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사내가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늦은 저녁을 때울 요량으로 카페테리아에 들어섰을 때다. 바다 쪽으로 난 커다란 창 밑에 그의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는 흰살 생선 하나와 샐러드를 골라 그들 쪽으로 가 앉는다.

 "우린 다 끝나 가는데, 늦었네요. 여보, 참 인사해. 멀미약 준 학생이야. 우리 집사람이에요."

 닭다리의 힘줄에 붙은 살을 떼먹느라 열중하고 있던 그녀가 멋쩍게 고개를 들어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덕분에 약 먹고 한잠 푹 자고 났더니 개운해졌어요. 고마워요."

 그녀가 기름이 묻은 번들거리는 입술을 벌리고 웃었다.

 살집이 좋은 둥근 얼굴. 발에 맞는 편안한 구두처럼 세상사에 길들여진 태무심한 얼굴. 그래서 그럴까, 설핏 낯익은 느낌이다.

 "얘, 혜주야. 생선을 이렇게 먹으면 어떡해! 봐라, 뼈에 살이 아직 이렇게 붙었는데. 너, 콩나물이 몇 개나......"

 "냅둬, 좀! 오랜만에 바캉스까지 나왔으면 좀 우아하게 굴어. 꼭 티를 내고 싶어?"

 사내가 윽박질렀다.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들고 사내를 쏘아보았다. 파르스름한 눈빛. 그 눈에 잠시 물이 스미는 듯 하다. 갑자기 내 가슴속의 무거운 추가 쿵, 떨어졌다. 아! 저 물기 묻은 투명한 눈빛. 맙소사! 세월이 흘렀다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곳에 놓여진 그녀가 이렇게 다른 느낌이라니.......

 

 

 방금 전 나는 사내와 카페테리아에서 헤어져 선실로 돌아왔어. 아까 그의 아내가 사내의 윽박지름에 휑하니 유모차를 끌고 사라지자 사내는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여러 병 사 들고 왔었어. 사내는 술이 별로 세지 않은지 세 병째부터는 아주 자조적인 코맹맹이 목소리로 변했지.

 우리 마누란 지독히 돈만 아는 여자야. 그래도 그렇지. 아까 그렇게 노염을 탈 건 뭐 있누. 다 내 못난 탓이야....... 우린 파리 교외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콩나물을 길러 팔고 있어요. 내 딸은 사탕을 하나 사 먹을 때마다 묻지. 엄마, 이건 콩나물 대가리가 몇 개야? 그건 콩나물 백개다. 내 딸은 늘 이렇게 말하지. 아빠 담배 피지마. 그건 6프랑 짜리 콩나물 세 봉지 값이야. 그거 키우려면 얼마나 힘든지 생각해 봐.

 내게도 꿈이 있었지. 암담한 시대에 세상을 바꿀 꿈. 어두운 시대에서도 콩나물처럼 싹을 틔울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썩은 콩이 되고 말았지만.......

 내가 프랑스에 정착한지 십년도 넘었지만 이게 오년만의 바캉스요. 왜 하필 갓난쟁이까지 끌고 아일랜드로 이 긴 항해를 하냐구? 나, 집사람에게 처녓적 꿈을 좀 일깨워 주고 싶었어. 그쪽으로 가 공불 하고 싶어했지만 내 뒷치닥거리하느라 고생 많았지. 거긴 집사람 옛친구들이 많이 있거든. 죠이스니 예이츠니 뭐 그런 이들 말이오, 낄낄낄........

 누군가는 그러데. 이제야 정권도 바뀌고 한 묷 나설 때도 되지않았냐구 말야. 난 미련 없어요. 집사람도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아. 우리 땅이 아니면 어때? 어디든 비비적대고 뿌리를 내리고 살면 그만이지, 콩나물처럼 말야. 그저 성하게 살믄 됐지. 안 그런가? 젊은 친구.

 사내는 계속 취해서 떠들어댔지만, 부대해진 몸으로 자박자박 콩나물에 물을 주고, 썩은 콩을 골라내며, 콩나물 대가리 하나 하나를 돈으로 셈한다는 그의 아내 생각으로, 나는 무지근한 가슴에 찬 맥주만 염치없이 들어부었구나. 그의 아내가 누구길래? 아, 그의 아내로 인해 내 사춘기의 꿈속이 어지러웠다면, 너 믿겠니? 열 다섯 소년의 야물지 못한 허술한 꿈속에.......

