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경자의 신작 장편소설 [천 개의 아침]
(이룸, 2007년 2월 5일)


<절반의 실패>, <혼자 눈뜨는 아침>, <계화>의 작가 이경자의 장편소설. 불안한 젊음의 사랑 이야기가,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청춘의 한때 작가 자신에게 일어난 연애사건, 그 추억을 끄집어내 빚어낸 작품이다.

정환은 공부만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으며 악착같이 공부한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양귀비를 재배하다 감옥에 가게 된 그는, 전과자의 낙인을 지닌 채 작은 항구도시에서 정착한다. 이후 외항선원에게 창녀를 알선하고, 자질구레한 밀수품을 운반하고, 창녀들의 편지를 대필하는 것이 정환의 일상이 된다.

납북 어부였던 남편의 연좌제에 평생을 묶인 어머니와 외롭게 지내온 수영. 항상 열등감에 짓눌려온 그녀는 세상에 반항하듯 어머니의 유일한 소망인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그리고 동해항에서 작은 선물 가게를 운영하며 살아간다. 정환과 수영, 어찌 할 수 없는 아픔을 지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끌리기 시작한다.

이경자 1948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장편소설 <사랑과 상처>로 4회 한무숙문학상 수상. 지은 책으로 소설집 <꼽추네 사랑>, <할미소에서 생긴 일>, <절반의 실패>, 장편소설 <배반의 성>, <머나먼 사랑>, <혼자 눈뜨는 아침>, <황홀한 반란>, <사랑과 상처>, <계화>, <천 개의 아침> 등이 있다. 이밖의 작품으로 에세이 <반쪽 어깨에 내리는 비>, <남자를 묻는다>, 여행산문집 <이경자, 모계사회를 찾다>, 동화집 <궁금한 게 참 많은 세상> 등이 있다.

::책 속에서

소금기를 머금은 해풍이 수영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려 댔다. 수영은 어두운 모래밭을 달려갔다. 신발이 벗겨져도 모르고 달렸다. 정환이 벗겨진 수영의 신발을 찾아 들었다. 그는 한가운데 우뚝 멈춰서 달려가는 수영의 어두운 그림자를 눈에 가득 품었다.

어디쯤에서 수영이 돌아섰다. 그 여자는 문득 '행복을 보았다.' 행복이 품에 가득 차는 느낌에 아뜩했다. 행복해야 사랑이라던 정환의 말, 사랑하면 행복해야 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수영은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사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 눈에서 소리도 없이 뜨거운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 본문 230~231쪽에서


::작가의 말

어린 날 글을 쓸 땐 내가 '문학'을 한다는 게 좋았다. 물론 문학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썼다. 시도 되고 소설도 됐다. 그 시절 문학은 일탈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나를 비현실적이고 사회성 결여로 길들였다.

그 뒤엔 소설을 써서 불합리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았다. 소설가의 사회적 책무라고 주장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좀 더 나이를 먹은 뒤, 내가 줄기차게 소설을 쓰는 건 나 자신이 불행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불행을 잊으려고 소설 속으로 깊이 도망가는 내가 보였다.

지금은 외롭지 않으려고 소설을 쓴다. 소설 속의 인물들과 허물없이 소통하고 사랑한다.

이 소설은 내 청춘기의 한때, 내게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그 사건을 녹여서 물로 만들거나 말려서 증발시켜야 나의 내면이 조화를 이루고 평화를 찾을 것 같았다. 주인공 정환과 수영은 수십 년 동안 내게 갇혀서, 나는 그들에게 갇혀서 오래도록 자유롭지 못했다.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을 때 이들을 소설로 한번 다뤄 봤다. 하지만 내가 도무지 정직할 수 없어서, 그 사건을 통찰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과 이별한다.
허전하고 개운하다... - 이경자


::추천글

젊음은 누구에게도 아름답거나 충만하지 않다. 오히려 젊음은 우리 모두에게 미숙한 지혜, 불안한 미래, 가난한 일상을 선사할 뿐이다. 그 시기의 사랑 역시 결핍과 오류와 허상으로 빚어진다. 훗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젊은 날 사랑의 이름으로 행한 과오나 악행에 대해 알아차리게 된다.

<천 개의 아침>에는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의 과정이 공감할 만한 서사구도를 통해 묘사되고 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용서하고, 그 시절의 상대방과 화해하고, 사랑의 한 과정을 마무리 짓는 여정이 세밀하면서도 덤덤한 어조로 이야기 된다. -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