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라




손홍규








침대 옆에 매달린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최복남. 낯설었다. 하긴 어떤 시러베자식이 제 할아버지를 부르면서 최복남 할아버지라고 하겠는가? 그냥 할배, 할아배, 할아부지, 이렇게 부르지 최복남 할배, 최복남 할아배, 최복남 할아부지라고 하지는 않으니 할아버지의 이름이 낯설 만도 하다. 가끔씩은 내 이름조차 낯설 때가 있다. 너무나 익숙하고 분명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장막 저쪽으로 숨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아무리 애를 써도 과연 내가 그것들을 예전에 알고 있었는지 자신할 수가 없게 된다.
위대하신 의사 선생 한 분이 먹고 자고 하는 일이란 환자들 관찰하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그 결과를 글로 정리해 놓았다. 내가 그런 글을 찾아 읽게 된 건 할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진 뒤였다. 딱히 병명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당뇨, 신경성 위염, 고혈압, 악성 종양, 간경화, 신장결석, 전립선염 등등이며 마지막으로 무좀까지 덧붙일 수 있다. 무좀은 우연찮게 회진을 하던 주치의에게 발견되었으며 특별처방까지 받아 이제 거의 완치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할아버지가 쓰러진 건 신체적 이상보다 정신적 이상이 치명적인 이유였다. 아들 손자 며느리 얼굴 헷갈리기, 아들 손자 며느리 이름 헷갈리기, 대소변 헷갈리기가 병세가 악화된 뒤 나타난 증상이라면, 골방에 처박혀 있기, 밤중에 싸돌아다니기, 까닭 없이 울기, 벽보고 혼잣말하기 등등은 이전부터 나타난 증상이었다.
아무려나 그 의사가 관찰해보니,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다섯 시기가 있다.
1기는 부정기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일시적으로 부인하는 단계이며 현실감의 일시적인 상실을 특징으로 한다. 대개 사망선고를 받은 환자들은 의사에게 실력도 없는 돌팔이라 욕을 퍼붓는데, 이 경우라면 할아버지와 딱 들어맞는다.
주치의는 합병증으로 더 이상 손댈 수 없을 만큼 많은 병균이 할아버지의 몸을 잠식했으며, 신체가 허약해 각종 수술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 덧붙이기를 이 상태라면 얼마 못 간다는 것이다. 고지식한 아버지는 의사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할아버지에게 옮겼고,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회진시간이면 난리를 쳤다. 처음 몇 번 동안은 실패했지만 일주일째 되는 날 할아버지는 병실 문을 밀고 들어오는 주치의의 얼굴에 정확히 슬리퍼를 던져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발악이 진정될 즈음에야 처음 슬리퍼에 맞아 안경 코받이에 긁히면서 생긴 주치의의 생채기도 흔적이 사라졌다.
2기는 분노기다. 분노의 대상은 절대자이거나 사회 혹은 자신의 직업 같은 것일 수 있다. 이 경우라면 할아버지도 얼추 들어맞는다. 할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한 뒤로 자신의 오랜 친구들을 싸잡아 욕하기를 즐겼다. 할아버지에 따르면 밤나무골 김가, 자래등 황가, 댓골 송가, 상부 정가, 하부 문가, 구면 박가, 신면 배가 등등, 아직 살아있는 할아버지 연배의 모든 사람들은 벌써 죽어야 마땅한 놈들인데 하늘이 굽어살피사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는 버러지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 문병을 오면 손목을 꽉 잡고 너도 이제 곧 죽을 것이다! 는 저주 퍼붓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때면, 할아버지는 사회를 욕했다. 국가, 민족, 지역, 학교, 관공서, 우체국, 전화국, 철도청, 면사무소, 파출소, 군대 등등이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
3기는 협상기다. 이 즈음에 이르면 환자는 이성을 되찾는다. 주위 사람들은 환자가 무척이나 평온한 상태에 있구나, 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이 시기를 가장 환영한 사람은 주치의다. 슬리퍼에 곤욕을 치를까봐 매번 수련의를 앞세워 병실에 들어오던 돌파리(할아버지는 돌팔이를 똥파리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주치의는 ‘자애롭고 현명하신 우리 의사 선생님’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입에 발린 거짓말을 애절한 눈빛으로 하며 주치의의 손을 꼭 잡고 나를 가리키며, 저 녀석 장가가는 거라도 보고 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과연 내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할아버지는 원귀가 될 것인가? 물론 아니다. 할아버지는 내 핑계를 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3기는 할아버지에게 있어 음모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음모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당사자는 백 퍼센트 성공을 확신하므로 치매기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내가 장가드는 걸 보지 못 하는 게 할아버지의 원한이 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주치의는 할아버지에게 보기 좋게 속아넘어갔다. 내게 수습 간호사를 소개시켜 주며, 당분간 애인의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 간호사를 데리고 병실에 들어가 할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손주며느리감이라고 소개하며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죠 라고 묻자 할아버지는 발작을 했다.
