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지근한 걸음
이기인
강요(强要)로 접혀 있는 담요 위로 일흔의 노인이 몸빼를 입으시고 미지근하게 눌어붙어 있다
열무 다섯 단 손님이 지나가시다 말고 가만가만 지나온 걸음을 돌려 비릿한 생선가게로 흠흠흠 걸어가신다
튀어오르는 물고기처럼 노인이 벌떡 일어나시고 붉은색으로 헐어버린 고무대야 속으로 살얼음을 깨뜨리고 들어가시듯 한다
기력을 다해 비단폭을 잡은 것처럼 물고기를 고마웁게 들어올리신다
으슬으슬, 도마 위 빗금에 물고기의 뜬 눈을 늬우시고
비늘을 입은 몸통과 가려운 잎사귀 모양의 꼬리를 나란히 늬우시고
오후의 늦은 햇빛이 오줌 마려운 듯 노인의 어깨를 톡톡 등을 톡톡 깨우고
손에 쥔 칼의 희고 차가운 빛으로도 한 줄기 뿌려진다
(파르르, 칼의 깊숙한 문장을 받아적은 물고기는 금세 세 토막의 눈물이라는 하나의 문장을 꾸욱 삼킨다, 까만 비닐봉투엔 피 묻은 문장이 불룩하게 담아졌다)
세 토막의 눈물을 데리고 퍼석퍼석 퍼석퍼석 버릇없이 큰길을 따라나온 걸음이 퍼석퍼석 퍼석퍼석
한 걸음이 길의 끄트머리에서 웅성웅성 '우리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펄럭이는 천막을 마주하고 섰다
흙처럼 모인 사람들 사이로 시퍼런 바람 한 주먹이 비집고 들어가서 그들의 울음주머니를 더 부풀린다
철거를 앞둔 미지근한 마을의 입구에서 물컹한 세 토막의 문장을 들고 마냥 서 있는 걸음
이기인 1967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이 있다.
|
회원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