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책소개>

대지의 중심에서 뽑아낸 생생한 육성

차승호는 들판의 시인이다. 들판의 장남인 그는 세상 모든 뿌리의 근원을 들판에서 찾고, 들판에서 시작되고 사라지는 생명의 서정과 서사를 구현하는 데 온전히 시력을 바치고 있다. 첫 시집 ‘즐거운 사진사’부터 이번 세 번째 시집 ‘소주 한 잔’에 이르기까지 줄곧 들판에 꽂혀 있는(?) 그의 시세계가 궁금했다.

“태어나고 자랐으나 떠나온 곳, 그러나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언제든 돌아가야 할 곳이지요. 그곳에 있을 때 저는 가장 따듯하고 편안해요. 들판은 어머니이자 아버지이고, 아무리 퍼 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영혼의 고향이지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일만 해도 목이 마른데, 그들을 저버리고 이제 그만! 하고 멈출 수 없는 거죠. 죽을 때까지 제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차승호는 홀연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온 그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도심에 살고 있다. 지금은 멀리 부산에서 일터를 잡고 있는데, 당진 가까운 대전역에 닿기만 해도 귓속에 다가오는 고향말의 정겨움과 익숙함에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한다.

최근 편향적인 잣대로 읽히기 쉽다는 이유로 방언의 구사를 지향하고 있는 시류(詩流)에 흔들림 없이 그가 끈질지게 충청도의 방언에 천착하고 있는 연유이다.
그가 농투성이들의 삶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차용하고 있는 방언과 비어는 너무도 생생하다. 일생 흙 속에 파묻혀 씨 뿌리고 거두는 것을 천직으로 삼아 온 들판의 자식들. 그들의 애환과 점점 소외되어 가는 농촌 정서를 능청과 해학으로 버무려내는 솜씨는 가히 탁월하다. 울고 웃으며 그의 시를 읽다 보면 표제처럼 ‘맑은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어진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선이 도심에서 농촌을 바라보는 관념과 추상 너머에 있다는 데 주목해야겠다. 대지의 생명을 일깨우는 노동의 육체성과 진실성을 심신을 다해 모시고 발아시키는 마음이 시집 전편에 가득하다. 그 자신 생명의 장소이자 기원의 장소인 저 들판이 살아 꿈틀거리는 한, 그는 들판에 깃발을 꽂은 들판의 시인으로 살아가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 같다.

해설을 쓴 박수연 평론가는 “언어의 미끄러짐이 강조되는 시대에 소리의 맥락 속에서 시를 사유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부재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또 다른 의미에서 드러내는 시적 전략이다. 차승호는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 이전을 통해 그 이후를 상상하는 발빠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승하 시인은 “사투리와 순우리말을 이렇게 잘 구사할 줄 아는 차승호 시인이기에 백석처럼 지방색을 넘어 오히려 보편성을 띨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말했다.

<책 속에서>

들판에서 불린 몸 빼내어
추수 끝나고 묵은 때와의 한판
목욕탕 수돗가로 걸어가니, 후미진 끄트머리
귀밑머리 길게 길러 정수배기 쪽으로
쓸어 넘기고 쓸어 넘긴 사내
중방리에서 대대로 농사짓는
아는 얼굴의 사내
칫솔로 염색약 찍어 거웃을 물들이고 있네
나이 들면 거기도 허옇게 세는가
투박한 사내의 손길을 따라
천년의 우물가 물먹은 돌이끼처럼
새까맣게 일어서는 거웃
나날이 변방으로 밀려 황량해진 들판에
씨 뿌리듯 모내기하듯
사내의 눈빛 참 진지하네
한 올 한 올 염색약 칠해가며 사내는
들판의 부활을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자꾸 쳐다보는 내 눈길 의식한 듯해
어물쩍 선수를 치네
농사꾼은 워디가도 표난다니께
정성들여 가꿨으니 안사람이든 들판이든
한 십년 찍어누르는 건
일도 아니겄구먼그류

―｢거웃을 물들이는 사내｣ 전문

<추천글>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 그예 후후후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웃다가도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구어체의 능수능란한 구사, 탁월한 유머 감각, 농투성이들의 애환을 보듬을 줄 아는 능력, 세류리의 인정과 세태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 농촌이 처한 현실에 대한 뼈저린 성찰, 무너진 농정에 대한 비판의식……. 보령이 낳은 소설가 이문구의 뒤를 이을 사람이 당진에서 났다. 사투리와 순우리말을 이렇게 잘 구사할 줄 아는 차승호 시인이기에 백석처럼 지방색을 넘어 오히려 보편성을 띨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오늘날 우리 시단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 시를 쓰고 있기에 차 시인은 더욱 알차게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리라.
_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삽교 방조제에서 서해와 만나는 강물은 아지랑이나 실핏줄이나 간지러움, 밥 짓는 연기처럼 능청능청 휘어져 그 강물을 따라 논두렁 밭두렁도 휘어져 흐르고 옛살라비 기둥뿌리도 풀잎도 나뭇가지도 지렁이의 오체투지도 산 그리메도 골목길과 고샅길과 눈보라와 비바람도 휘어져 흐르고 사람의 길과 짐승의 길도 마을로 접어들수록 산에서 내려올수록 느리게 느리게 휘어져 깎이고 바람도 구부러져 흐르고 구름도 허리 굽혀 흐르고 별도 달도 둥글게 둥글게 이즈러지고 할아버지 할머니 묏뿔도 구부러져 엎드려 있고 어머니 아버지 주름살도 억새만큼 휘어져 눈부시고 물안개 낮은 파도 찢어지면서 굽이치고 말도 글도 그대 마음도 한량없이 휘어지고 구부러져 흐르고 흐르니, 명천 선생은 가셨으나 그의 노래는 이렇게 남아 웃고 있으되 울었고 울고 있으되 끝내 웃고 말았구나.
_유용주(시인)

<시인소개>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으며 2003년 시집 <즐거운 사진사>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문학마당' 신인상을 받았으며, 시집 <즐거운 사진사>, <들판과 마주서다>가 있다.

<시인의 말>

열정은 엷어지고 갈 길은 멀다.
선배 시집 자서에서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똥폼(?)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이 말의 무게가 비로소 와 닿습니다.
투박한 손, 곰발바닥 같은 손을 가진 농투성이 앞에 서면 늘 부끄럽습니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 본 적도 없으면서 들판을 노래한다는 것 또한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농투성이 자식으로서 솔잎을 먹으며, 좋은 시를 쓸 때까지 먼 길 가겠습니다.

2009년 사월 마당을 나서며
차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