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청호 소설가의 네 번째 소설집 [벚꽃 뜰]
(생각의나무, 2005년 11월 10일)

<단 한 편의 연애소설>, <갱스터스 파라다이스>의 작가 박청호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2004년 이효석문학상 추천 우수작으로 선정된 '벚꽃 뜰'을 비롯하여 '어머니의 집', '첫사랑 이후', '낮술 먹고 사랑싸움하네' 등 총 일곱 편의 중단편을 실었다. '발바닥까지 축축한 권태로운 일상'이라는 테마와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고통을, 독창적인 문체와 세련된 감각으로 그려냈다.

작가가 그려낸 인간군상들은 일상을 도망치듯 등지는 존재들로, 역사성이 소멸된 듯한 시간 속에서 극단의 쾌락을 통해 존재의 초월을 꿈꾼다. 간절한 몸짓으로 사랑의 향연을 벌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랜 습작 후 시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력답게 문장에는 시적 면모가 다분히 드러난다. 풍부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문체, 영화적 서사,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응축된 묘사와 서술이 결합되면서 독특한 감성을 발산해낸다.

표제작 '벚꽃 들'의 주인공 '나'는, 파견 근무를 핑계로 어머니와 아내, 아들을 버리고 한국을 떠나온 서른아홉의 동경 주재 은행원이다. '나'는 눈 내리는 3월의 어느 날, 같은 은행에 근무하는 다케시다라와 함께 충동적으로 벚꽃 구경을 떠난다. 그러나 스포츠카를 교대로 몰다가 그만 사고를 내고, 사고 현장 인근의 벚꽃 가득한 온천장에서 여인들과 꿈 같은 며칠을 보내게 된다. 이들은 벚꽃이 지는 장엄한 풍경 속에서 각자의 슬픔을 안고 오열하면서, 동시에 엉켜 성적 황홀경에 이른다.

박청호 1966년 부산 출생. 1989년 「문학과비평」에 시를, 1996년 봄 「문학과사회」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입선. 소설집 [단 한 편의 연애소설], [소년 소녀를 만나다], [질병과 사랑], 장편소설 [그가 나를 살해하다], [갱스터스 파라다이스], [사흘 동안], 시집 [치명적인 것들] 등이 있다.

::책 속에서

꽃의 무덤은 신혼의 이부자리처럼 눈부셨다. 벚꽃은 폭포수처럼 질 때조차 사치스러웠다. 극단의 몰락, 화려하고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풍경의 끝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미(美)의 슬픔이었다. 동시에 장엄한 무사(武士)의 슬픔이었다. 봄밤, 따사롭게 쏟아지는 꽃잎의 폭설. 나는 마당에 드러누웠다. 꽃이 내려 몸을 덮었다. 꽃은 몸뚱어리 위에 겹쳐 누우며 매우 인간적인 것이 된다.

차가운 냉기가 피부 위로 훑고 지나갔다. 드디어 죽음이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한다. 꽃잎은 서늘하게 쏟아져 내렸다. 바람이 불면 마당의 꽃들이 잠시 승천했다. 마치 꽃들이 내 몸으로부터 새로 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한꺼번에 반복되고 있었다.

- 본문 88쪽, '벚꽃 뜰' 중에서


::시인의 말

글을 쓰는 행위가 죄 짓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때는 정녕 그러했다. 그러나 요즘은 글 쓰는 게 그저 빚을 갚는다는 느낌이다. 나의 죄 때문에 상처 입은 많은 사람들에게 글 쓰는 고통을 반복함으로써 속죄하는 것 말이다. 내가 자초하는 이 고통이 그들에게는 위로가 되었으면 싶다. - 박청호


::추천글

작가에게 글쓰기는 일상성을 넘어서기 위한 탈주의 한 방식이었으며, 따라서 그에게 글쓰기는 사랑과 동일한 에로스적 행위, 즉 생의 감각을 향유하는 예술을 뜻했다. 감각을 통한 존재의 초월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 타락과 파멸을 안고 있는 끔찍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두 가지 방식의 엑스터시 속에서 부덕하고 사악한 예술적 탕아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작가는 성(聖)과 속(俗)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작가가 이 작품집에서 보여준 죽음과 소멸의 미학은 에로티즘의 필연성이기도 하지만, 그가 애초부터 다다르고자 했던 신화적 세계의 궁극적 도달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벚꽃 들'은 이러한 신화적 세계를 형상화한 탁월한 미학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 정은경 (문학평론가,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