4기는 우울기다. 치매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닫는 시기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주위의 모든 관계를 끊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주치의는 자신이 속은 걸 알고 그 간호사를 할아버지 병실 담당으로 옮겨버렸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틀림없이 손주며느리가 될 아가씨인줄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간호사가 들어올 때면, 내가 갈 때가 됐나 보다, 간호사가 손주며느리감으로 보이니, 라고 두 눈을 슴벅거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할아버지는 주위와의 관계를 끊기 시작했다. 물론 관계 청산이 칼로 무 자르듯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껍질 두꺼운 생나무를 비틀어 끊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할아버지는 머릿속에서 외상장부를 들춰 내게 하나하나 임무를 부과했다. 그래서 나는 밤나무골 김씨 할아버지에게 삼만 오천 원을 받아냈고, 자래등 황씨 할아버지에게 돈 대신 암탉 두 마리를, 댓골 송씨 할아버지에게 때묻은 지팡이를, 상부 정씨 할아버지에게 도포며 갓 등 의복 일습을, 하부 문씨 할아버지에게 돋보기를, 구면 박씨 할아버지에게 칠천이백 원을 받아냈다. 그리고 신면 배씨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그이가 손에 쥐고 있던 장죽을 빼앗아 어깨를 두 번 후려쳐 줬다. 이렇게 모든 빚을 청산했다고 알리자 할아버지는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태어나 남길 것 없이 갈 수 있게 되어 흡족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5기는 순응기다. 자신을 위해 충분히 눈물을 흘린 뒤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다. 하지만 단언컨대, 할아버지에게 5기는 없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4기를 지났으니 분명히 5기가 도래해야 하건만 할아버지는 1기로 되돌아가서 다시 부정하기 시작했다. 주치의는 무방비 상태로 병실에 들어오다 슬리퍼에 얼굴을 맞아야 했고, 셈이 잘못 됐다고 찾아 온 구면 박씨 할아버지는 오히려 천사백 원을 더 내놓고 가야 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할아버지는 5기를 건너뛰고 1기로 회귀했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 최복남이라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흘릴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러자니 낯설고 당황스러울 게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 병원으로 오는 중이다. 자칫 나 혼자 임종을 지키게 될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의 말라붙은 검은 얼굴 가죽이 손으로 쓸어 내리면 떨어져 나올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몸을 비틀었다. 나는 주치의의 멱살을 잡고 모르핀을 더 많이 투여할 것을 요구했다. 차라리, 이렇게 갈 바에야 고통 없이 보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모르핀이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거부의 고갯짓을 했다. 할아버지는 평소에 사람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모르핀이라는 말에 강한 거부의 뜻을 나타내자 드디어 인간 최복남이 평소 소신대로 의연한 죽음을 맞이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그걸 장렬한 죽음이라 불렀다. 죽음에는 오직 두 가지 형태만이 있을 뿐이니, 그 하나는 장렬한 죽음이요, 나머지 하나는 장렬하지 못한 죽음이다.
