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유신독재의 울울창창한 유산들
                              시월유신 40주년에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올해 2012년은 ‘유신정변’ 40주년이 되는 해다. 종신대통령 박정희가 1972년 10월 17일 유신정변을 일으킨 때로부터 40년이 흘렀다. 40년이라는 기간은 그리스도교의 성서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난의 기간이기도 하고, 속죄와 보속, 완성과 완결을 상징하는 숫자로서 ‘40’은 정화와 구원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유신 40주년 시국미사’가 10월 22일 저녁 7시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유신’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평생 동안 일본을 흠모하며 살았던 박정희가 1868년의 일본 ‘명치유신’을 모방한 용어였다. 그리고 일본의 명치유신은 한국을 침략하고 병탄하는 일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창안자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척살되었다.

일본 명치유신을 모방하여 1972년 유신정변을 일으키고 종신대통령이 되었던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이승을 떠났다. 일본 명치유신의 핵심이며 당사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척살된 날로부터 꼭 70년 후 같은 날이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엄혹하고도 무시무시했다. 한마디로 공포정치의 실체였다. 히틀러의 나치독일, 스탈린의 소련, 일본의 조선 침략시기의 살벌했던 모습과 똑같았다. 당시 박정희는 초법적 존재였다. 그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유신헌법 좀 바꿨으면 좋겠다는 청원 한마디만 해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하루 24시간 내내 전화도청, 미행, 감시, 연금에다가 연행과 납치가 마구 자행되었다. 박정희 한 사람만 자유를 만끽하고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다.

▲22일 저녁 7시 ‘서울광장’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유신 40주년 시국미사’에서 유이규 신부(작은형제회)가 사제단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전태일 노동청년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항거했다. 고등학교 시절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여 어렵게 입학한 대학에서 묵묵히 공부만 하면 미래가 보장되었던 대학생 청년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감옥 가기를 주저하지 않고 거리로 나섰다.

수많은 노동자, 대학생, 시민들이 평범한 한 인간으로, 그리고 민주주의의 구성원으로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철권 통치자 박정희는 민주시민들의 그 꿈과 소망을 두려워하며 애써 무시하고 억눌렀다.

결국 박정희의 철권통치는 1979년 10월 ‘부마항쟁’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부마항쟁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여론을 파악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민심이 떠나 있음을 확인하고 박정희에게 완화정책을 건의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그 까짓것 문제없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이상을 없애버렸는데 우리나라에서도 100~200만 명만 제거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박정희는 “그래 맞아. 자유당 이승만 시절에는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이 발포 명령을 하여 처형당했지만 지금은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릴 텐데, 대통령인 나를 누가 어쩌겠어”라고 화답했다.

이 말을 들은 김재규 부장은 너무도 놀라 “이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생각하며 유신독재의 핵 박정희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10월 22일 저녁 7시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유신 40주년 시국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수도자들과 신도들

박정희의 비극적 종말은 유신의 몰락을 가져오는 듯했으나 곧바로 엄청난 부작용과 후유증을 남겼다. 계승자 전두환의 12·12쿠데타와 5‧17정변과 광주학살에 이은 폭압정치가 8년이나 이어졌다. 박정희의 18년 독재와 전두환의 8년 폭압 통치는 두터운 기득권층을 낳았고, 강고한 추종자들을 양산했다. 그리하여 유신독재의 잔재와 유산은 오늘도 우리 사회에 울울창창한 형태로 존재한다.

유신독재의 유산 중에서도 가장 강고하면서도 울울창창한 것은 박정희에 대한 ‘향수’다. 또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곧바로 ‘경제발전’이라는 수사로 연결된다. 박정희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제발전이라는 것 하나로 박정희와 유신독재 전체를 분식하고 합리화하려 한다. 박정희 덕분에 먹고 사는 줄은 모르고, 등 따습고 배부르니까 박정희를 비판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한다.

나 역시 경제발전과 관련하는 박정희의 공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오로지 박정희의 독재 덕분이라는 논리에는 찬성할 수 없다. 박정희 덕분이라는 말 속에는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나라가 절대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는 위험한 견해까지 내포되는데, 그런 함의에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다.

그런 견해는 우리 민족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짓이다. 저 일제의 식민지교육으로부터 연유하는 자기 모멸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으로 노예근성과도 연결되는 것임이 자명하다. 그들은 그처럼 노예근성 안에서 박정희를 미화하고 찬양하기 위해 우리 민족 전체를 매도하고 부정하는 셈이다.

어느 정도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의 잣대로 유신시대를 말한다며 흥분하는 사람도 보았다. 70년대 그 시절에는 독재가 필요했다는 괴상한 논법이다. 나도 60년대에 청소년기를, 7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사람이지만,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온 몸으로 체감하면서 그 시절에도 지금과 똑같은 잣대로 박정희를 보았다. 거기에서 갖게 되는 고독과 괴로움이 실로 컸다. 오늘의 잣대로 박정희를 재단하지 말라는 사람의 말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처절하게 투쟁하며 희생했던 민주투사들과 민주시민들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다.

▲‘유신 40주년 시국미사’를 거행하기 위해 ‘서울광장’ 제대 앞으로 입장하고 있는 천주교 사제들

지난달 29일 백화산 ‘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 앞에서 거행된 제22회 추모제 후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는 또 한 분에게서 특이한 언사를 들었다. 박정희가 일본 천황에게 충성서약 혈서를 쓰고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장교였다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일제 때 친일파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었느냐는 해괴한 말이 그에게서 나왔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충성하고 봉사하며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 외로, 어쩔 수 없이 식민지 백성으로 살며 슬픔과 고난을 겪어야 했던 절대다수 국민을 모조리 친일파로 만드는 무지무식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사’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는 또 그의 입에서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한데 왜 그렇게 과거사에 얽매이느냐는 말이 나왔다. 과거사 문제는 아예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는 그가 동학농민혁명군 추모 행사에는 왜 나왔는지, 집에서 제사는 왜 지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도 어안이 벙벙하여 말문이 막혀버린 내 뇌리에 나치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 200만∼400만 명을 살해했다는 저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의 첫 번째 전시장 벽에 걸려 있는 글귀가 불현듯 떠올랐다.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12.11.08 11:40l최종 업데이트 12.11.08 11:40l
태그 : 시월유신, 이토 히로부미, 김재규, 명치유신,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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