들의 애통한 조사가 이어졌다.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너의 죽음을 마주하고 /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곁을 맴돌 / 빼앗긴 형제의 넋을 앞에 하고 / 우리는 입술을 깨문다

 

어미들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하구나…… 어버이들이 저지른 죗값을 어이하여 꽃다운 나이의 너희들이 희생의 제물이 된단 말이냐. 저들도 자식을 키우는 사람일진대.

 

철아 다 잊어버리고 잘 가그래이.

 

* * *

 

치안본부 대공분실 형사 6명이 신림 9동 하숙집에 가서 박종철을 연행한 시간은 언제쯤일까. 그 당시 치안본부에서는 박종철 연행시간을 1987년 1월 14일 오전 8시 10분이라고 했으나 검찰은 6시 40분이라고 밝혔으므로 엇갈린다. 이게 중요한 게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사건의 시발점, 다시 말하면 6월 항쟁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검은색 포니는 하숙집을 출발했다.

그 작은 승용차는 고참 형사가 운전했고 앞자리 조수석에는 후배 형사가, 뒷자리 중앙에는 종철이가, 좌우 양쪽에도 형사가 앉았다.

포니는 신림 9동을 벗어나서 숭실대학교 정문을 지나 한강대교를 건넜는데 그때 한강은 강가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중앙대학교 용산 병원을 지나 삼각지 로타리에서 좌회전을 해서 2킬로미터쯤 직진하다 우회전하여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는 모든 기차들이 통과하는 경부선 철로를 왼쪽으로 끼고 2차선 도로를 직진하여 지하철 1호선 남영역 인근 대공분실에 도착했다.

바람결에 기차가 덜커덩거리며 지나가는 소리, 기적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평화스럽고 아늑하였다. 그 기적 소리는 어린 시절 부산 바닷가로 그를 데려다 주었다.

그들 일행은 전기장치로 작동되는 육중한 검푸른 철문을 통과했다.

잿빛의 벽돌로 지은 7층 건물이다. 5층 창문만이 햇빛이 겨우 들어올 정도로 유독 좁고 수직으로 기다란 모양이다. 건물의 내부 구조는 희생자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어있다. 피의자는 철문을 통과하여 건물 뒤편으로 가게 된다. 건물 뒤편에 있는 출입문은 들어가는 방향과 나오는 방향이 서로 반대로 되어있다.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1층부터 5층까지 이어져있는 검은 나선형 계단이 나타난다. 피의자는 이곳을 지나면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몇 층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박종철은 형사들에게 끌려서 검은 나선형 계단을 통해 5층 조사실로 올라갔다.

5층에는 여러 개의 조사실이 있는데 각 조사실의 문이 다른 조사실의 문과 모양도 같고 위치는 서로 마주보지 않도록 엇갈려 있다. 이렇게 되면 피의자는 어디로 들어왔고, 나가는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조사실은 아주 좁고 기다란 창문이 나 있으므로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되게 된다.

창문은 너무 좁아서 조사를 받던 희생자가 고문에 못 이겨 뛰어내릴 수 없도록 만들었고 밖을 제대로 볼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조사실의 전등은 밖에서만 끄고 켤 수 있도록 되어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문에 렌즈가 달려있다.

8호 조사실이었다.

3.3평쯤 되는 방에는 조사관용 책상과 보조책상, 고정된 의자, 변기 그리고 침대가 있었다. 다른 조사실도 비슷한 구조였다. 특이한 것은 각 방마다 폭이 좁은 욕조가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 조사실마다 욕조가 필요했을까. 상습적으로 물고문을 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경찰은 변명을 한다. 간첩의 경우 오랫동안 조사를 받기 때문에 욕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문제의 욕조 턱은 높이 75cm, 폭 6.5cm였다. 종철이의 목과 가슴에 생긴 상처의 폭과 욕조 턱의 폭이 비슷했다. 그 욕조 턱에 종철이의 목과 가슴이 눌린 사실이 증명되었다.

 

1차 신문은 8호실에서 시작되었다.

“네 이름이 박종철이지?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생년월일을 말해봐.”

“1965년 4월 1일입니다.”

“가족사항은?”

