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강건임





그곳은 지상에서 4피이트 정도 위에 홀연 떠올라 사람들을 불러모았다가, 다시 홀연 사라진다. 대략 가로 세로 20피이트의 정방형. 가장자리에 튼튼한 동아줄을 쳐서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상주자는 없다. 입장이 허용되는 사람들은 주로 남자이지만 여자도 잠깐씩 들어갈 수 있다. 일견 보기에는 연회를 벌일 것 같은 분위기. 그러나 입장 후, 남자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순서대로 둘씩 짝지어 죽기살기로 맞붙어 싸운다. 결국 둘 중 한 사람만 살아남는 그곳을 사람들은 보통 링이라고 부르는데, 아무 것에나 말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글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나는 섬이라고 부른다.

제1 라운드

섬은 궁륭의 천장에 박힌 전등들에서 쏟아져 내리는 희부윰한 빛 아래 붕 떠있다. 몽롱한 분위기에 감싸여 환상 내지는 신기루 같기도 하다. 네 줄 로우프로 만들어진 공간은 그만큼 아슬아슬해 보인다. 언제라도 다시 공허로 돌아가버릴 수 있는 섬. 발을 딛기도 전에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그녀는 왼손 엄지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그건 그녀가 3층집 옥상에 있는, 소위 옥탑이라고 부르는 K의 방을 떠올릴 때마다 갖는 것과 거의 같은 느낌이다. 그는 강남에 있는 그의 초호화 오피스텔을 놓아두고 불광동 근처의 그 방으로 여자들을 부른다.
물론 창문이 작고 시멘트벽으로 가리워진 그의 옥탑방은 저렇게 환하고 개방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의 머리 속에 각인된 그곳에 대한 인상은 공중누각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전동차가 지나갈 때의 그 요란한 소리와 진동, 그리고 하늘에서 가장 먼저 찾아주는 바람, 아니면 두서없이 쌓여 있는 이불과 옷가지들로 배가 불뚝 튀어나온 작은 비닐장, 자기가 나온 잡지들과 자동차에 관한 책 몇 권이 몇 줄 벽에 기대어 있는 앉은뱅이 책상이 전부인 그 방의 썰렁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라고, 처음에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소리와 진동에도 무뎌지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또 그녀가 사들고 가는 빨간 장미다발로 책상 귀퉁이가 채워졌을 때도 그 인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요즘에 와서야 그녀는 그 방이 아니라 K 자신이 어쩌면 하나의 섬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게 되었다. 음산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섬. 이제까지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듯이, 내가 없는 사이 나와의 인연도 거두어버리고 망령을 따라 사라져버린다면? 아야. 그녀는 아주 작게 비명을 지른다. 이제 겨우 아문 엄지손톱 밑에 다시 피가 엷게 피가 배어 있다.
한 남자가 섬에 올라 중앙에 우뚝 선다. 그에 뒤이어 가운을 걸친 두 명의 남자가 올라가 로프 안쪽 모서리에 대칭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뒤따라 다시 각각 두 명의 남자가 로프 밖에 자리를 잡는다. 맨 먼저 올라온 중년의 남자가 가운을 걸친 두 젊은 남자를 소개하며 일으켜 세운다.
청코너 김기찬, 키 174.5cm, 몸무게 65Kg, 아마 전적 16전 13승 3패. 오늘의 대전은 그의 프로 데뷔전이다. 각진 얼굴이 다부져 보인다. 거기에 거의 대머리처럼 밀다시피한 머리통은 단단하다 못해 무자비할 것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홍코너 정의한, 키 172cm, 몸무게 64.8Kg, 5전 4승 1패 2KO승. 둥글넙적하여 평범한 얼굴이지만 눈이 매섭고 코가 내려앉은 것이 보통 싸움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무나 이겨라! 그녀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그런 말을 뇌이면서도 김기찬 쪽에 오래 시선을 준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그녀는 잠깐 킥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유치한 동지애야. 그녀도, 말하자면 이번 K와의 게임이 첫 게임인 것이다. 이전에 두 번의 게임이 있긴 했지만 그건 글쎄, 모두 아마츄어 전적으로 넣어야 하지 않을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뜻밖의 쇼핑 같았던 게임들.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얼떨결에 사고나서는 그 순간부터 후회하는 그런 물건들처럼 그냥 심심해서 만나고, 만나고나서는 더 심심해져 하품만 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K와는 다르다. 그는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더 분명하게 깨닫게 하고, 그래서 그녀를 더 초조하게 만든다.
세컨들이 로프 뒤로 물러난다. 가운을 벗고 트렁크만 입은 두 선수와 레프리만 링 안에 남는다. 섬에는 벌써 거친 호흡이 오가는 것 같다. 그녀는 조바심이 난다. 내가 올라가야 하는데! 그래서 시작 전의 긴장과 갈등을 조금은 눅여주어야 하는데! 그러나 1회전만은 그녀에게 올라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 섬에서 잔치상의 진행을 알려주는 차림판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없다면 섬이 그저 폭력과 피만 난무하는 투견장과 다를 바 없음을 그들은 모른다. 그녀가 없으면 옥탑방이 망령만 출몰하는 폐가 같은 곳임을 K가 모르는 것처럼
그녀는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속에 섬이 들어앉는다. 그래, 상상으로라도 섬에 오르자.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로프를 들어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몸을 들이민 다음 링의 한복판으로 나아간다. 바다가 조금씩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1자 표시판을 든 손이 약간 떨린다. 호흡이 조금 빨라진다. 엉덩이는 뒤로 쭉 빼어 양옆 30도 각도로 흔들고, 가슴은 앞으로 쏠린 듯 내밀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미소보다는 크지만 너무 활짝은 아니게 웃으며, 반쯤 감긴 듯 눈꺼풀을 깔고 바다 쪽을 바라보며,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돈다. 동… 서…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환한 웃음에 응답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찰랑거리는 흰 미니 플레어스커트 밑에 보일락 말락한 흰 팬티나 물 몇 찻술 정도는 넉끈히 담을 만큼 오목히 패인 배꼽, 끈 없는 흰 톱으로 감춘 뾰족한 가슴조차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한다. 오로지 시선을 끄는 것은 두 남자의 살벌한 눈빛과 소 오줌보같이 생긴 글로브뿐이다.