 

 

빛나는 미래를 예고해 주었던 형은 대학 시절 내내 집을 겉돌았다. 나하고의 나이 차이가 일곱 살이나 벌어진 형과 나는 이미 공통 화제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그 해 봄이 되어서야 그야말로 형이 아주 집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그가 다 망가져 버린 뒤였다. 그 전 해에, 시위 주동자로 곧바로 군입대 했던 그는 총탄 사고로 오른쪽 다리 하나를 망가뜨리고 의병 제대를 했다. 사고 였는지 아니면 자해였는지 그 당시의 나에게는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정신도 망가졌다는 것.

 바깥출입을 못하고 가끔 실성기까지 있는 그는 가족들을 괴롭혀 댔다. 그는 바깥출입은 고사하고 주로 누워지냈다. 목발을 짚고라도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성한 왼쪽 다리마저도 거추장스런 퇴화기관이 되어 가는 듯 허옇게 살 비듬이 떨어지고 여위어서, 꼭 늦가을의 마른 장작 같았다.

 가족이라야 어머니와 나. 어머니는 집 근처 시장에서 조그마한 건어물 가게를 내고 있는 터라 주로 시달리는 건 나 였다. 어머니가 없는 동안 그의 수발은 물론 가끔은 그의 배설까지도 신경을 써 주어야 했다. 물론 시장에서 어머니는 틈만 나면 집으로 쫓아오곤 했는데, 하나 남은 그의 왼발에 늘 호되게 걷어차이는 건 나였다. 그가 정신을 놓을 때면 나는 갖은 고문을 당했다. 나를 자신을 괴롭히는 상관이나 형사로 착각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에게 살의를 느꼈다. 그를 피하고, 그를 방치하는 것만이 유일한 복수였다. 그렇게 나는 음지의 독버섯으로 나를 키우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물 섞인 애소와 형의 광기 속에서, 그 혼돈스러운 무거운 공기 속에서도 나는 크고 있었다. 목소리도 변성이 되어 있었고 보드라운 수염도 돋기 시작하고,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는 체모도 자라고 있었다. 억눌려 폭발할 듯한 정신 속에서도 육체는 무관하게 악착같이 크는 내 자신이 정말 독종 같은 징그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싫었다. 아니 두려웠다. 중3이 되면서 더 압박이 느껴지는 학교도, 집도, 마치 짓누르는 압력만큼이나 어느 순간 내 스스로를 온통 터뜨려 버릴 샴페인 병처럼 나는 조마조마했다.

 나는 만화방에 들어앉아 시간을 죽였다. 그도 아니면 전자 오락 게임에 몰두하거나. 그렇다고 문제 학생이 될 깜냥도 내겐 없었다. 나는 그저 모든 게 시들했을 뿐.

 성적도 점점 떨어져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는 반에서 정확히 중간이었다. 키도 중간, 보통의 체격, 그저 그런 생김생김.

 무엇보다 나는 말이 없었고 무표정했었다. 당연히 나는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고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해 우리 반은 8년 역사의 그 학교 설립이래 가장 질 나쁜 학급이라고 들어오는 학과목 선생님마다 저주를 퍼붓곤 했었다. 그 반에 그녀가 그야말로 추락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지만, 날개를 잃고 잘못 떨어진 천사가 아닐까 하고 몇 번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

 첫 영어 시간.

우리는 들떠 있었다. 저학년을 맡아 온 예쁘장한 영어 선생이 우리 반을 맡게 된다는 정보가 미리 있었으므로. 학기초라곤 하지만 여선생이 들어오는 이 시간만큼은 아이들도 무장해제가 된 포로들처럼 중구난방이었다.

 벨이 울리고, 잠시 후 교실의 미닫이문이 심하게 밀어젖혀져 엄청난 큰 소리를 내며 문설주에 쿵 부딪혔다. 의외로 큰 문소리에 놀란 우리들이 어? 영어 시간 아냐? 하며 술렁대기 시작할 때 키가 작고 가녀린 몸집의, 언뜻 우리 또래의 소녀 같은 선생님이 나타났다. 그녀는 긴 막대기와 출석부를 들고 무표정하게 짐짓 화난 얼굴로 교탁으로 가 섰다.

 우리를 쏘아보는 작고 단정한 얼굴에는 맵찬 결기가 엿보이기도 했으나 그건 그녀 스스로도 잔뜩 긴장해 있다는 증거였다.

 뒤늦게야 반장이 차렷! 구령을 붙이자 그녀는 긴 교편으로 교탁을 힘껏 세 번 때렸다.

