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특별호(통권 58호)

[소설]

중량초과

이대환

평양에서 민족작가대회가 열리는 2005년 여름의 그날 아침, 한 젊은이가 느닷없이 심각한 복통을 일으켰습니다. 남쪽 작가들 3조를 담당할 북쪽 기관원이 이부자리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는데, 물론 피의자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그것이 쥐도 새도 모르게 피의자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됩니다. 그의 빈자리에 긴급히 투입된 이가 바로 피의자입니다.
졸지에 동원된 피의자는 흐뭇한 희소식을 감추려는 듯이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남쪽 작가들과 닷새를 같이 돌아다닌다니 호기심이 꿈틀대고 백두산과 삼지연을 찾아간다니 즐거움이 북돋았던 겁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못 만났던 인간들, 그때까지 한 번도 못 보았던 명승지들. 아주 야릇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미열처럼 머리에 맴돌기도 했습니다. 그즈음에 피의자는 막 재배치를 받아 무역 일꾼으로 나서려는 참이었습니다. 중국어에도 능통한 스물일곱 살짜리 당원. 이 미혼의 유망주는 남쪽 여성작가들을 뜯어볼 탐심도 품고 3조 버스에 올랐습니다.
피의자는 운전석 뒷자리의 통로 쪽에 앉고, 옆에는 남쪽의 마흔 살 먹은 털보시인(증인1)이 앉았습니다. 수은주가 35도를 돌파한 땡볕 속에서 버스에 태워진 남쪽 작가들의 방북 첫 나들이 장소는 평양 시내 개선문이었습니다. 털보시인과 피의자가 악수를 나누고, 피의자가 먼저 말을 붙였는데, 북쪽 기관원과 남쪽 시인의 자못 역사적인 첫 대화가 이랬습니다.
“몽땅한 치마를 입은 여성작가가 앉았으면 더 반가웠을 겁네다.”
“젊은 동무가 헛물켜기를 좋아하나 보누만.”
“사내 마음 다 똑같지 않슴네까? 민망하게도 여성작가 선생들의 엉덩이가 보일락 말락 하던데, 남쪽에는 그런 여성들이 많슴네까?” 
“제 멋에 사는 거요.”
“술 취한 사내가 손을 대면 어쩝네까?”
“성추행으로 고소해서 망신주고 처벌하고, 어떤 경우에는 돈도 벌어.”
“매매관계가 아닌데 돈도 법네까?”
“남북관계처럼 쌍방합의가 중요하거든. 쌍방합의를 보자면 사내가 돈을 싸들고 나가야지. 맨살 허벅지에 뜨거운 시선을 주는 것도 성추행이 될 수 있어요. 돈 없는 동무는 이번 대회 기간에 조심하시오.” 
피의자가 구김살 없이 웃었습니다. ‘돈 없는’이란 말에 아무런 까탈을 부리지 않았던 겁니다. 버스가 개선문에 다가서며 속도를 줄일 때는 털보시인이 슬쩍 옆구리를 건드렸습니다.
“개선문은 프랑스 빠리에도 있던데, 이 뙤약볕에 꼭 내려야 하나?”
“거기에도 있고 여기에도 있으면 뭐 어떠슴네까? 그늘 속에서 숨이라도 돌리고 가면 돼잖슴네까?”
그러나 1조 버스에서는 딴판이었답니다. 털보시인보다 다섯 살 더 먹은 남쪽 소설가(증인2)는 털보시인과 비슷한 셈에서 비슷한 말을 꺼냈다가 중량급 유도선수 같은 체구의 북쪽 젊은 여성에게 따끔한 훈시를 들었던 겁니다. 주체적 자존심이 가시처럼 촘촘히 박힌 말들을 꾹 참고 다 들어준 증인2가 한마디만 했답니다.
“소설가가 동무를 설득하려고 해야지 동무가 소설가를 설득하려고 덤비면 되나? 그래도 참 똑똑해.”