섬의 속성이 대개 그러하듯 이곳에서 역시 누구도 타인의 욕구를 알려하지 않는다.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 광고에서처럼 그저 자신의 것만 전달하면 그만인 것이다. ‘내가 너를 끝장내주겠다’. ‘내가 너를 응원하니까 네가 이겨야 한다’. 그녀 역시 그들이 보든 안 보든 그녀의 눈빛에 ‘언젠가 나도 유명한 패션모델이 돼서 이보다 더 굉장한 섬에 오를 테니, 두고 보세요’라는 메시지를 담아 보낸다. 광고처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생각하면서도 한 바퀴를 다 돌고 내려올 때쯤이면 언제나 코끝이 찡하다. 그녀가 보낸 메시지가 아무에게도 수신되지 않는 현장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녀는 끝까지 눈길 한 번 스쳐 지나가지 않을 완전한 타인에 불과하다. 혹시 K와의 관계도 그렇게 끝나는 것은 아닐까? 그는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뭘 생각하는지 도무지 궁금해하지 않잖아. 자기 생각만 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어떻게 남한테까지 신경을 쓰냐고 귓전에 울리는 어떤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눈을 부릅뜬다. K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세컨들이 마우스피스를 끼워주며 급한 목소리로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섣불리 다가들지 말어. 그리고 자식아, 넌 훅을 날린 다음에는 손을 내리는 버릇이 있어. 상대가 그 틈을 타서 파고들면 넌 끝장이야. 쟤가 너보다 키는 작아도 주먹힘이 보통이 아냐. 김기찬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도 한 번 옥탑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K가 자기한테 넘어왔다고 생각하고 긴장을 풀면, 그런 때 K는 여지없이 지겹다는 티를 낸다. 그리고 K가 그녀보다 머리가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그의 경력과 경험은 그녀의 머리쯤 날려버리고도 남음이 있다.
서두르지마. 상대는 첫 대전이니까 처음부터 힘을 쓸 거야. 적당히 피해.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을 택해서 한 방 날리는 거야. 피하랬다고 또 홀딩 같은 거 너무 많이 하지 말고. 니가 저번에 진 것도, 임마, 다 그 때문이야. 그것만 아니었다면 넌 전승을 기록할 수도 있었다구. 정의한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정의한을 쳐다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왜냐하면 K도 그녀한테만은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코 처음부터 힘을 쓰지 않았고, 오히려 K가 힘을 썼으며, 결정적인 순간이 자꾸 미뤄지는 것 같자 급한 마음에 약점을 많이 노출했던 것이다.
섬에 올랐다가 내려와 접안 시설쯤 되는 진행석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아주 쓴 침을 삼키게 한다. 섬은 아무에게나 항상 개방된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에게 선택된 사긴에만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섬의 특권의식에 아무도 불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래에 들어 그 열기는 많이 식었지만 그래도 그곳은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2라운드부터 잠깐씩 입장이 허용되는 것만으로 감사하자고 마음을 돌이킨다.
벗은 몸들이 아름답다. 길쭉한 럭비공을 잘라 살갗 밑에 끼워넣은 것 같은 근육질의 팔뚝과 종아리, 풀무질로 바람을 넣은 것처럼 불룩한 젖가슴, 기름이라도 칠한 듯 윤기가 나는 피부. 그녀는 가만 탄성을 올린다. 키는 비록 그들보다 훨씬 더 크지만 K의 벗은 몸은 그들의 것에 비하면 많이 초라하다. 가늘고 까칠한 그의 몸을 볼 때마다 그녀는 그의 팔에 매달릴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하고 싶고, 양 가슴 사이를 계곡처럼 움푹 패이게 하고 싶고, 파리들이 미끄러질 만큼 윤기나는 피부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녀의 마음이 측은지심으로 파동치다가 불현듯 어쩌면 그 초라함이 그의 몸이 가진 무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파동을 멈춘다. 그렇다면 내 몸은 무슨 무기를 가졌을까? 뛰어난 미모도 아니고, 모델치고는 키가 작으며, 피부도 붉은 벽돌빛을 띠었대서 고추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니 굳이 무기를 찾자면 매운 맛쯤일까? 그녀는 더운 숨을 길게 내뱉는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섬의 분위기는 로프 안에 떨어져 앉아 있는 두 남자와 로프 뒤에서 그들에게 뭐라 쉴새없이 떠드는 세컨들로 아연 긴장돼 보인다. 게다가 관중석에서 솟구치는 시끄러운 소음들. 벌써부터 섬 주위도 거칠다. 나중에 피라도 보게 될라치면 바다는 태풍에 휩싸인 것처럼 광포해질지도 모른다. 파국을 기다리기까지의 두려움과 기대가 묘하게 뒤섞인 분위기에 그녀의 신경도 팽팽해진다.
오늘 연회는 이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세 번 더 있을 것이다. 6회전, 10회전, 마지막 동양밴텀급 챔피언 타이틀 전. 주인공들이 얼마만큼 극렬하게 싸우다 떠나가느냐에 따라 연회는 일찍 끝날 수도 있다. 그녀는 오늘의 경기가 모두 판정까지 가기를, 그래서 한 회도 빼먹지 않고 섬을 돌 수 있기를 빈다.
공이 울린다. 두 선수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온다. 관중석이 잠깐 쏴아― 파도소리를 낸다. 까만 트렁크를 입은 김기찬과 흰 트렁크를 입은 정의한은 허공에 가벼이 잽을 날리면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다. 원이 점점 좁혀진다. 적의는 반비례하여 팽창한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길이 투견들처럼 날카롭다. 그녀는 옛날 로마 시대에 노예나 포로들이 주먹질로 싸우게 하고 시민들은 그것을 보며 즐기는 만화책을 본 기억이 난다. 그들의 눈빛도 꼭 투견들 같았다. 지금이라고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싸움꾼도 얼마간 자기 몫을 챙긴다는 것뿐. 그들을 데리고 돈을 버는 인간들이 있는 것도 똑같고, 돈을 내고 구경하는 구경꾼도 똑같고. 나랑 K의 싸움도 입장료를 낸 구경꾼이 없다는 것만 빼면 똑같을까?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자기가 이기면 자기 몫으로 무엇을 얼마나 챙길 수 있을지 따져본다. K를 이기면 처음부터 큰 무대에 설 수도 있지. 그리되면…….
김기찬이 먼저 정의한의 얼굴에 가벼운 펀치를 넣는다. 정의한 세컨의 예상대로 호전적이다. 정의한 역시 가만있지 않는다. 왼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며 오른손을 김기찬의 얼굴로 쭈욱 뻗는다. 빠르면서도 힘이 실린 펀치다.
K와의 시작도 저렇게 잽을 날리는 것처럼 가벼운 것이었다. 에이전시 소속 회원의 단합대회 파티장에서 K는 우연히 옆에 앉게 된 그녀의 등을 툭 치며 처음 보는데, 하고 말을 건넸다. 그리고 주고받은 물음과 응답들. 어느 학원, 몇 기인가에서부터 집이 어디인가에 이르기까지 아주 일상적인 질문들이었지만 그녀는 그가 자기에게 말을 건넸다는 것만으로 벌써 흥분 상태였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렇게 일방적으로 잽을 허용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그날 밤 그녀에게 춤을 청한 걸 보면 잘 받아 넘겼나보다.