 "첫날부터 이게 뭐야? 다들 눈감아!"

 모든 선생님들이 수업의 첫날은 군대의 군기를 잡듯 쇼를 한다는 것쯤은 학교 문턱에 9년째 드나드는 우리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약 한 달간, 서로간의 탐색기간을 거치면서 1년간의 생존 방식이 결정된다는 것쯤도다 알고 있는 우리였다.

 어쨌거나 수업 첫날, 도끼눈을 뜨고 다소 앙칼진 모습으로 교단에 서 있는 그녀에게 우리 모두는 내심 만족했다. 16학과목의 선생님들 중 두 사람만이 여선생이었는데, 그중 음악 선생님은 흥분해서 노래를 가르치다가 틀니까지 빠진 적 있는 할머니였다. 일주일에 다섯 시간이나 되는 영어 과목의 이 선생은 신참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앳되어 보이고 게다가 제법 예쁘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녀는 계속, 눈감아! 눈 떠! 하며 분위기를 정리하였다. 차츰 교실은 조용해졌다. 그 틈에 어디선가 작게 군지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되게 폼 잡네."

 "누구야?"

 앙칼지게 소리를 내지르며 교탁을 치는 소리. 창가 두 번째 줄의 김 두만 이었던가. 출석을 부를 때마다 아이들로부터 두만강 두만강, 놀림을 받던 아이.

 그 아이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자,

 "이리 나와!"

 '와'에 힘을 준 강압적인 목소리.

실내화를 질질 끌며 김두만이 그녀 앞에 섰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만."

 내 옆의 강호균이 속삭였다.

 그때 갑자기 마른 장작 뽀개지는 소리가 나더니 김두만이 얼굴을 감싸쥐고 좀 전 보다 군기가 잡힌 차려 자세로 바꾸었다. 교실은 잠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들어가."

 김두만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꾸벅하고 돌아섰다. 한쪽 볼이 벌갰다.

 "모두 영어 책 4페이지!"

 교실은 사각사각 날선 새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가득했다. 영어 책을 펴 들고 읽기 시작하는 그녀의 얼굴에 아주 잠깐 회심의 미소와 홍조가 함께 스쳐 지났다고 나는 느꼈다.

 첫 영어 시간 이후 얼마간은 한 편의 모노 드라마를 보듯, 우리는 얌전한 관객처럼 그녀의 수업을 경청했다. 창백한 그녀의 여윈 몸에서 생각보다 크고 낭랑하게 울리는 고음의 목소리. 듣기 좋은 책 읽는 소리. l 음과 r 음의 굴림소리를 내가 만난 영어 선생님들 중 가장 우아하게 낼 줄 알았던 선생님. 솔직히 말해 우리는 헌신적이고 실력 있는 교사들은 알아 볼 수가 있는 법이다. 교내 영어 웅변 대회에 심사 위원으로 왔던 한 젊은 미국인에게 우리의 영어 선생님이 유창한 영어로 안내를 하며 동시 통역을 하던 그 당당하던 모습. 늘 조회 시간에 호통만 치던 교장 선생님도 미국 사람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처럼 비슬대어 우리들의 조소를 자아냈던 그 행사가 아니더라도 교실에서의 그녀는 막힌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첫날 이후 나는 이 가녀린 여배우에게 맡겨진 배역이 안쓰럽기도 불안하기도 했었는데 아닌게 아니라오래지않아 우리는 영어 선생님의 여린 본성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끔씩 그녀의 표정에서 우리들에게로 향하는 연민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체벌을 하고 났을 때의 어쩌다 엄마의 눈빛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안타까움. 억양도 악센트도 망가진 60명 전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령 같은 군대식 영어의 흐트러진 끄트머리에서의 슬픈 표정.

 이상하게도 우리 반은 우리들 스스로도 걷잡지 못하는 이상한 기류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몇몇의 전과가 있는 사고뭉치들이 뒷자리를 채우고 음흉한 눈빛을 빛내고 있고, 앞자리의 애송이 녀석들마저도 그야말로 '발랑 까졌다.' 공부를 잘하는 귀공자형의 반장의 명령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는 금방 이 거역할 수 없는 기류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 기류가 딱히 뒷자리의 몇몇 질 나쁜 아이들에게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늘 시시덕거리거나 할뿐이지 학급 일에는 관심도 없다는 투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날마다 쌈질을 하는 것은 나날이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그래도 뒷자리의 아이들 중에서 황종규는 은근히 선망의 우상으로 아이들간에 자리잡는 듯 했다. 그는 벌써 1학년 때와 2학년 때에 두 차례에 걸쳐 강간 미수와 집단 패싸움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무기정학과 유기 정학 처분을 받은 바 있는 소위 전과자였다. 술과 담배, 여자를 섭렵한 본드 환각의 귀재. 그의 이름 뒤에 붙는 수식어였다.