그러다 퍼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할아버지가 죽음을 대비해 둔 건 아닐까. 언젠가 할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한바탕 치도곤을 치른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오랜 지우 가운데 한 분인 김상남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였다. 할아버지는 무려 칠 년 동안을 김상남의 현신을 찾아다녔다. 그렇다고 딱히 팔도를 누비고 다닌 건 아니다. 그저 쉬엄쉬엄 바깥 나들이를 하는 김에 조무래기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할아버지는 자래등에서 김상남의 현신을 만났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나이를 물었고, 아이는 두 손바닥을 펴서 손가락 세 개를 접었다. 할아버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상남아! 라고 외쳤고 일곱 살짜리 아이를 끌고 주점을 겸한 마을회관에 들어가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그 아이의 부모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구역질을 하는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고, 할아버지는 뻔뻔스럽게도 그 아이의 얼굴 선이 김상남을 빼다 박았다는 말로 변명을 했다. 아이의 부모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할아버지는 술 취해 찾아 온 아이의 삼촌에게 된통 얻어맞아 한동안 운신을 못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그 아이가 김상남의 현신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할아버지의 이런 믿음은 자신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어떤 때는 자신은 분명히 모 재벌의 증손자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 예언했으며, 어떤 때는 대통령의 손주며느리에게 태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고 다녔다. 아무튼 할아버지는 다음 생에서 어떤 삶을 누릴 것인지 상상하는 게 무척이나 재미있는지 자꾸만 예언을 바꿨는데 그 중에는 내 자식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생에 자신의 할아버지였을지도 모르는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저주 가운데 가장 끔찍한 저주가 아닐 수 없다. 그게 내가 결혼을 기피한 이유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할아버지의 예언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런 소리를 듣고도 태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말로 누군가의 집안에 환생하고 난 뒤에 결혼해도 늦지 않으리라 여겼다.

이제 할아버지는 도지개를 틀며 몸부림을 쳤다. 부디 환생하신다면 좋은 집안을 골라, 평생 아무 걱정 없이 배 두드리고 살며, 재수 없고 기분 나쁘고 억울하고 한심하고 속 터지는 일 없이 똑같은 조건의 배우자 만나 두꺼비 같은 아들에 백설기 같은 딸에 올망졸망 딸린 손자 손녀에 둘러싸여 명주실처럼 길고 질긴 수명을 이어가시라!
나는 멱살잡은 손을 풀고 의사를 놓아주었다. 할아버지가 죽음에 대한 대비가 있어서든, 잠깐 정신이 나가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마음먹었든, 어차피 이제는 그른 일이었다. 내 역할은 아직 병원에 도착하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에게 할아버지의 장렬한 죽음을 본 대로 충실히 전하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좁고 툭 튀어나온 이마, 그 이마에 굵게 그어진 여섯 개의 주름, 짧고 굵은 눈썹, 푹 꺼진 눈, 턱에 붙은 염소 수염, 게다가 어디 한 군데 빈틈없이 새까만 살가죽.
나는 할아버지의 장렬한 죽음을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눈에 너무 힘을 줬는지 눈물이 나려했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활처럼 휘어진 등이 푹 꺼져 내리며 반대로 두 발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발바닥을 눈앞에서 보았다. 그건 발바닥이 아니라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논바닥이었다. 무좀은 거의 치료가 되었기 때문에 표면이 우둘투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운데 발가락 아래서 발바닥 가운데로 쭉 그어진 골과 그 골에서 가지로 뻗어나간 주름은 산맥을 연상시켰다. 골짜기가 아닌 산맥을 연상한 이유는 주름과 주름 사이 툭 튀어나온 가죽들 때문이었다. 발바닥 가운데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주름과 그 주름들을 가로지르는 상처. 저 상처.

