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명 - 김지하 시인께

1.
흙에서 나서 흙 속에서 흙발로만 팔십년을 살아온 어머니 무쇠솥단지 속을  씻어낸 뒤 뜨건 허드렛물 탱자나무울타리에 찌끌면서 땅 속 뭇 생명들에게 “눈 감아라 눈 감아라” 신신당부하지요

2.
그 어머니, 이른 봄 동틀 무렵 독자갈이 드글드글한 조계산자락 뙈기밭에서 자라나는 연둣빛 참깨 새순 밑둥치를 싹둑 잘라먹는 새끼손가락만한 벌거지 어시미를 날선 호미로 모지락스럽게 내리찍어 두 동강 내면서 “이놈의 어시미 이놈의 어시미” 노여움 내뱉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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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말부터 생명의 소중함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19~20세기 산업화 혹은 근대화를 거치면서 지나치게 개발 중심으로 내달려온 물질중심의 자본주의가 지구환경과 인간본성에 돌이키기 어려운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동학의 시천주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에서 나는 자꾸만 갈증을 느낀다. 그리고 20세기말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오고 있는 환경운동과 농업찬양(?)과 귀농 및 생태순환 등을 중시하는 제반의 녹색운동에서도 나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끝없는 갈증을 느낀다.

종교적 이상, 문학적 낭만주의와 인간의 현실 사이에는 참으로 아득하게 먼 거리가 존재한다. 과연 인간이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생활을 성스러운 것으로 /'/생활의 성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존재들인가? 과연 낭만적인 문학작품 속이 아닌 이 땅의 현실에서 인간의 개과천선이 가능한 일이던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치국평천하=수신제가/'/가 상호보완 소통의 이치라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는 척하면서 개개인들의 수양의 전제를 강변하는 사람들의 논리의 한계는 무엇인가? 그들이 강변하는 생명존중과 수 세기 전부터 자연으로 돌아가자던 인텔리적인 계몽운동가들이 주창하던 생명존중은 대체 누구를 위한 생명예찬인가?

자본주의 산업화에 따라 지구와 인간 본성이 심각하게 파괴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어둠이다. 그래서 소위 /'/탈근대/'/가 21세기가 요청하는 시대적 과제임에는 틀림없는데 이 과제를 비폭력무저항주의로, 인텔리적인 계몽과 종교적인 깨달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가? 인간이 그렇게 단순명료하고 소설에서처럼 개과천선이 가능한 존재들이던가? 지나치게 이상적이지 않는가? 문학인들의 /'/우뇌/'/ 속의 낭만적인 인간과 현실 속의 인간은 천양지차가 아니던가? 

빛과 그림자가 양면을 이루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듯 자본주의의 위와 같은 어둠의 이면에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자주적 인간으로 설 수 있게 한 밝은 면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다. 문제는 인간을 비롯한 뭇 생명체들은 끝없이 이타적인 존재들인가 하면 한편으로는 끝없이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존재라는 점이다. 이렇듯 복잡한 인간들을 계몽과 깨달음만으로 그 물질적 욕망과 이기적인 본성을 제어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시인들의 낭만적인 꿈과 우리 앞의 현실은 명백히 다르다. 시인들의 낭만적인 꿈이야 영원해야 하지만 그것을 현실과 자주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심각한 정신병이다. 지금 기독교 불교 흰두교 등등 이 땅에 생명을 중시하는 종교인들이 모자라, 그 각성이 부족해서 세상에 폭력이 난무한가?  

오늘도 제국주의자들은 자기들의 패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끝없는 군비경쟁을 벌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또 다른 인간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이 참혹한 현실 앞에서 계몽과 깨달음을 무기로 21세기의 새로운 인류의 희망을 열어갈 수 있는가? 보라, 제국주의 패권국가들은 자기 생명 연장을 위해 군비를 한없이 증액하면서 자기들의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들의 무장을 저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고 있다. 자기들 패권의 영구화를 위해서, 뭇 생명들에 대한 폭력의 영구화를 위해서.
한편, 우리들의 분단된 조국은 각기 다른 토막으로 나뒹굴고 있다. 한쪽은 종기가 곪을대로 곪아서 터지기 직전이고, 한쪽은 간도 쓸개도 다 썩어문드러져 심장이 곧 멎을 지경이다.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새만금 갯벌의 조개들과 천성산의 도롱뇽들의 목숨을 걱정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그 선후가 온당한가를 묻는 것이다.

커다란 폭력의 근원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작은 생명 구하기에 몰두하는 것만으로 과연 이 지구상에 생명의 꽃잔치를 펼칠 수 있는가? 종교적 깨달음을 통해 인텔리적 계몽활동을 통해 21세기 지구상에, 이 참담한 한반도에 생명의 꽃잔치를 활짝 펼칠 수 있는가?
아직 한반도의 역사는 뜨거운 수혈이 더 필요한 것 아닌가? 한반도의 수많은 여린 생명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수혈을 기다리고 있잖는가? 해방전후 선배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우리는 지난 60여년 생명을 유지했다고 말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그 선배들의 피를 우리 몸을 통해 피마른 후손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현실적으로 개과천선이 불가능한 인간이므로 그렇게까지는 못한다면... 큰 폭력에는 애써 눈감고 침묵하면서 큰 폭력의 근원을 없애기 위한 작은 폭력을 침소봉대하는 그 얄팍한 노름은 거둬치워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자기기만적인 행위가 결과적으로 수많은 생명을 유린하는 보다 큰 폭력의 배후가 된다는 것을 대체 왜 모르는가. 정말 몰라서 그러는가?  

지극히 룸펜적인 생명존중의 겉멋을 버리고 현실 속에서 참된 생명의 소중함을 진심으로 깨닫고 그것을 위한 실천의 길을 다함께 모색해나가야 할 때다. 한국 근현대사, 피어린 갑오년의 동학농민전쟁의 근원부터 찬찬히 따지고 공부해야할 일이다. 늦이 않았다 아직은,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역사는 늘 지금 여기인 까닭이다.  

제국주의자들의 군비경쟁이나 저 폭력적인 내 나라와 세계각지 통치자들의 행동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벌이는 그 어떤 생명운동도 자치운동도 그 어떤 생명평화결사도 모두 껍데기요 사기다. 자기기만과 허위의식 이젠 걷어치워라!! 생활인인 민중들은 인텔리들의 사기성 짙은 행각을 온몸으로 간파해내는 감각기관을 지니고 있다. 인텔리들이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지금 자기 안의 허상과 헛된 이상에 사로잡힌 우리 주변의 영혼들에게 찬물이라도 뒤집어씌워서 잠을 깨우는데 나서야 할 때인 듯 싶다. "껍데기는 가라" 절규했던 <금강>의 시인이 그립다.

참된 생명에 대한 깨달음은 수운 최제우의 13자 주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인텔리들이 아닌 생활인인 민중들에게는 13자 주문은 그저 그림글씨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 참된 생명의 이치는, 지금도 6자회담이라는 괴물이 어슬렁거리는 우리 한반도의 참담한 현실 속에 있다. 삶이 한 생명이듯이 죽음 또한 한 생명이다... 피가 모자란다 피가 모자란다 피가 모자란다


-- 문병학 : 1989년『노동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는 꽃 뒤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