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에세이 제19회

내 마음속의 가을 운동회

박 남 원(시인)

이상하게 내 머리 속에는 그 노래 한 소절이 그렇게도 끈질기다시피 남아 있
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그 애상적이고 적당히 기운을 돋게 하는 그 리드
미칼한 가락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상적이고 적당히 리드미칼한 음악이
세상에 그것뿐이었을까.
그러니까, 나로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시절인 초등학교적 가을 운동회.
아마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지 싶다.
하늘은 온통 코발트빛으로만 눈이 부시고 들판은 순금으로 끝없이 출렁거렸
다. 가을 운동회는 내가 살던 그 작은 마을에 아이들뿐만 아니라 한 계절 내내
노동으로 지친 어른들에게도 틀림없이 즐거운 축제였을 것이었다. 유희보다는
일에 더 지쳐 살아야 했던 어른들이었지만 무더운 여름을 잘도 견디고 이어 붉
고 황홀한 가을의 풍성함이 앞에서 아이들의 그 티없고 맑은 즐거움에 동참하
고 싶은 욕망이 어른들이라고 왜 없었겠는가.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형제들이 잠든 어느 틈에 일어나셨는지 모
를 어머니는 아이들 못지않은 한껏 들뜬 모습 그대로였다. 시골 살림에 도시락
하나 운동할 때 입을 옷가지 몇 챙기고 나면 그만이었으나 평소와는 달리 밝은
표정을 얼굴에 그렸던 것은 분명 그 가을운동회 때문이었을 것이었고 또한 그
녀를 그렇게 일찍 일어나게 한 것도 역시 그 운동회에 아이들이 자칫 늦어 상
처나 받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하여튼 아침부터 그렇게 서둘러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어머니보다 훨씬 먼저
학교에 도착했을 때 학교는 이미 온통 만국기로 펄럭였고, 낡은 교사 한켠에
높다랗게 매달려서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져 나간 미국제 마이크에선 아침부
터 그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노래였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동포들/건질 이 너와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나가/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에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싸우러 나아가세

일제에 맞서 만주 벌판을 누비던 용감한 우리네 독립군들이 부르던 “신 독
립군가”라 하는 노래였다. 서양의 어느 애잔한 민요곡조에 가사를 붙여 불렀
던 이 노래를 아이들이 뛰노는 가을운동회 운동회가로 내보냈던 것은 부디 너
희들이 자라서 나라를 위해 살라는 어느 노 선생님의 애절한 바램이 담겨 있었
던 것이었을까.
하여튼 우리는 그 노래를 하루종일 들으며 그 너른 시골 운동장 이곳 저곳을
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웃고 떠들면서 하루 종일을 보냈고, 운동회가 끊
나 잘 한사람은 잘한 대로 못한 사람들은 못한 대로 쥐어진 종이상장을 하나씩
받아들고 돌아오면서 콧노래로 흥엉거렸던 노래 역시 바로 그 노래였다.
아마 팔십년대를 민주화 운동과 최루탄이 터지던 그 운동적 분위기에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 노래는 뇌리에 꽤나 과격한 이미지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때에도 역시 하나의 가을운동회 노래였고 추억의 노래였고 지
금도 그렇다. 들으면 옛생각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고 그래서 잠시 울적해졌던
기분도 가을 운동회처럼 되살아나게 되는. (필자 홈페이지에서)

처음 올린 날: 2002년 3월 22일(금)

박남원(시인)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