두 선수는 다시 점점 원을 크게 그리며 멀어져 간다. 아직은 상대에 대한 탐색만 하고 있다. 레프리는 어서 싸우라고 재촉을 한다. 링 밖에서는 누가 누구에게인지 모를 세컨들의 고함이 난무하다.
머리를 숙이고 파고 들어가.
떨어져서 바디를 쳐. 가슴을 노리고 들어가서 계속 잽을 날려.
피하란 말이야…….
그녀는 프로모터와 세컨을 두고 경기를 치르는 권투선수들이 많이 부럽다. 그들은 그저 몸만 뛰면 되지만 그녀는 자신이 직접 주선하고 자신이 직접 작전을 짜고 자신이 직접 싸워야 한다. 딱 한 번, K와의 게임을 시작할 무렵 세컨을 둘 뻔도 했다. 그는 미아리 보은 도사로서 그 게임을 포기하라고 했다.
급이 다른 사람들이구만. 이 남자는 어려서부터 풍파가 많아. 아가씨도 집안이 가난해서 초년에 고생은 했겠지만 앞으로는 그럭저럭 편안하게 살 사주야. 그냥 딴 욕심 버리고 조신하게 집에 있다가 좋은 남자 골라서 시집 가. 이 남자는 처궁이 뚫려서 평생 여자 바꾸며 살 거야.
권투식으로 말하면 그는 미들급이고 그녀는 플라이급이라는 것인데, 그쯤이야 그녀 주변의 누구도 할 수 있는 얘기였다.
전 이 사람을 사랑해요. 성공도 꼭 해야 돼구요. 부모님 고생도 덜어드려야 되고, 동생들 공부도 시켜야 하고…… 이 사람이 제 디딤돌이 될 수 있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이 사람이 제게 목을 매게 하는 무슨 방법이?
남자 이용해서 출세하려구? 요즘 아가씨치구 생각이 참 고전적이구만, 허허…… 잠깐이야 목을 매겠지만 오래가지 못해.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는데 무슨 방법이 있겠어. 다른 데 가서 봐도 똑같은 소릴 게야. 부적 써주겠다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은 틀림없는 사기꾼이니까 넘어가지 말고. 이런 팔자에는 부적도 소용없어.
그 도사 때문에 그녀는 그 몰래 다른 상대를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에이전시의 힘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녀의 상대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누군가와 게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눈을 돌릴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녀 역시 K만큼 게임에 몰입하게 만드는 상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고전적’으로 그와의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급만 높으면 뭐해, K는 주먹이 약한 걸. 처궁이 뚫렸다구? 막으면 될 거 아냐.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쥔다.
공이 울린다. 두 선수가 등을 돌리고 각자의 코너로 돌아와 앉는다. 세컨과 조수들이 분주하게 몸을 닦아주고 물을 먹이고 다음 회전의 작전을 코치한다. K와도 저렇게 시간을 정해놓고 뛰다가 쉬다가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쉰다.
그녀로서는 K가 예측불허다. 어느 날은 맑아서 만나기 싫고, 어느 날은 맑아서 만나고 싶고, 어느 날은 비가 와서 만나기 싫고, 어느 날은 비가 와서 만나고 싶단다. 휴대 전화로 호출하는 시간도 제멋대로다. 새벽, 한밤중, 경기가 있는 날, 광고를 찍는 날…… 그에게 시간은 상관이 없다. 졸린 눈을 부비며, 숨을 헐떡이며, 다리를 질질 끌며, 그녀는 그에게 간다. 게임 시간의 길이도 그의 마음대로다. 어떤 때는 한 시간, 어떤 때는 하룻밤 내내. 그러나 아무리 하룻밤을 함께 지새웠어도 게임이 끝나면 K도 저들처럼 등을 돌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자기가 원할 때까지 휴식을 취한다. 그의 등을 돌려세우고, 사랑의 표시 하나라도 더 던져 그의 마음을 자기에게 묶어두고 싶은 그녀의 갈망은 다음 회전을 위해 미뤄야 한다.

제2 라운드

섬은 아직 그렇게 뜨겁게 달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두 번째 코스를 알리는 차림판을 들고 섬에 오른다. 후 아 더 챔피언…… 퀸의 노래가 섬의 주위를 덮고 있지만 그녀는 그것을 K의 목소리로 바꾸어 듣는다. 그녀는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가 약간 말을 더듬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가 랩을 부를 때는 직접 부른 가수도 못 따라갈 것같이 혀놀림이빠르다.
그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것들이 참 많이 있다. 남자임에도 운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직업이 모델이면서도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 코메디 프로를 싫어하는 것…… 그녀는 그 모든 것이 보은 도사의 말마따나 그가 어려서 겪은 ‘풍파’ 탓이라고 생각한다. 풍파를 감추려다 말더듬이가 되었을 테고, 풍파가 무서워 움츠리다 보니 운동도 하지 않았을 테고, 옷이 풍파를 불러들인 것 같아 싫었을 테고, 풍파와 싸우다보니 웃는 게 힘들었을 테고…… 내가 이기면 그런 풍파 따위 다 물리쳐줄 텐데. 그녀의 발걸음이 경쾌하고 가볍다.
그녀는 상상 속에서 펼쳤던 표정과 동작으로 섬을 돌기 시작한다. 이가 여덟 개쯤 보이게 활짝, 엉덩이는 팬티가 살짝 보일 만큼 출렁출렁, 가슴은 어떤 산도 낮다할 만큼 높이 치켜들고……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마법의 섬을 보고 마법에 걸린 것만 같다. 이곳에서 공은 거의 주문과 같은 역할을 하여, 공이 울리면 사람들은 깨어나서 섬에서 벌어지는 때리고 또 때리는 광경을 보며 환호성을 내지른다. 그리고 다시 공이 울리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섬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 수런거린다. 그들은 오직 섬의 폭력에만 반응하도록 주문이 걸린 것이다.
그녀는 홍코너를 지나가면서 정의한에게 잘 싸우라는 격려의 미소를 보낸다. 청코너를 지나가면서도 또한 김기찬에게 똑같이 미소를 보내는 중에 잠깐 이를 악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다. 투견조련사인 외삼촌은 아버지를 빗대어 첫 싸움에서 진 개는 영원히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 그렇지는 않다고 우겨댔지만 30년이 넘도록 남대문 시장의 배달꾼 노릇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의 경우는 확실히 맞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패션쇼 무대에 서지 못하고 이쪽으로 빠진 후 그녀의 상황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늦깎이 얘기는 여자 모델의 정년이 스물다섯이라고 하는 이 분야에서는 통하지 않는 얘기인 것이다. 벌써 4년이 지났지만 에이전시에서는 작은 패션쇼의 들러리로도 그녀를 부르지 않는다. 그저 아르바이트로 부분 모델이나 이런 행사에 파견하는 것이 고작일까. 그녀는 잠깐 패션쇼의 무대에서처럼 걸음을 정지하고 허공을 응시한다. 그곳에 아직 오르지 못한 그녀의 섬이 잠깐 떠오른다.
