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남일의 네 번째 소설집 [산을 내려가는 법]
(실천문학, 2007년 8월 7일)


1983년 등단 이후 줄곧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 서서 문학적 실천을 모색해온 작가 김남일이 십 년 만에 네 번째 소설집을 펴냈다. 간결하고 단정한 문체로 쓰여진 9개의 단편 속 인물들은 개인과 사회의 역학이 맞닿는 부분에서 상처를 입은 뒤, 남루한 생의 기억을 덮어버린 채 지난한 삶을 영위한다.

이미 사반세기가 지난 베트남전의 후유증, 사북의 기억, 분단과 머나 먼 팔레스타인 땅의 전쟁, '망' 하나만 망가져도 엄청난 혼란에 빠질 기계문명 등, 이 소설집이 소재로 다룬 사회 문제들이 여전히 과정 중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김남일 1957년 경기도 수원 출생. 한국외대 네덜란드어 전공. 1983년 「우리 세대의 문학」에 단편 '배리'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제1회 전태일문학상(보고문학 부문), 제2회 아름다운 작가상 수상. 2007년 현재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청년일기>, <국경>,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장편동화 <떠돌이 꽃의 여행>, 소년소설 <골목이여 안녕>, 청소년 인물이야기 <통일할아버지 문익환>, 산문집 <책> 등이 있다.

::책 속에서

보이나니, 오직 사람들의 물결과 그들이 찾아 들어갈 빌딩과 오피스텔과 아파트뿐이었다. (육중한 콘크리트 더미 아래서 땅은 얼마나 아플까!) 저 무수한 세인이 호모사피엔스의 이름으로 꾸역꾸역 생을 영위해나간다는 것을 생각하자니, 스프 없는 라면이 라면에는 원래 스프가 없다는 듯 뻔뻔하게 유통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처연히 구가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자니, 눈물이 마를 겨를이 없었다.

- '오생의 부활' 중에서

피디가 의욕에도 불구하고 잘못 짚은 게 하나 있었다. 그건 곰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 정말 문제는, 곰이 다른 누구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하루하루 잘 살아보려 애를 쓰고, 아이하고 놀러가고, 동료들과 어울려 저녁내기 사다리를 타는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언제 어떻게 갑자기 야만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것.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일상에 대한 감시를 늦출 수 없다는 것.

- '한밤의 음악편지' 중에서



::작가의 말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산을 얼마나 높이 오르느냐 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잘 내려가느냐 하는 것이리라. 왜, 그렇지 않은가, 고산 등반 중 상당수가 하산 때 사고를 당한다고.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아마다블람에는 꼭 오르고 싶다. 올라서는 무얼 할까? 모르겠다, 아마 한바탕 울겠지. 그런 다음엔? 글세, 그걸 확인해보기 위해서라도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뒤늦게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닌 모양이다. 생의 고도가 얼마나 되는지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십 년 만에 내는 소설집이라 두서가 없다. 의미를 잃은 기억들처럼.
그래도 책을 받아들면 구례 시외버스터미널 옆 포장마차 '어부의 집'에 가서 밤새 술을 마시고 싶다.
곁을 지켜준 벗들에게 두루 고마울 따름이다.
고향 같은 실천문학에서 처음으로 내는 책이라 더욱 소중하다.

2007년 7월, 강원도 홍천에서 - 김남일


::추천글

김남일의 이번 소설집은 바로 그 '길 아닌 길' 앞에 서 있다. 물론 새로이 생성되는 길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에 만난 툭체 가는 길. 세상에서 제일 깊다는 칼리간다키 계곡의 연녹색 강물. 티베트 라싸를 떠나 여신 초모랑마를 보며 베이스캠프를 찾아 내려오던 눈보라 속의 지워진 길. 그리고 망각을 구가하는 세월에 포위된 채 오생이 걸어가는 시대착오의 안간힘까지. 그러나 희박한 대기 속 고원의 길 찾기는 아직 "산을 내려가는 법"까지 기억의 육체로 만들진 못한 듯 보이며 오생의 최후와 부활은 궁벽진 풍문의 운명을 한동안은 더 살아야 하는 듯싶다. - 정홍수 (문학평론가)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더는 뒤돌아보는 것도 속절없을 때가 있다. 세월이 가져가는 것은 시간이나 청춘뿐 아니라, 내가 믿었던 '말'의 소멸이기도 하다. 아름다움, 희망, 믿음, 사랑, 설레임! 세월의 저편에서 그토록 빛나던 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김남일의 소설 속에는 지나간 말들을 발견한다. 열정, 고통, 뜨거움, 숨이 숨과 만나 가빠지는 호흡, 그리고 다시, 사랑... 뜻밖이다. 김남일에게는 아직 지나간 것이 없다. '산을 내려가는 법'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산을 오르는 듯하다. 더는 올라갈 수 없을 때, 설령 정상이 아니더라도, 마침내 그가 걸음을 멈춰 만나게 될 말은 무엇일까. 그의 소설을 읽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안타깝게 찾아지는 말들 속에서 역시 안타깝게 빛나는, 그러나 소중한 '소망'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 김인숙 (소설가)

벌써 서너 해 저쪽의 일이 되고 말았다. 소설 쓰는 전성태 들과 함께 김남일 형의 우거에 간 적이 있다. 목련이 이울고 막 벚꽃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꽃 보러 갔다. 섬진강을 끼고, 구례읍을 벗어난 지리산 자락이었다. 그가 기거하는 버려진 슬레이트 집 그의 앉은 뱅이책상에는 가난한 고학생의 좌우명 같은 구절이 기우듬히 기대어 있었다. "이렇게 살다간 죽는다 / 이렇게 살다간 죽는다 / 이렇게 살다간 죽는다." 내가 가슴을 저미며 읽은 '사북장 여관'이나 '산을 내려오는 법'은, 아마도 그 시절 그의 고밀도의 내부를 엿보는 한 틈일 것이다. 그때 나는 아궁이에 삭정이를 꺾어 넣는 그의 정지문 앞을 서성이며 거기에 대구를 붙이듯 다음 세 구절을 얻었다. "마당에 달래순 푸르다 / 하늘에 별무리 푸르다 / 산능선 밤물결 푸르다." 길고 긴 사투의 시간을 건너서 펴내는 그의, 또 다른 의미에서의 '첫'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그때 그 대구가 빗나가지 않았음을 가슴에 흥건이 느꼈다. 그해 벚꽃놀이 인파가 몰리기 직전, 그와 함께 구례에서 산청까지 섬진강을 끼고 구부러진 길을 달린 것은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 장철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