“아버지 박정기, 부산시 수도국 관리실 공무원입니다. 6월에 정년퇴직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정차순, 형 박종부, 누나 박원숙이 있습니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재학생이고.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사회사상연구회란 써클에 가입했고, 서울대 반제반군부파쇼 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 약칭해서 민민투라고 하더구만…… 그리고 전국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 학생연합, 그러니까 전민학련 소속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과가 화려하군. 1985년 5월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시위에 참가하여 구류 5일을, 6월에는 가리봉동에서 노학 연대 투쟁을 벌이다 구류 3일을, 1986년 4월 11일에는 청계피복노조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구속되어 1986년 7월 18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하였구만.

그러니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시위나 했으니 얼마나 불효자식인가? 그까짓 거 운동인지 뭔지를 포기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잘 살 수 있을 텐데 웬 고생이야.

그러니까 짭새들도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야.”

“……”

2차 신문은 9호 조사실로 신문장소를 옮겨 그곳에서 진행되었다. 고문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오로지 원하는 것은 지명 수배자의 행방이었다. 신림동 일대에 수배자의 사진이 박힌 현상금 전단지가 도배되어 있었다. 그 수사팀은 수배자와 그 조직을 일망타진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를 잡으면 1계급 특진이었다.

특진! 특진이라니!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그들은 종철이 쓴 자술서를 내던지며 도망자의 거처를 대라고 종철을 주먹으로 때리고 구둣발로 차며 윽박질렀다.

 

11월 24일 저녁 8시경 강정원(82 인류학과 대학원) 군이 박종운이란 사람을 데리고 와서 자기가 아는 선배인데 수배 중이라 자기 방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하루 저녁 자야겠으니 부탁한다며 인사를 시키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자고 다음날 밥을 함께 먹고 오전 중에 나갔음. 그 후 지난주에(1월 8일경) 저녁에 박종운이 한 번 더 찾아와서 돈을 좀 달라기에 1만 원을 주고 잠시 있다가 나갔음. 그 이후로 보지 못했음.

그는 반들반들한 구둣발과 돌덩이처럼 억센 주먹이 그의 온몸을 강타할 때마다 뼈마디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뜯겨나고 뇌수가 쏟아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얼마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절망했을 것인가. 나는 내 경험에 의하면 그 나이의 순수한 감정에서는 그 순간 분노가 일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냥 절망했을 것이다.

“야! 빨리! 어디 있는지 대라고.”

“……”

“이 자식이! 죽고 싶어!”

“……”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있어! 살고 싶으면…… 어서! 불어! 불으란 말이야! 제발 좀!”

“……”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거지? 쓰디 쓴 물 맛을 보여주지. 그래도 입이 안 열릴까? 어디 두고 보자고.”

고문자들이 그의 손목과 발목을 수건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욕조 안에 밀어 넣었다. 콧구멍에서 기포가 나오고 정신이 잠시 혼미해졌다. 뱃속으로 물이 마구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힌다.

“독서실! 독서실!”

“이새끼! 정확히 말해! 어느 독서실이야? 서울 시내에 독서실이 한두 군데야? 수천 개라고!”

“그건 모릅니다. 가르쳐주지 않았거든요.”

도망자는 그때 동가숙 서가숙하며 매일 옮겨 다녔기 때문에 그의 거처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도망자가 그에게 부탁했던 몇 가지 내용을 실토했더라면 아마 그들은 고문을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자백은 배신자가 되는 거야. 배신자가 될 수는 없어. 나는 어떤 고문도 견뎌낼 수 있다. 그때 감옥에 있으면서 내공의 힘이 강해졌지 않은가.’

더욱 숨이 막혀왔다. 다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서서히……

“이 새끼, 생기기는 순하게 생겼는데 정말 독종이네. 너는 알고 있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까 어서 불으란 말이야!”

 

상급자가 욕조에 물을 더 채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시 바른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리고 발로 다리를 걷어찼다. 이때 다른 형사도 가세하여 주먹으로 가슴을 여러 차례 때렸다.

그런 다음 옷을 완전히 벗게 한 후 물이 가득 찬 욕조로 데려갔다. 그때 상급자가 다시 지시하여 14호 조사실에서 다른 피의자를 신문하고 있던 형사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때 그에게 다시 한 번 도망자의 소재를 추궁하였으나 입을 다물고 응하지 않자 그를 더 혼내라고 지시하였다.

형사들이 조사실에 걸려 있는 수건을 사용하여 그의 양손과 발목을 다시 결박했다. 그러고 나서 한 형사는 그의 오른쪽에서 왼팔을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었고 또 다른 형사는 왼쪽에서 오른팔을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고 붙잡아 함께 등을 눌렀다. 형사들이 욕조 안에 들어가서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아 물속으로 누르다가 한참 후에 끌어내는 가혹 행위를 두세 번 반복했다.