아니, 그곳은 뒷면이 벽으로 막혀 있으니 반도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 살벌한 섬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지. 록키류의 음악이나 나오고, 이런 천쪼가리나 걸치고 다니는 섬이 결코 아니야. 그곳의 바다는 대개 조용하고 때때로 들리는 파도소리는 음악에 버금가게 부드럽다. 그곳에서는 오색의 레이저 광선이 허공을 쏘아대고 클래식에서부터 재즈에 이르기까지 분위기마다 새로운 음악이 흐르며, 거의 예술에 가까운 옷을 입은 K가 빙글빙글 돌며 행진을 한다. 이제까지 그의 옆에는 그의 옥탑을 점령했었던 여자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서게 될 거야. 그녀는 자신이 어떤 몹쓸 바람의 음모로 이 섬에 표류하게 되었지만 다시 또 어떤 선한 바람이 불면 이곳을 뜰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그 선한 바람이 되어주기만 한다면! 그러자 당장 그를 좋아하지 않는 선배와 동기들이 귓전에서 개구리떼처럼 와글거린다.
정신 차려, 이것아. 그 사람은 절대 남을 도와줄 위인이 아니야. 제 욕심 해결하기 위해선 물불 안 가리고 이용하지만 일단 해결되면 그걸로 찬밥 신세야. 사장 비서구 잘 나가는 여자 모델들이구 아마도 다 넘어갔을 걸. 그래서 지금의 톱자리에 올라간거지. 저밖에 모르는 인간이야.
그 점에 있어선 그녀도 자신이 있다. 나도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선 누구라도 다 이용할 수 있어. 그녀야말로 K에게 보여줄 것은 욕심밖에 없다. 그런데 그가 욕심을 낼 만한 무엇이 그녀에게 있을까? 자기의 욕망이 남의 욕망을 부추기며 유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K와의 관계는 욕망으로 유지되는 건가? 욕망이 끝나면 어찌되는 거지? 그녀의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생각을 털어낸다. 음악이 끝도 아닌데 갑자기 멈춘다. 그녀에게 내려오라는 무언의 협박이다.
그녀는 링을 내려오면서 그래도 이렇게 무대가 있는 권투가 다른 아르바이트보다는 훨씬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권투가 좋다. 글로브를 끼워 맨주먹이 가하는 타격의 날카로움을 둔탁하게 하면서도 힘을 극대화시킨 과학성. 서로 부딪히는 몸의 면적을 주먹 하나로 최소화하면서 상대방을 바닥에 눕힐 수 있는 그 힘의 위력과 신사성. 그렇게 몸으로 번 돈과 명예의 순수성. 그녀도 복싱을 하듯이 K와 싸우고 싶다. 무대에 오르고 싶다. 영리하게, 힘있게, 깨끗하게. 권투에서는 얼마나 많은 드라마가 때로 감동적이며 극적으로, 때로 격정적이며 공포스럽게 연출되는가. 죽은 줄 알았던 프레이저가 다 늙어 홀연 다시 나타나 세계 타이틀을 따내고, 무적이라고 생각했던 타이슨이 홀리필드에게 KO로 당하고, 타이슨은 도전전에서 식인종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권투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은 두고두고 생각해도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흥분된다. 내 삶에서도 그런 피 튀기면서도 감동적인 승리는 가능해. 그녀는 링 주변을 한 바퀴 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누르며 자리에 앉는다.
시작공이 울린다. 두 선수가 1회전에서처럼 튀어나와 다시 원을 그리며 돈다. 아까보다는 원이 작다. 잠시 후 정의한이 갑자기 원을 그리다 말고 몸을 숙이고 직선으로 김기찬에게 파고들 듯이 달려든다. 김기찬도 몸을 숙이고 마중을 나온다. 정의한이 김기찬의 턱을 향해 어퍼컷을 쳐올린다. 잘만 치면 김기찬의 턱은 한 방에 날아갈 것처럼 주먹에 위력이 있어 보인다. 김기찬이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뒤로 뺐다가 다시 다가들며 정의한의 옆구리를 바깥쪽에서 때린다. 정의한이 아주 잠깐 휘청이며 허리를 굽힌다. 관중석에서 짧은 함성과 갈채가 인다. 그녀도 공연히 신이 난다. 큰 키와 긴 팔. 신체적인 면에서는 아웃복싱을 하는 김기찬이 확실히 유리하다. 내 치밀하고 계획성 있는 성격도 아웃복싱적 성격이라 할 수 있지. 그녀의 손바닥이 살짝 부딪치며 박수소리를 낸다.
정의한이 어느새 몸을 곧추세우고 김기찬의 가슴 한복판으로 파고 들어간다. 어느새 둘은 엉키어 훅을 주고받으며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세컨들의 고함이 단말마의 비명처럼 울린다. 그거야. 반격해. 가드 올려. 손 내리지마. 몸통 말고 머리를 노려…… 고함소리에 따라 그녀의 주먹이 계속 쥐었다 펴졌다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함이 선수들의 귀에 들리는 것 같진 않다. 김기찬은 훅을 한 번 날린 후 손을 내렸고, 정의한은 계속 몸통을 쳐댄다. 김기찬이 빠져나오려 한다. 정의한이 재빨리 어깨를 붙잡는다. 많은 경험에서 우러난 동작이다. 역시 경험이 우선인가? 하지만 경험이 안 먹히는 경우도 있어. 그녀는 손톱을 깨물려다 통증을 느끼고 다시 손을 내려놓는다.
그녀는 K의 경험들만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녀가 보기에 그것들은 모두 다 헛것들이었다. 먹고, 마시고, 자고, 놀고, 먹고, 마시고, 자고, 놀고…… 그는 게임을 할 때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때 울고, 어떤 때 웃으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자기자신도 잘 모르는 것 같긴 하다. 그건 그의 상대 여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자기가 원하는 정도나 알았을까. 그나 그녀들이나 게임을 벌이는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했을 뿐 그 나머지 시간들은 소홀히 했다. 그럴 경우 게임은 당연히 무승부로 끝나고 승자의 타이틀은 계속 그가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난 결코 걔네들과 똑같지 않을 거야. 그녀는 그에 대한 것을 알아내는 데 정말 많은 시간과 수고를 지불했다. K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의 일상적인 것을 물어보고, 그가 단편적으로 꺼내는 옛날이야기들을 모으며, 그의 낙서나 수첩의 메모 등을 훔쳐보고, 심지어는 그의 고향까지 가서 그의 집안 이야기를 수집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과거의 조각 그림들, 그 중심에 그의 어머니가 자리잡고 있는 그림을 어느 정도 맞추어냈다. 그는 사람들에게 계모와 사이가 집을 나왔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계모와의 갈등은 차라리 엄마의 기억에 비하면 바늘에 살짝 찔린 정도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너무 아플 때는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는 것처럼 그도 그렇게 자기의 상처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정의한이 김기찬의 어깨를 잡고 코너로 몰려 한다. 김기찬이 정의한의 손을 뿌리치며 벗어나려 하지만 정의한은 눈빛에 폭력성을 더하며 한치도 틈을 내주려하지 않는다. 김기찬의 이리저리 뛰는 모습이 안타깝다. 하지만 동정은 어느 경기에서든 그렇듯이 절대 금물이다.