열이레 둥근 달이 개마고원을 비추는 새벽 세 시. 피의자는 해발 1,300미터 베개봉호텔 정문에서 6조 승합차를 탔습니다. 담당 조가 3조에서 6조로 바뀐 까닭은 대형버스가 승합차로 바뀌어서 기존 각 조를 둘씩 쪼갠 탓이었습니다. 백두영봉으로 출발. 차 안에는 곧 사람소리가 사라졌습니다. 술로 새벽을 맞은 작가들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겨 꾸벅꾸벅 졸고, 눈을 붙인 작가들은 달이 천지(天池)로 몰려드는 안개나 구름을 막아줄 부적이라 믿는지 자꾸만 달을 바라보았습니다. 완만한 오르막 황톳길을 달리는 승합차의 전조등 불빛이 어둠에 잠긴 이깔나무 숲속을 마구 휘저어서 곤히 잠든 잎들이 새처럼 날개를 치며 깨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용케 아무도 배탈을 일으키지 않아 한 시간쯤을 쉼 없이 달릴 수 있었습니다. 초원에 닿았습니다. 여명이 번져오는 초원에는 별처럼 어여쁜 들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피의자는 손가락을 꼽으며 학창시절에 알았던 백두의 들꽃이름을 더듬었습니다. 들쭉꽃, 담자리꽃, 두메아편꽃, 좀참꽃, 바람꽃, 물싸리꽃, 우정금꽃…….    “아, 모국어여. 이 새벽의 백두 초원에 이렇게도 어여삐 피어 계시나이까.”
차에서 내린 남쪽 늙은 시인이 감격의 독백을 하고 큰절 올리듯 풀밭에 엎드려서 노란 들꽃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피의자는 그의 말이 방금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들꽃이름과 관련이 깊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이 시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증인에 올리지 못합니다.)
좀 가파른 초원의 오솔길을 따라 이십 분쯤 걸었을까요. 문득 피의자는 아득히 펼쳐진 하얀 구름바다 위에 서 있었습니다. 새벽의 백두영봉이 거느린 운해였습니다. 평양이나 서울의 거리에서 바라보면 서녘하늘에 내려섰을 둥근 달이 장군봉 너머로 구름바다의 수평선 위에 떠 있었습니다. 구름바다는 시간이 증발한 거대한 사진의 세계 같았습니다. 찬바람이 세게 몰아치고 있어도 하얀 물결은 꽁꽁 얼어붙은 양 어느 하나 흐트러질 줄 몰랐습니다. 
“해다! 태양이다!”
피의자는 젊은 여성이 내지른 탄성에 끌려 얼른 돌아섰습니다. 병사봉 너머로 새맑은 해가 솟아올랐습니다. 떠오르는 해와 기우는 달이 멀리서 마주보며 공존하는 새벽, 드디어 백두영봉이 두터운 어둠의 보자기를 걷어내서 청람의 새파란 천지를 드러냈습니다. 오, 민족의 자궁이어, 푸른 생명수여, 우리의 영원한 양수여. 누군가 부르짖듯 외쳤습니다. 피의자는 그저 황홀했습니다. 인간들이 모여 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의 세계를 벗어난 듯했습니다. 과업도 임무도 놓쳤습니다. 수령님도 장군님도 가뭇없이 까먹었습니다. 잠깐이었지만 현실의 존재를 초월했습니다.
별안간 해소기침 같은 기계 소음이 터지고,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지금부터 ‘통일문학의 해돋이’를 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피의자는 바로 옆의 남쪽 작가가 쥐어박듯 빈정대는 말을 들었습니다.
“북쪽에는 벌써 6․15시대가 와 있다는데, 여기서 법석을 떨어 어디에 쓰겠다는 거야?”
언중유골. 피의자는 그의 말에 박힌 뼛조각을 족집게처럼 집어냈습니다. 긴급히 투입된 피의자가 긴급히 받은 지시들에는 남쪽 작가들이 사소한 실수를 해도 탓하지 말고 ‘6․15시대에 뭘 그러시느냐’고 너그러이 넘어가라는 지침이 포함되었고, 실제로 버스에 동승한 북쪽 기관원들은 남북화해의 목록에 넣을 만한 대화의 말꼬리를 틀어쥐기만 하면 웃는 낯으로 ‘6․15시대 아닙네까’라는 말을 서슴없이 해댔습니다. 피의자는 슬쩍 불평분자를 훑어보았습니다. 키 170센티에 몸무게 66킬로그램인 자신과 엇비슷한 체격, 사십대 후반(증인3 ; 이 탄원을 쓰는 탄원인). 평양의 3조 버스 안에서 본 얼굴이 시퍼렇게 얼어 있었습니다. 여름이라고 백두영봉을 만만하게 여겼는지 옷차림이 얇았습니다.