국민학교 4학년 운동회 날이었다. 그때도 할아버지는 지금과 별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린 하얀 모시옷과 전날 초상집에서 얻어 와 방금 포장 비닐을 뜯어 꿰어 신은 하얀 고무신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반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뚝과 깃 위로 솟아오른 목덜미며 고무신 위로 드러난 발등은 검다 못해 어둡기까지 했다. 하얀 색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그 까만 피부들은 환갑에 다다른 노인에게 여전히 강건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할아버지의 얼굴이 압권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왜 한자는 석 삼을 넘어가면 모양이 달라지는지 궁금했다. 줄을 하나 그으면 한 일, 두 개 그으면 두 이, 세 개 그으면 석 삼인데 왜 넷부터 모양이 달라지느냐 이거다. 할아버지는 만약 고대인들이 줄 긋는 수고로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분명 여섯 육을 뜻하는 한자를 이마에 박아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할아버지의 좁은 이마에는 여섯 개의 굵은 주름이 촘촘히 그어져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워낙 까맣게 타버린 얼굴이라 얼굴을 마주 대하고도 눈살을 찌푸려가며 세지 않는 한 정확히 여섯 개라는 사실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 가을 운동회 때 나는 백군이었다. 바야흐로 운동회는 막바지로 접어들어 이어달리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달리기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는 누가 뭐라 해도 희수 형이었다. 희수 형은 한 동네 사람이다. 희수 형은 홀어머니 아래 다섯 남매 가운데 맏이었으며, 늘 동생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무, 당근, 오이, 호박, 고추, 감자, 옥수수, 고구마 따위를 잽싸게 낚아채고 캐고 따고 얼싸안고 손에 쥐고 바람처럼 도망가야 했다. 재빨리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면 단거리에 능해야 했고, 다른 곳으로 원정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장거리에도 능해야 했다. 희수 형은 추수 끝난 들판에서 야구를 할 때 2루타 성 안타를 치고도 뛰어서 홈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희수 형은 백군이었고 나는 백군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이미 희수 형은 백 미터 달리기에서 우승을 해 최고의 몸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어달리기가 시작되고 각각 네 명의 주자 가운데 첫 번째 주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저 멀리서 사금파리가 반짝이는 걸 보았다. 그건 학교를 끼고 지나는 일 번 국도를 달리는 차에 반사되는 빛이 아니었다. 나는 그게 할아버지의 눈빛일 거라고 여겼다. 나는 인디언을 흉내낸 차림으로 수탉처럼 목청을 드높여 승리를 외치고 있었다. 백군의 두 번째 주자가 바통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청군과 이십여 미터의 거리 차이가 났다. 청군은 백군이 바통을 떨어뜨리는 순간 들쑤신 벌집의 벌떼처럼 왕왕거렸고 벌써부터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듯 기쁨에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백군에는 희수 형이 있다. 마지막 주자인 희수 형은 쪼그려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희수 형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군의 마지막 주자는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희수 형은 백군의 세 번째 주자를 마중 나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여전히 청군과 백군의 차이는 이십여 미터. 희수 형은 바통을 받자마자 말처럼 뛰쳐나갔다. 그때 누군가 쏜살같이 스탠드에서 달려 내려와 희수 형 쪽으로 달려갔다. 앞선 주자들은 운동장 반 바퀴만을 돌았지만, 마지막 주자는 한 바퀴를 돌아야 했다.