K와의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정은 그녀가 쓸 수 있는 테크닉 중에 최악의 것이다. 그런 기미를 조금이라도 느끼면 그는 벌써 숨을 헐떡이며 이마의 주름을 모은다. 서투르게 동정을 표현했다가 그의 옥탑방에서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다. 그의 생일날, 생일 케잌의 촛불을 끄고 나서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자,자살한 날이 바로 어제야.
남편과 매일 투닥거리는 게 싫어서 그랬다는 것까지는 그렇다치고, 어떻게 세상에, 엄마라면서 그럴 수가! 어떻게 자식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자기의 생일을 언제나 엄마의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 보낼 그가 너무 가엾다는 생각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아, 말도 안돼,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그를 안는 순간 그는 그녀를 밀쳐냈다. 나가! 칼이 있으면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목이라도 베었을 것 같은 그런 서늘함이 목소리에 어려 있었다. 그녀는 순간 그가 그냥 한 번 엄살을 부려봤을 뿐인데, 자기도 모르게 너무 호들갑을 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니,니가 울 엄마 욕하는 것도 싫고, 그,그렇다고 이해하는 척하는 것도 시,싫어.
그의 어머니를 판단하는 것은 그만의 몫이었고 여자들은 그저 석상처럼 앉아 가만히 들어주기만 해야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고 방을 나왔다.
정의한이 홀딩을 한 채 김기찬의 복부에 연타를 가한다. 반칙이다. 그래, 동정보다는 차라리 반칙이 낫지. 그녀는 김기찬에게 발이라도 밟으라고 외치고 싶다. 정 안 돼면 거짓으로라도 정의한이 급소를 때린 것처럼 엄살을 떨라고. K가 생일날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상대가 기겁을 하게 만들어야지. 그러나 김기찬은 오직 정의한을 떼어내는 일에 급급하다. 김기찬이 몸을 밀어내고, 레프리가 떨어지라고 하지만 정의한이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다. 비겁한 놈.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자기야말로 이기기 위해서라면 정의한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두고 봐. 누가 이기는지. 레프리가 드디어 그들 사이에 들어 정의한을 떼어낸다.
K 또한 반칙의 대가라는 소문이 나 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막무가내로 접근하기, 싫어지면 일방적으로 게임 종료를 선언하기, 여자가 불복하면 역시 힘을 이용하여 그녀의 무대를 보이코트하기…… 내어줄 마음은 아끼고 받아낸 마음은 남용하라. 그는 아침마다 그런 자기 암시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만 같다. 그의 그런 모든 불공정 게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반칙들을 막아줄 레프리는 없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에 대하여는 방금 전 정의한에게 하듯 주먹을 불끈 쥐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민들레 홀씨보다 더 가벼울지도 모를 그의 관심에 감사하며, 언제 그가 자기에게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K가 그녀의 귓전에서 속삭인다. 난 사, 사랑이라면 징그럽고 무서워. 그런 고백을 듣고 싶으면 일찍 꾸,꿈깨라.
K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왕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 여자에 대한 배반감 때문에 모든 여자를 적으로 세워놓고 매일 여자를 죽이는 샤리아르 왕. 모든 여자들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도피처로 삼아놓고 핑계김에 계속 여자를 바꾸는 그. 둘은 결코 다르지 않다.
오빠, 사오정 아버지가 사오정한테 비아그라를 사오라고 했는데…….
그녀도 사실 사랑에 대해 그리 신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가 무섭고 징그러워하는 사랑을 우선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려 유머 테크닉을 써보았다. 그러나 K는 유감스럽게도 샤리아르처럼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자,잠자그라를 사왔다는 얘기하려는 거지. 야, 넌 그딴 얘기가 재밌냐? 그녀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세라자데에 미치지 못했고, 그 또한 그런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샤리아르보다 더 고약하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테크닉을 시현 중이다. K가 반칙이라고 외친다. 다행히 레프리는 없다.
정의한은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왼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떻게든 김기찬의 복부와 가슴을 파고들려 한다. 김기찬은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긴 팔로 정의한의 얼굴에 자잘한 잽을 넣고 있다. 정의한이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김기찬의 허리춤에 스윙을 가하지만 김기찬은 재빨리 뒤로 빠진다.
정의한과 김기찬의 얼굴이 똑같아 보인다. 사냥감인 동시에 사냥꾼인 얼굴들. 그들은 눈앞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이감에 정신을 빼앗겨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 저 몰아의 표정! 바로 섹스 때 K가 보여주는 표정이다. 그때 그의 얼굴에는 과거의 기억이나 속박에서 벗어나 오직 현재의 순간을 누리는 자의 격정이 얹혀 있다. 그녀는 첫 경험부터가 너무나 서투르고 거칠었기 때문에 섹스가 고통스럽고 싫다. 찢어지고, 부서지고, 찔리고…… 그에게 와서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아직도 난폭한 인상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싫다는 대답은 통하지 않는다. 싫다고 하면 그녀는 그 즉시 옥탑을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때야말로 그의 황홀한 먹이감이 되지만 동시에 그녀 또한 그를 사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김기찬이 긴 팔을 스트레이트로 내뻗지만 정의한은 기다렸다는 듯 맞받으면서 도리어 더블펀치를 안긴다. 김기찬의 발이 순간 휘청한다. 그녀는 앗, 하고 낮은 비명을 지른다. 괜찮아! 계속 뛰면서 카운터블로를 노려. 김기찬의 세컨이 소리지른다. 그래, 괜찮아. 그녀도 마음속으로 그를 응원한다. 자책하며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새로운 시작은 설사 다운을 먹었어도 가능하다.
K의 옥탑방에 몇 번 오른 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와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심을 그에게 내비쳤다. 그가 갑자기 킥킥거렸다. 그녀는 헛방을 날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잠시 머리가 아찔했으나 속으로 괜찮아를 연발하며 호흡을 골랐다. 그러자 배짱이 생기면서 놀라운 순발력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텐 아주 절실한 문젠데 오빠한텐 그게 그렇게 우스워? 하긴 오빠한텐 다 우습지. 불쌍한 오빠 엄마만 빼곤.
그의 얼굴이 갑자기 하얘졌다. 그녀는 쫓겨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서 방을 나갈까 하다가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예기치 그녀의 반격에 너무 놀랬는지 그는 그녀를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못 들은 척하며 놀랍게도 미안하다고, 그녀의 어투가 너무나 연극조여서 그랬다고 사과를 했다.