증인3은 행사를 외면할 듯이 천지를 내려다보고, 피의자는 엉성하게 모여선 작가들 쪽으로 몸을 틀었습니다. 평양에서는 바람이 건드리기만 해도 팬티를 드러낼 몽땅한 치마로 아랫도리를 아슬아슬하게 가렸던 남쪽 여성작가가 두툼한 외투를 조여입고 마이크 앞에 서서 엄중한 문장의 민족적 선언을 낭독했습니다. 몽땅한 치마와 엄중한 문장 사이의 괴리감을 가늠하기 어려워 피의자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 우리들처럼 아름다운 아침을 맞는 이들은 없습니다.”
북쪽 여성시인의 인사말을 증인3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받았습니다.
“옳소. 거기서 그 법석만 떨지 않는다면.”
북쪽 여성시인의 마이크를 키 작은 남쪽 남성시인이 물려받고, 그가 시낭송을 마치자 피의자에게는 낯선 북쪽 남성작가가 나서서 6․15공동선언의 실천만이 우리들의 갈 길이라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다시 남쪽 여성작가가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당차게 애절한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분위기를 압도했을 때, 피의자의 팔뚝을 건드리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증인3이었습니다.
“동무, 조국이 하나고 둘이고 간에 우선 추워 죽겠어. 저 시는 엄청 길어. 이 시간에는 어울리지도 않고. 곧 미제(米帝) 탱크가 나와. 소제(蘇帝) 중제(中帝) 탱크는 안 나오고. 아까 보니까 저쪽 짧은 절벽에 사무실 같은 게 박혀 있던데, 나를 좀 데려다 주소. 얼어죽진 말아야 조국이 하난지 둘인지 따질 거 아니오?”
장난기 어린 시큰둥한 말을 피의자는 밉게 듣지 않았습니다.
“백두 천지에서 감기 드시면 백두 천지에 대한 예의가 아닙네다.”
증인3과 피의자가 슬금슬금 작가들의 꽁무니를 따라 걸었습니다. 미제 탱크가 당차게 애절한 목소리로 백두영봉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선생님도 시를 씁네까?”
“시? 남쪽에는 시인이 너무 넘쳐나. 포화상태를 넘었어.”
“시인이 그렇게 많습네까?”
“진짜든 가짜든 아무도 안 말려. 여기 와 있는 노시인은 요새를 시의 밤이라고 해. 시인이 넘쳐나는 사회가 시의 밤이라니, 너무 웃기지?”
“잘 모르겠습네다. 선생님은 소설갑네까?” 
“그건 그건데……, 자본주의 시장질서에서는 유명상표라야 잘 팔려. 그건 알아?”
“압네다.”
“여기에도 와 있는데, 남쪽에서는 유명상표 같은 소설사업가들이 시장을 독점해 버렸어.”
“남쪽에서는 소설도 상품입네까?”
피의자가 멈춰 섰습니다. 
“요샌 더 철저하지. 뜬다는 말은 모를걸.”
“그걸 왜 모릅네까?”
“공중으로 떠오른다, 이것도 맞긴 맞는데, 남쪽에서는 몸이든 책이든 잘 팔린다는 뜻으로 굳어졌어.”
“그것 참.”
증인3이 발을 떼며 떠들었습니다.
“남쪽에는 소설 쓰는 인간들 중에도 종이비행기가 많아. 가련하게도 뜨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는 거지. 그 안에 민족 현실은 없어. 자기 문학에서 민족 현실을 유기하고 있으면 여기 와서 조용히 자연이나 감상할 일이지, 민족입네 조국입네 통일입네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왜 자신을 속이는 거야? 그것들을 문학의 장신구로는 삼겠다는 거야?”