 귀골로 생긴데다 공부도 상위권에 드는, 언뜻 보기에 모범생으로 보이는 그는 말수가 별로 없는 대신 무척 시니컬하고 반항적인 표정과 말투로 많은 급우들을 매료시켰다. 이미 술과 담배 여자, 게다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본드와 부탄 가스로 환각 상태에 습관적으로 드나든다는 그의경지는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해탈의 경지처럼 여겨졌다.

 왠지 담임 선생님도 그를 쉽게 건드리지 않았다.그는 뒷문 출입문 쪽에 앉아 만화책도 읽고 심지어 영어 시간에는 포르노 잡지를 뒤적거릴 정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들의 담임 선생님은 체육 선생이었다. 그리 우람하다곤 할 수 없지만 단단한 체구에 붉은 세모꼴 얼굴, 강퍅한 인상을 주는 쭉 찢어진 눈매, 숱 없이 벗겨지기 시작하는 앞머리. 우리는 그를 '독사 대가리'라고 불렀다.

 우리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단연 독사 대가리였다. 그는 늘 협박했다. 지난 번 보다 성적이 떨어진 놈은 아버지를 모셔 와라. 엄만 안 돼.

자신의 열등감의 보상 심리였는지 처음부터 그는 시험 성적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3학년 10반을 최우수반을 만들자. 그러나 우리는 단 한번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10 개 반 중에서 늘 꼴지를 면치 못했으니까.

 처음 몇 달간 그는 우리에게 그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체벌이야말로 애정의 척도며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준다고 믿는 위인이었다. 우리는 종례 시간마다 쪽지 시험을 보고, 군대식 복창으로 암송을 하고, 그가 내준 영어 숙제를 위해 영어 수업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종례 시간마다 뭔가 늘 트집거리를 잡아 붉은 얼굴을 더 붉게 물들이며 교실의 긴 걸레 막대를 들고 우리들의 엉덩이가 터지도록 때렸다.

 "3학년 10반! 어떤 한 녀석이라도 단체에서 이탈하는 행동을 보이는 녀석은 반쯤 죽는다, 알았나?"

교실을 뇌성처럼 울리는 소리

 "예에!"

 그러면 하루가 저무는 것이다.

 단체 기합이건 개인적인 체벌이건 우리가 서서히 고통에 길들여져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못하게 되자 그는 우리들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였다.

 "이것들은 아예 견적이 안 나오는 물건들이라니까."

 그의 입에서 그후 단골로 나오는 말이었다.

 대신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학급회의 시간에 무기명 투표를 하게 되었다. 학습 분위기를 해치고, 단체행동을 하지 않고, 급우들에게 악영향을 끼친 그 주의 인물들을 적어 내는 것이었다. 표를 제일 많이 얻은 당선자는 담임선생을 따라 체육실로, 정확히 말하면 공이며 뜀틀 따위 기구들을 보관한 체육실 창고로 가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그곳을 안기부라고 불렀다.밀실에 대한 공포는 더욱 더 우리를 살벌하게 했다. 두세 번 투표를 거치자 이상한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윤범식이라는 특수아, 즉 저능아가 몰표를 얻기도 하는가 하면 김경민이라고 하는, 여자아이처럼 솜털이 보송송하게 난 뽀얀 얼굴에, 변성이 안된 가는 목소리를 가진 천하의 골샌님이 그 주의 인물로 뽑히기도 하는 것이었다.

 금요일 마지막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포로 다가왔다. 누가 뽑힐지 몰랐다. 그럴 때 우리를 구원한 것은 황종규였다.

 "야! 이 병신 새끼들아, 각자 자기 짝의 이름을 써내면 될 거 아냐. 짝없는 이지훈이는 지 이름 쓰면 될 거구."

 그랬다.

 우리 반 60명의 이름이 골고루 한번씩 호명된그 비밀 투표야 말로 기적이었다. 두 표 이상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날 이후 그 무시무시한 비밀 투표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우리 반 모두가 대오 각성한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에게 무서운 것은 없었다. 우리는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우리들이란 집단의 사악한 힘의 위력을.