너한테 무,무대는 어떤 곳이니?
내 미래가 날개를 다는 곳.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자기의 반도를 그려주었다. 모든 조명이 나에게 집중하고, 모든 이가 나를 향해 환호하고, 돈이 삐라처럼 내 머리 위에서 날리고…… 거기서 난 유명해지고 부자가 될 거야. 그녀의 어투가 좀전과 전혀 다를 바 없었는데도 이번에 그는 웃지 않았다. 그저 그것뿐이냐, 단순해서 좋겠다는 말만 던졌다. 그녀는 슬쩍 오빠에게는 무대가 어떤 거냐고 되물었다. 그는 얼굴만 일그러뜨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표정 속에서 그의 비밀스런 또 하나의 무대를 그려낼 수 있었다. 열한 살의 아들에게 독약을 사오게 한 엄마, 그 약을 아들이 보는 앞에서 먹는 엄마, 그리고 배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며 방을 뒹구는 엄마…… 그에게 있어 무대는 그런 엄마를 혼자 지켜보면서 공포에 질려 울지도 못하고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아이를 되살려내는 곳은 아닐까. 공포, 슬픔, 경멸, 증오…… 디자이너들이 그에게서 최대의 강점이라고 꼽는 바로 그 복잡한 얼굴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닐 것이다.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가 무능하고 바보 같다고 원망하는 죄를 짓게 하는 가난에서는 왜 그런 얼굴이 만들어지지 않는가? 세 발짝만 움직여도 식구 중 하나랑 반드시 몸을 부딪는 그녀의 지하 전셋집이 떠오른다. 잘 키울 능력도 없으면서 아들 낳겠다고 다섯이나 낳았어. 그녀는 그의 표정 중 제일 인상 깊은 증오의 표정을 흉내내려 눈을 치켜 뜬다.
언제 틈을 보이고 얼굴을 내주었을까. 김기찬의 눈가가 찢어졌는지 살짝 피가 보인다. 다리도 아까보다 많이 풀린 것 같다. 풋워킹이 훨씬 무겁고 느려졌다. 승리가 정의한 쪽으로 가는 것이 보인다. 그녀의 마음도 김기찬에게서 떠날 차비를 한다. 나는 김기찬보다는 오히려 정의한에 가깝지. 직설적으로 K의 약점을 찌르고, 상황 판단이 정확하고, 집중력이 강하고, 필요하면 급소라도 찌를 만큼 대담하고…… 그렇게 따져가면서 그녀는 경험이 없다는 것만 빼고는 여러 점에서 자신이 확실히 아웃복서형인 김기찬보다는 인파이터형인 정의한을 닮았다고 결론내린다.
공이 울린다. 김기찬이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똑바로 세우고 천천히 자기 코너로 걸어간다. 쓸데없는 허세다. 돈도 없으면서 어디서나 술을 사겠다고 나서는 아버지나 쫓겨났으면서도 자기 발로 옥탑방을 나왔다고 뻥을 치는 K의 과거 여자들의 허세도 저와 비슷하다. 하지만 허세마저 없으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지. 그녀는 새삼 안쓰러운 시선을 김기찬에게 던진다. 아쉬운 듯 팔을 내리고 정의한도 홍코너로 돌아간다.

제3 라운드

아까와 똑같은 웃음과 표정, 그리고 걸음걸이. 달라진 건 공중에 치켜들고 있는 3이라는 숫자판뿐이다. 이 짧은 장면에서조차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고 3자 숫자판이다. 그녀는 잠시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그녀는 3이란 숫자가 제일 싫다. 3은 언제나 삼각 관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둘이 짝을 지은 후 혼자 남는 1이 문제인데, 이 섬에서는 그녀에게 없는 숫자나 마찬가지인 것도 한 원인이 되겠지만 원래 1이란 숫자를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그녀가 좋아한 국어 선생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1의 상징들을 보아라. 혼자라는 외로움, 제일이라는 교만, 쫓아야 할 자는 없이 언제나 뒤쫓기는 불안, 처음이라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미숙함…… 그러나 거기에 또 하나의 1이 보태지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둘이라는 건 외롭지 않으면서 갈등도 없고, 선택의 고민도 있지 않으며, ‘너’가 곁에 있으므로 우쭐하지 않게 되고 두렵지도 않다. 혼자서 하는 미숙함을 ‘네’가 보완해줄 수도 있고, 추구해야 할 것이 있으므로 기쁘다.
그녀는 거기에 더하여 다시 1이 더해졌을 때의 상황을 그려본다. 다시 1이 더해지면 관계의 단순함은 깨지고 선택의 필연성이 생기며 거기서 갈등이 일어난다. 버려진 하나는 애초 1의 상징에서 많이 변형되어 외로운 것은 물론이고, 질투와 미움과 복수심의 비틀린 형태로까지 발전한다. 그녀는 3이 정말 싫다. K와 처음 사귀게 되었을 때도 그녀보다 두 살 어린 동기 미리가 문제였다. 미리는 그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 하나였다고, 그래서 자기와 K의 사랑이 깨졌다고 하지만, 그때 그는 결코 다른 하나에 의지하고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1이었다. 그는 누구와 만나는 동안에도 늘 그런 인상을 주었다. 섬이니까. 아무튼 혼자가 된 미리는 여기저기 그녀에 대한 저주의 말을 하고 다닌다.
지들이 한 달을 넘게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어. 그 언니도 꼭 나같이만 당하라고 해.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는 것, 그것도 같은 기에서 제일 잘 풀린 자기가 제일 안 풀린 축에 속하는 그녀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미리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벌써 넉 달째 그의 옥탑을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미리는 어떤 기분일까? 미리는 너무 오만했다. 토막 시체처럼 발만 나오고 엉덩이만 나온 그녀의 광고 사진을 보고 마구 웃었다. 정글 같은 곳에서 번호판이나 들고 다닌다고 또 웃었다. 미리, 네가 조금 덜 웃었더라면, 좀더 겸손했더라면, 아마 난 그의 방을 드나들면서 너에게 많이 미안했을 텐데. 홍코너를 지나면서 그녀의 웃음이 환해진다.
쟤 벌써 많이 지쳤어. 네 장기인 어퍼컷으로 마지막 결정타 한 대만 먹이면 KO로 이길 수 있어.