피의자는 동양어문학을 전공했다는 자기소개를 꼬불쳐두고 멀뚱히 눈을 껌벅이면서 증인3에 대해 삐딱해도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한 조국의 살벌한 모국어들이 백두영봉 찬바람 속으로 산탄 총알처럼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증인3과 피의자가 보보행진을 여든 걸음쯤 했을까요. 평지가 끊긴 지점에 닿았습니다. 내리지른 비탈에 삽으로 다듬은 계단을 디뎌 여남은 걸음 내려갔습니다. 서너 발 높이의 절벽을 동굴처럼 파먹은 방이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묵는 초소 같았습니다. 피의자는 증인3을 문밖에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 입방 허락을 받아줬습니다.
증인3은 운동화를 벗고 천장 복판에 희미한 백열전구 하나를 달랑 매단 널찍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군복 입은 열댓 사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일제히 담배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증인3은 마음이 졸려도 침착했습니다. 방문 앞에 앉으며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고, 남쪽에서 왔느냐라는 답례를 받고, 정면에 마주앉은 시커먼 군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얼른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끽연에 동참하고, 연기를 빨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궁리를 했습니다. 증인3이 맨 나중 담배에 불을 댕겼으나 삼십 초도 안 지나서 맨 먼저 담배에 불을 댕긴 처지로 바뀌었습니다. 군인들 모두가 또 일제히 담배에 불을 댕긴 겁니다. 끽연으로 묵언의 새벽 조회를 여는 이상한 신도들 같았습니다. 아침담배만은 멀리해온 증인3이 어쩔 수 없어서 또 담배를 물었습니다. 담배를 피운다, 이 동질성이 모국어나 생김새보다 더 끈끈한 시간이요 장소였습니다.
“여기 근무하면 춥지 않습니까?”
증인3이 간신히 찾아낸 질문에 맞은편 군인이 재깍 반박했습니다.
“일없습네다. 여름엔 시원해서 더 좋습네다.”
모두가 일제히 한 모금을 빨고 모두가 일제히 연기를 길게 불었습니다. 백두영봉을 지키는 군인들은 무표정했습니다. 경계심인지 호기심인지 눈빛만 번뜩였습니다. 증인3인이 윗몸을 구부리며 팔을 뻗어 꽁초들이 수북한 시커먼 사발에 꽁초를 꽂고 나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민족의 영산에 근무하면서 매일 정기를 받으니 앞날에 큰 광영이 찾아오겠습니다.”
맞은편 군인이 또 재깍 나섰습니다.
“우리는 위대하신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서 행복을 느낍네다.”
“그분이 서거하셨을 때는 지구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말이 나왔는데, 오늘 새벽에도 태양이 솟아올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해석이 다소 난해했는지 대화가 끊겼습니다.
“담배 두 대면 몸을 녹였을 겁네다. 여기는 출입금지여도 인도적으로 특별히 허락한 겁네다. 그만 나가시요. 나가서 말은 내지 마시요.”
맞은편 군인의 지시를 받들어 증인3은 군말 없이 엉덩이를 일으켰습니다. 추위를 핑계 삼아 보고 싶었던 곳을 보았으니 더 바랄 것도 없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빼먹지 않았고, 그 진심의 증표로써 네 개비만 빼낸 ‘에세 라이트’와 라이터를 방바닥에 두고 나왔는데, 굳이 한 병사가 뒤좇아 와서 손님이 흘린 물건을 넘겨줬습니다.
 
백두영봉을 다녀온 그날 한낮이었습니다. 승합차들이 삼지연 대기념비 광장 앞에 멈췄습니다. 광장은 넓었습니다. 학교 운동장 몇 개를 합쳐놓은 만했습니다. 그 바닥에는 도마 크기의 네모반듯하고 반지르르한 돌들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습니다. 피의자가 입구 반대편 저쪽에 우뚝 솟아오른 동상을 향해 묵념을 올리는 사이, 곁에서는 남쪽 시인 둘이서 내기를 걸었습니다. 동상은 키가 415센티고 몸무게가 4.15톤일 것인가, 아닐 것인가. 동상의 인물은 생일이 4월 15일이니까 동상의 키와 몸무게를 거기에 맞췄을 것인가, 아닐 것인가. 이 문제였습니다.
“이 너른 돌바닥 어디에 칼자국 같은 빈틈이 생겨서 풀 한 포기 돋아난 적이 있었는가.”
