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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이명희
하얗게 쏟아지는 달빛
깊은 어둠을 표백해 밝히면
하루씩 그 빛에 여위어 가는
서녘으로 지는 노을에 스윽
가슴 한쪽 잘라 던져주었는데
한번 더 날을 세우는
끝없이 제물을 원하는 허기
스윽 다시 한 덩이
철철 피 흘리며 던져준다
미소가 캄캄한 하늘을 찌른다
하얗다 못해 날카로운 푸른빛
이 밤을 견딜 수 없다
가슴을 뭉텅 모두 잘라 주어야만
무엇이든 자릴 잡을 터
그래 자 먹어라
내 심장을 먹고 네가
자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나를 던져 너를 채워주마
팔과 다리를 거침없이 잘라
기꺼이 여위어 주마
어디 내일 없어요?
이명희
입술 찍힌 종이컵 날마다 한 꺼풀씩 벗겨내면 사라지는 일상 똑같은 시침과 분침이 기계인형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일용할 양식을 채우고 무덤 속 집을 나선다 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고 다행히 늘 앉아 있던 책상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은 너무 늙지 않았고 너무 젊지 않은 한 장의 종이 달력은 벗겨져 더 이상 여윌 수 없을 때까지 소모된다 분홍 입술 찍힌 흰 종이컵이 꼬깃꼬깃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처박힌다 어지럽다 당장 내일부터는 내일이 없어졌다 미래는 어제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막다른 길에 섰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텅 빈 허공이 들어찼고 모두 길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텅, 터엉 소리라도 들리면 위안이 될지도 모르지만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빨아들인 커다란 구멍은 소리도 용납하지 않았다
어디 내일 없어요 혹은 어제는 어디 있나요? 내일이 절실하게 필요하죠 숨을 쉬어야 하니까 내일이 잘린 환지통은 참을 수가 없어요 견디기 위해 삼킨 시간을 뱉어 내고 싶어요
□ 약력: 1997년 《처음처럼》등단. 시집『아름다운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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