정의한의 세컨이 확신에 차서 정의한에게 말하고 있다. K를 완전히 쓰러뜨릴 내 장기는 뭘까? 재치와 순발력과 과감한 돌파력, 또…… 그녀는 자기가 아는 그의 과거 여자들의 장기를 떠올려본다. 영혜 언니는 유순함과 인내가 가장 큰 장기였고, 명선 언니는 명랑함과 친절이었고, 미리는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자신감과 발랄함이었지. 하지만 그것들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낡아 장기가 아니라 약점이 되고 말았다. 영혜 언니의 장기는 미련함과 집요함이 되었고, 명선 언니의 것은 푼수 같아졌고, 미리의 장기는 무례함이 되었다. 아마도 내 것은 교활함쯤으로 되겠지. 그녀는 청코너를 돌며 교활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넌 뒷심이 없어. 뒤로 밀리는 것 같으면 타이슨처럼 귀라도 물어버리겠다고 마음먹고 달려들란 말이야. 머리만 빡빡 밀면 뭐해. 죽이고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야지. 김기찬의 세컨이 꾸중하듯 말하고 있다.
김기찬 대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 작전도 생각나지 않고 자신이 뒤로 밀리는 것 같으면 죽자하고 덤비는 거다. 죽는 것도 안 무섭다고 덤비는 놈을 어느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K는 결코 나를 이기지 못할 거야. 나도 이번 게임에 내 인생을 걸었으니까. 피켓판을 든 주먹에 힘이 들어간 탓인지 스텝이 음악의 박자를 놓쳤다. 다시. 중간 코너에 서 있던 레프리가 그녀를 향해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한다. 하마터면 한 바퀴를 더 돌 뻔했다.
공이 울리고 두 선수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김기찬의 다리는 처음과 같은 탄력성을 보이고 있지 않다. 정의한이 원을 그리지 않고 곧장 김기찬에게 달려든다. 김기찬도 반사적으로 몇 발짝 앞으로 나온다. 어쩌면 그는 금방 후회했을 것이다. 가끔씩 K의 호출이 오자마자 아무런 생각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만나러 나갔을 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이미 시들해져 집에 돌아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다. 그녀는 일단 피곤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의 마음을 떠봤어야 했다. 김기찬도 일단 뒤로 빠졌어야 했다. 그리고 정의한의 주먹이 어떤 방향으로 들어오는지를 잘 살펴봐야 했다. 정의한의 주먹이 재빨리 그의 배로 들어간다. 김기찬이 뒤로 밀린다. 옆으로 빠져. 자기 세컨이 아무리 날 선 목소리로 외쳐도 그는 로프까지 밀려간다. 무작정 행동한 대가다. 이제라도 김기찬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당장 맞설 생각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발을 놀려 빠져나와야 한다. 그러나 김기찬의 발은 제자리에서 겅중대기만 한다. 정의한이 김기찬의 몸을 샌드백 치듯 두들기기 시작한다. 레프트, 라이트, 레프트, 라이트…… 이제 쓰러지기 전까지 김기찬에게 출구는 없을 것 같다. 링은 닫힌 곳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공연히 초조해져 두 손을 비비다가 문득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 손가락을 쳐다본다.
가만!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들여다보며 가만히 탄성을 지른다. 내게도 링이 있어. K를 가두고 그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는 그런 링이. 그녀는 다시 섹스 후 깊은 숨을 내쉬며 쓰러지는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마침내 링을 벗어나 한 구의 시체처럼 드러눕는 K. 매번 그렇게 죽어나가면서도 또다시 그가 자신을 내던지는 그런 링이 내게 있었어. 그녀는 어떤 감동으로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아 눈을 부릅뜨고 체육관 안을 천천히 휘둘러본다. 우측 관중석 하단 벽에 붙은 광고판에 드링크제를 선전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입을 반지처럼 동그랗게 벌리고 웃고 있다. 미리, 명선 언니, 영혜 언니들이 그 입 속에서 튀어나온다. 내게도 있어. 그들은 그런 야유를 보내며 여자와 똑같은 모습으로 웃고 있다. K가 여자의 입을 빌어 키득거리며 말한다. 누,누구나 제 몸 제 마음 안에 싸우고 절망하고 환호하는 섬 하나씩은 가,가지고 있지. 착각하지 말어. 그녀는 실망의 표정을 애써 감추며 차가운 시선으로 링을 바라본다.
김기찬의 복부와 얼굴에 정의한의 훅이 기관총알처럼 들어간다. 김기찬의 눈가에 피가 엉겨 있고 눈두덩이 어느새 많이 부어올라 있다. 피는 바다로도 흘러들어가 바다를 포효케 한다. 그러나 막상 정의한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다. 아주 고요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도취의 극단까지 가면 저렇게 빈 얼굴이 될 수도 있겠다. 김기찬의 얼굴에도 역시 아무 표정이 없다. 그녀는 자포자기에서 오는 평화가 도취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K도 도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여자들 사이를 헤맸던 건 아닌가?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지. 여자들은 무서워서 싸우기를 회피했으니까. 하지만 난 아니야. 그녀의 주먹에는 어느새 또 힘이 들어가 있다.
김기찬이 기댄 로프가 점점 더 출렁인다. 퍽… 퍽… 로프에서 떨어져. 그러나 김기찬의 귀는 어떤 소리에도 닫혀 있는 것만 같다. 정의한의 주먹이 김기찬의 왼쪽 턱으로 들어간다. 김기찬의 고개가 모로 돌아간다. 마침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그 순간 정의한은 도취에서 깨어나 손을 번쩍 치켜들고 섬을 돌기 시작한다. 그녀는 올라가서 정의한의 손을 맞잡고 섬을 돌고 싶다. 레프리가 수를 센다.
원…… 투…… 쓰리…….
일어나, 임마. 아직 한 회전이 남아 있단 말이야. 청코너와 관중석에서 고함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는 슬로우 모션처럼 느린 동작으로 일어나려다 도로 무릎을 꿇는다. 그의 얼굴에서 무표정이 사라지고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한다. 두렵고 외로울 것이다. 진 자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동기 중 자기만 홀로 무대 밖을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도 저런 얼굴을 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얼굴은 K의 것이다.
김기찬이 결국은 바닥에 드러눕는다. 다시 레프리가 수를 세기 시작한다. 누워 있는 김기찬의 부은 눈두덩이 가장자리가 불빛에 잠깐 반짝인다. 우는가보다. 완전히 소진하여 동굴이 된 두 눈. 그 안에서 밀려나오는 것은 그냥 액체가 아니다. 지옥에서의 시간과 훈련, 그것을 견디게 해준 꿈, 그리고 좌절…… 그의 지난 삶이 전부 농축된 것이다. 무언가가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다. 그녀는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그녀가 김기찬에게서 얼굴을 돌리기도 전에 그것이 그녀의 눈에 꽉 찬다. K다. K가 울며 소리지른다. 꺼져! 다시는 나타나지마!……
오늘이 우리 부모님 결혼 기념일이야. 사흘 전 그는 자기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을 자기라도 기념해야겠다는 듯 평소보다 더 집착하듯이 그녀의 몸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일어나 앉아 김기찬의 바로 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허한 얼굴로 개새끼라고 몇 번을 되뇌었다.