백군 청군, 스탠드에 몰려 있는 가족들, 조회대 근처에 몰려 있는 선생님들, 누구랄 것도 없이 아직은 그 미지의 주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미지의 주자가 희수 형 뒤꿈치를 바싹 따라붙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희수 형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뒤쫓는 사람이 최복남이라는 걸 알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석회 가루로 그은 달리기 선 앞까지 달려나와 손사래를 쳤지만 할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희수 형은 반 바퀴 째에 이미 청군의 마지막 주자를 제쳤다. 하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할아버지도 청군의 주자를 앞질렀다. 이제 승부는 청군과 백군 사이에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라 희수 형과 할아버지 사이에서 결판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할아버지가 희수 형과 엇비슷한 달리기 실력을 지니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초가을 하늘은 높푸르렀고 조각난 구름 몇 점이 한가롭게 떠 있었다. 교사校舍를 타고 넘어 온 바람이 운동장으로 곤두박질쳤으며, 계집애들의 갈래머리를 흔들다가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다가 가벼운 먼지를 날리다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희수 형과 할아버지가 달리는 경주로에는 뿌옇게 먼지가 일었고 그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희대의 명승부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더욱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할아버지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데굴데굴 굴렀다. 구경꾼들이 날카로운 탄성을 내질렀다. 무언가에 발바닥을 다친 모양이었다. 그 사이 희수 형은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맹렬한 기세로 희수 형을 뒤쫓았다. 두 명의 선생님이 결승선으로 나가 하얀 테이프 양쪽 끝을 쥐고 섰다. 저 앞에서 희수 형이 바통을 마치 감자나 고구마 혹은 옥수수, 무, 당근, 오이, 애호박, 고추라도 되는 듯 꽉 쥐고 달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그 뒤를 바투 쫓아오던 할아버지가 결승선 스무 걸음을 앞두고 희수 형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할아버지의 하얀 머리칼이 바람 부는 날 갈대처럼 일제히 뒤로 흩날렸고 깊게 파인 눈에서는 사나운 눈빛이 장대처럼 곧게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나는 빅토리를 외쳤는데, 그냥 빅토리가 아니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힘주어서 브이, 아이, 씨, 티, 오, 알, 와이, 라고 외쳤다. 그러나 희수 형이 조금 빨랐다. 희수 형은 마지막 다섯 걸음에서 한 걸음을 앞서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그리고는 허방을 짚듯 몇 걸음 더 가다 푹 고꾸라졌다. 그때 잠시 엿본 희수 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건 공포를 느낀 자의 얼굴이었다.
할아버지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질주해서 교문을 통해 나가버렸다. 할아버지가 교문으로 질주하는 동안 그곳에 우세두세 몰려있던 사람들은 좌우로 쫙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주었고 백군은 승리의 기쁨을, 청군은 패배의 슬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사람들이 백군의 승리를 알리는 교장 선생님의 하얀 깃발이 올라가자 일제히 우우우 떠들기 시작했고, 그때 두 사람이 교문으로 달려갔는데, 그 사람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다.
그 탓에 나는 운동회를 마치고 아버지가 들고 어머니가 이고 온 찬합이며 대자리며 물통이며 한 보따리를 끙끙거리며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희수 형과 함께였는데, 희수 형은 내내 우울한 표정이었다.
형, 왜 그려? 형 땜에 백군이 이겼잖어?
희수 형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긴 게 아녀, 난 진 거여. 너그 할아버지 말여, 맨발로 뛰었어야. 나는 체육선생님이 사 준 운동화를 신고 뛰었는디 말여. ……내가 진 거여.

그날의 상처가 영원처럼 내 눈앞에 있었다. 최복남의 발바닥은 허공에서 그렇게 잠깐 멈추었다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아니, 무어라 외치기는 했다. 으악, 혹은 아아, 혹은 이놈, 혹은 저놈, 아니 솔직히 말하면 씨발이었다.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씨발!이라 외치며 장하고도 렬하게 돌아가셨다.
나는 당신이 운명하기 전에 꼭 물어보고 싶었다. 가을 운동회 때 왜 뛰었는지, 미친 듯이 희수 형의 뒤를 쫓아 달려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그냥 교문으로 달려가 버렸는지, 이미 오래 전 일이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내 가슴에 앙금을 남기고 가지는 말아주기를 바랐다. 이제야 깨달은 거지만, 운동장을 달리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왜 그리 서글퍼 보였는지, 세상의 모든 쓸쓸함과 공허함을 짊어진 채 그 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듯 애달프게 뛰었는지, 가르쳐 주세요! 삶이란 이해되거나 이해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 따위는 제발 하지 말고요.

나는 여전히 그해 가을 운동회에서 할아버지가 왜 미친놈처럼 격렬하게 달려야 했는지를 모르고 있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아무도 몰라.







손홍규1975년 전북 정읍 출생.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소설집으로 [사람의 신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