 학과목 선생님들마다 회유와 협박으로 우리들을 가르치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을 우리는 내심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예라. 이 녀석들아. 다 하기 싫으면 그럼 이것만은 꼭 외워라. 이번 모의 고사에 나온다, 나와."

개중에는 선생님들이 더 안달이었다. 몇 문제를 아예 집어 주기도 했다.다른 반과의 성적 편차에 그들이 더 민감했으니까.

 그래도 영어 시간에 비하면, 남자 선생들에게는 그 정도면 예우를 갖춘 셈이었다. 영어 시간이야말로 우리들이 몸을 푸는 시간이었다.

 영어 선생님은 숙제를 안 해왔다든가, 복습 확인으로 치르는 10분 정도의 시험에 틀린 사람에게는 숙제를 두 배로 부과했다. 그리고 잡담하는 다른 선생님과 늘 떨어져 앉아 우리들의 숙제를 교무실에서 꼼꼼하게 검사하곤 했다. 처음엔 숙제도 능력별로 내주었는 데 그건 그녀나 우리들이나 감당하기 힘든 방식이었다. 한 반에 60명이나 되는 과밀학급의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여러 번 숙제를 이행하지 못할 때에는 매로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때렸다. 그건 학기초에 맺은 우리들과의 약속이었다.

선생님의 매는 나날이 굵고 단단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또 그녀가 딱 한번 남선생들의 흉내를 낸 적도 있었다.

 "대가리 박아!"

 이른바 원산폭격이었다. 그러나 교활한 누군가가 슬쩍 쓰러지는 시늉을 하자 기겁을 하고 새파랗게 먼저 질린 건 그녀였다. 너무 쉽게 우리에게 아킬레스건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그녀는 매끈한 당구 큣대를 자신의 커다란 지팡이처럼 짚고 들어와 가늘고 흰 팔을 들어 힘겹게 우리들의 손바닥을 내리쳤다. 가끔 그러는 그녀에게서 제놀 파스 냄새가 솔솔 풍기기도 했다.우리들과 한 약속의 의무를 지키려는 안간힘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우리는 갈수록 숙제를 안 해 왔고, 쪽지 시험 땐 커닝을 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영어 선생님은 그녀의 온몸을 실어 내리치는 체벌로 우리를 응징했다. 그러다 보면 숨가쁜 45분 수업의 삼분지 일은 지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 시간을 워밍업 시간으로 즐기기까지 했다. 긴장이 풀린 채 자리에 앉아, 맞는 놈들의 표정을 감상하며 웃고 즐기는 것도 새로운 재미를 주었다. 엄살을 부리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일부러 웃기려 드는 녀석들이 늘어나면서 교실은 한판 굿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매라고 맞아 봐야 한창 나이의 남선생님들의 것에 익숙해진 상태라 오히려 그녀의 곁에 서서 손바닥을 내밀고 눈을 지긋이 감고 서 있노라면 매를 올려치는 겨드랑이께에서 나는 달짝지근하면서도 시큰한 냄새로 손끝에 저리는 통증도 기꺼운 쾌감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체육 반장 시켜요. 걔가 때리는 게 선생님이 때리는 것 보다 훨씬 아파요."

 맨 앞자리에 앉은 녀석 중 하나가 제 딴에 훌륭한 제안을 한답시고 말한 순간, 영어 선생님의 얼굴에 당혹과 자괴의 빛이 스쳤다.그 즈음에 들어 담임 선생님은 체육 반장을 시켜, "네가 내대신 얘네들 다섯 대씩 까라." 하고 자신은 귀찮다는 듯이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숙제를 안 해 오는 사람이 급기야 수십 명, 처음엔 눈치껏 하던 커닝도 반 전체가 툭 터놓고 하니 이상하게 배짱도 두둑해지고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무언가에 복수를 하고 있다는 쾌감도 들었다. 쪽지 시험이 결국 없어졌다. 그해 여름 우리가 몸소 체험한 건 집단의 힘에 대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위험한 깨달음이었다. 권위 의식도, 허위 의식도.그러나 미리 얘기하건대 나는그렇게 얻은 방종의 허무한 뒤끝을막연히 감지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파멸이 될 승산 없는 게임. 나 또한 집단의 흐름에 편승해 그들과 한 배를 타긴 했지만 배가 전복이 되고서야 그칠 싸움임을. 하필 그녀가 우리들 광기의 속죄양이 되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는 것을.

 그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당황했다. 아니 그녀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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