어,엄마만 불쌍하게 됐지. 아버지는 금세 다른 여,여자를 만나 웃고 다녔어. 어떻게 그렇게 빠,빨리 새 여자를 만나서 어떻게 그렇게 조용하게 아,안 싸우고 살 수가 있지? 왜 엄마랑은 그렇게 모,못 살았지? 나도 아버지와 별다를 게 없어. 어떻게 어,엄마를 잊어버리고 이렇게 너랑 노닥거릴 수 있는 거니? 부자가 다 개새끼야…….
그 말투가 어찌나 은밀하면서도 고통스럽게 들리던지 마치 치부의 상처를 보여주는 것처럼 들렸다. 이제 그 상처들이 치유되고 있다는 징조라고도 여겨졌다. 그러나 잠시 후 그와의 끝은 그렇게 돌연하다던 소문이 이명처럼 ‘개새끼’라는 말끝에 따라붙었다. 명선 언니의 충고도 들렸다.
갑자기 자기를 자책하는 거야. 그리고는 연락이 뚝 끊어지고…… 아무 이유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내침을 당하는 기분, 그거 정말 더럽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 너도 그렇게 되기 전에 제발 끊어라.
정말 결별의 예고일까? 그녀의 머리 속에서 무수한 생각들이 오갔다. 그의 동굴에서 ‘너도 별 수 없었다. 너도 졌다’는 메아리 같은 것이 새로 들려왔다. 18년을 품고 온 것을 어떻게 넉 달만에 지워버릴 수 있는가? 자기가 해야 할 싸움을 나더러 치르라 해놓고 이제와서 나보고 졌다구? 비열해! 점차 선명해지고 있던 그녀의 미래가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싸움을 지속시킬 방도를 찾았다. 좋아, 비열함에는 비열함으로! 그녀 안에서 재치가 교활함으로 틀을 바꾸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급소를 찌르는 반칙을 감행했다. 실패하면 에이전시에서 완전히 쫓겨날 수도 있지만 성공하면 그를 KO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오빠는 어쩌면 정말 개새끼인지도 몰라.
그는 여자들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뜻밖의 욕에 잠시 무방비 상태의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문득 오빠가 오빠 엄마에게 사다준 약이 독약이라는 걸 오빠는 정말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정말 몰랐어? 난 자꾸 오빠가 자기를 때리고 집안을 시끄럽게 하는 엄마가 혹시 죽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사다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기네.
K의 안색이 석고 색으로 변하더니 눈가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는 확실하게 승리를 보장받고 싶은 욕심에 아껴두어도 괜찮았을 말을 기어이 뱉었다.
결국 엄마는 죽고 오빠는 자기가 죽였다는 죄책감에 이제는 엄마 편을 들기로 한 거야. 그러자니 자기를 어떻게든 학대해야 했겠지. 왜 오빤 그 좋은 오피스텔을 놔두고 여기로 여자들을 끌어들여? 혹시 이 방이 엄마가 죽었던 방과 비슷한 건 아니야? 난 오빠가 이 초라한 방에서 엄마 대신 다른 여자들을 사랑해주는 걸로 그 기억을 몰아내려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종의 굿판을 벌이는 거지. 그랬는데도 엄마는 또 살아나고, 그러면 마치 여자 탓인 것처럼 또 다른 여자로 바꾸고. 어찌됐든 제일 불쌍한 사람은 오빠야. 여자들이야 시간이 지나면 오빠를 잊어버리고 다시 좋은 사람 만날 수 있겠지만 오빠는 그 과거에 갇혀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잖아. 어쩌면 영영 그렇게 살지도 몰라.
그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고, 그의 손이 살기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손은 그녀의 목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그녀는 핸드백도 들지 않고 재빨리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문 밖까지 따라나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모험을 하는 기분으로 안에 소리쳤다.
오빠, 나는 내치면 안돼. 나만이 오빠가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단 말이야. 시간을 더 줘.
안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그녀 주변에 두텁게 내려앉았다. 너무 무서워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싶은 충동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패배를 자인하며 그녀 스스로 타올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녀의 외삼촌은 한 번 부도를 낸 후 결국에는 투견장까지 흘러 들어간 자신의 경우를 빗대어서 계속 이겨왔던 개라도 한 번 지고 나면 그 뒤로는 다시 이기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용히 내려가버려도 결과는 똑같지 않을까? 평생 겪었던 공포와 갈등을 다 모아도 그 밤에 겪은 것보다는 작을 것 같았다. 그녀는 엄지손톱에 피가 나올 정도로 물어뜯으며 손을 문에 대었다 떼었다를 반복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안에서 그가 좋아하는 랩송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랩은 그가 울음을 삼키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가시가 많아서 토해낼 수 없는 그런 울음을. 그 울음마저 보아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 경우 그의 패배는 돌이킬 수 될 수 없는 것이 되고, 그리되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게임도 끝이 나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여 가만히 옥탑을 내려왔다.
그리고 사흘, 그는 그녀의 안테나가 뻗어 있는 어느 곳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여자들이 옥탑을 떠나고 나면 그 즉시 다른 여자를 찾아나섰던 전례에 비추어보면 확실이 사건에 속하는 일이다. 아직도 그녀와의 게임이 진행 중이라는 표시다. 그녀의 얼굴에 득의만면한 표정이 실린다. 순간 김기찬이 몸을 뒤집더니 풍뎅이처럼 등을 오무린다. 아마도 우는 얼굴을 가리고 싶어서일 게다. 땀으로 번득이던 몸통이 아까의 윤기는 다 잃어버리고 버석버석해 보인다. K도 저러고 있겠지. 갑자기 발가벗겨져 흉한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저렇게 요 위에 얼굴을 처박고 울고 있을 것이다. 한동안은 그럴 거야. 그러다 자기에게 새 옷을 입혀줄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낼 거야. 벗긴 사람이 맞는 옷도 고르는 법.
나인…… 텐!
레프리가 정의한의 오른손을 번쩍 들어준다. 그의 왼손이 따라 올라가고, 그의 세컨이 뛰어나와 그를 얼싸안는다. 관중석에서 이는 박수소리가 해일이 달려오는 듯 거세다. 김기찬은 어느새 사라졌다. 정의한이 한 번 더 사방을 돌며 인사하고 섬을 떠난다.
섬은 감쪽같이 피의 흔적을 지워내고 다시 텅 비어 있다. 잠시 후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또 다른 손님들의 이름이 불리어질 것이다. K의 섬도 아직은 비어 있겠지? 그런데 이곳에서처럼 다른 이름이 불리어지면 어쩌지? 이제까지 그는 단 1회의 도전만 받아들였는데…… 그녀는 다시 손톱을 깨문다. 그녀의 입 속에 피가 스며들어 비릿한 냄새가 퍼진다.




강건임1999년 [문예중앙] 신인상 당선. 2002년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