그런 후 다시 수배자의 소재를 신문하였다. 오직 수배자의 소재가 문제였다. 그는 역시 침묵을 지켰다. 상급자가 좀 더 혼을 내라며 다시 물고문을 지시했다. 이때 여러 형사들이 합세했다. 그들이 결박된 다리를 들어 올리고 머리를 물속으로 두세 번 눌렀다. 그의 목 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려 숨을 쉬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졌고 광기 어린 눈에서 불이 났을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썩은 야채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풍겼을 것이다.

그는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방 안에 희미한 불빛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들이 날카롭게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는 더욱 모호한 태도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는다. 목구멍이 욕조의 턱에 걸려 숨이 막혔을 때 외마디 비명소리를, 또는 가늘게 신음 소리를 내뱉었을까. 아마도…… 그때 고문자들은 더욱……

물의 무게, 가슴에 차오르는 천근만근의 무게가 어쩌면 죽음의 형체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숨이 가빠오면서 질식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죽음의 그림자는 감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어머니와 아버지, 누나와 형님의 익숙한 얼굴이 잠깐 스쳐지나 갔을 것이다. 그리고 암흑이었을 것이다.

 

* * *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한 겨울의 그 추웠던 밤.

이승에서 마지막 밤이었다.

그날 밤 종철이는 친구에게 ‘오늘은 기분이 좋은데 한 잔만 더 하자’고 하면서 하숙집과 가까운 민속촌 술집에서 기분 좋게 두부 안주에 동동주 한 단지를 마시고 반쯤을 더 마셨다.

내가 그의 주량을 상상할 순 없지만 상당히 취했을 것이다.

그때 종철이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을까. 그러나 어느 문헌에도 그가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날 밤 달이 떠올랐을까? 상현달 아니면 하현달. 달을 바라보며 부산 바닷가가 그리웠을까? 애처로운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새삼스럽게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서 눈 덮인 산꼭대기에 눈길이 머물지 않았을까?

죽음을 예감할 수 있었을까. 어떤 불길한 느낌이 불현듯 들었을까. 아무것도 못 느꼈을까.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그때 분노를 느꼈을까? 무엇 때문에,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가슴이 무거웠을까? 머리를 흔들며 부정하고 혼자 중얼거렸을까?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미국은 광주사태 개입을 공개 사과하라’ 고 마음속에서 외치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을까?

 

박종철이 1987년 1월 형사들에게 붙잡혀 끌려나왔던 그 하숙집은 서울대생들이 지금도 많이 사는 당시 신림 9동 녹두거리의 한 골목에 있었다. 30년 전 젊은이들이 자주 들렀던 신림 9동 주변의 기껏해야 감자탕 아니면 두부 안주에 동동주나 소주를 마셨던 학사주점들은 다 사라졌다.

탈, 민속촌, 선비촌, 청벽집, 스페이스 등

이제는 그 시절 동네 슈퍼나 정육점, 세탁소, 야채 가게 등이 들어서 있던 낡은 건물들 대신 그 자리엔 다세대 주택 사이로 가정집을 리모델링한 요즈음에 어딜 가도 흔한 현대식 카페와 편의점, PC방, 노래방 그리고 많은 고시원과 오피스텔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버스 종점, 열린책방 등 그 일대는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 버스 종점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그러나 서울대 입구로 이어지는 변두리 풍경은 그대로이다.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골목길일 뿐이다. 아기자기하지도 않고 감각이 돋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세련되고 예쁜 장소는 없다. 오직 볼품없는 서울대 정문만 옛날 모습 그대로 덩그러니 서 있다.

종철이의 하숙집은 붉은 벽돌로 된 별다른 특징이 없는 2층 주택이었는데 이 주택은 이미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 집주인은 하숙집 주택을 1989년 사들인 뒤 건물을 신축했는데 1, 2층에 작은 방이 서너 개 있었고 종철이는 2층에서 하숙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산 주민들도 박종철이 이 근처에서 살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민주열사 박종철의 비는 서울대 캠퍼스 중앙도서관 옆 언덕빼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종철이가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지난 지금 그 기념비에 의미를 부여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그들은 말했다.

“박종철이 누구인지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지만 특별한 느낌은 없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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