피의자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동상을 향해 중얼거린 이는 증인3이었습니다. 얼굴 씻고 옷 갈아입고 장군님의 것 같은 색안경을 낀 그는 새벽의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삼지연은 어딨나? 그 못가나 거닐면 좋겠는데.”
“이곳은 처음입네다. 저쪽 뒤편이 삼지연일 겁네다.”
피의자가 턱짓으로 동상 쪽을 가리켰습니다. 감히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없는 동상이었나 봅니다. 이때 흥정 같은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헌화가 문제였습니다. 화려한 꽃다발 두 개를 준비한 북쪽 진행자가 남쪽의 아주 잘 팔리는 남성 소설가에게 6․15시대 아니냐며 함께 헌화하러 가자고 매달리고, 그는 돈 달라는 불쌍한 손을 피하듯 요리조리 거절했습니다. 북쪽 진행자가 상대를 바꿨습니다. 분홍 남방의 아담한 남쪽 여성을 그가 교수님이라 불렀습니다. 임꺽정 연구도 하지 않았느냐, 이번 북쪽 대표단에 홍명희 선생의 친손자도 계시는데. 이런 인연을 마치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바쁜 말씨로 끌어댔지만, 교수는 뒷걸음이나 게걸음으로 몸을 뺐습니다. 문득 피의자가 답답한 꼴을 못 봐주겠다고 혀를 차듯이 쏘았습니다.
“헌화 같이하면 어떠습네까? 백두 천지에서 조국은 하나라고 다짐했던 사람들끼리 뭘 그러십네까?”
증인3이 얌전히 칭찬을 했습니다.
“동무의 그 말투가 좋았어. 뭐 그리 계산서가 복잡하냐, 이 핀잔이 좋았어. 저 꽃다발에도 이념과 과거가 담겨있어 그런 거니까 마음 넓은 동무가 이해해.”
꽃다발 두 개를 안은 북쪽 진행자 넷이 빳빳한 근위병의 걸음걸이로 뙤약볕 쏟아지는 너른 광장을 이등분하며 동상 앞으로 다가가는 동안, 증인3과 피의자는 광장 가장자리를 따라 드문드문 널린 나무그늘을 드나들며 느릿느릿 걸어갔습니다. 대화도 없었습니다. 증인3이 권태로워 보여서 말 걸기가 거북했다고, 피의자는 기억합니다.
피의자가 가까이서 쳐다본 구릿빛 동상은 거인을 압도할 어마어마한 덩치였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내기를 건 남쪽 두 시인의 그 수치들이 부질없는 과장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동상 좌우에는 투쟁의 부조들이 기다란 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바친 대가로 무생명의 영원을 부여받은 호위부대 같았습니다.
특별한 미루나무가 있었습니다. 동상의 인물이 건강한 생의 어느 날에 몸소 이 먼 곳까지 현장지도를 나왔다 기념사진을 박은 영광의 나무였습니다. 고원지대의 혹한에 시달려온 탓인지 시원스레 죽죽 뻗어 오르지 못한 그것은 줄기가 하얘서 자작나무로도 보였습니다.
“무슨 기념수가 하필이면 분단을 상징할 게 뭐야.”
증인3이 푸념했습니다. 비로소 피의자도 보았습니다. 땅위에서 두 줄기로 갈라진 영광의 나무가 땅속에는 한 몸인지 두 몸인지 애매해 보였습니다. 동상의 인물이 생의 한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남쪽 손님들이 미루나무 앞에서 차례차례 포즈를 잡았으나 증인3은 그냥 등을 돌렸습니다. 피의자는 마치 자력(磁力)에 끌리듯 그를 따랐습니다.
“삼지연이나 한 바퀴 돌게 해주지.”
증인3이 툴툴댔습니다. 동상에게 보낸 항의나 원망이란 것을 피의자는 눈치 챘습니다. 못가로 나가는 것은 금지였던 겁니다.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승합차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피의자는 증인3과 나란히 걷고 있었습니다. 
“형님, 왜 억지로 걸어요? 설사했어요?”
증인1, 큼직한 카메라를 옆구리에 낀 털보시인이었습니다.
“설사? 우리가 고스톱 치냐? 많이 박았어? 실컷 박아.”
“사진은 찍는다고 합시다. 박는 일은 저런 데서 해야지.”
털보시인이 십여 미터 앞에 도란도란 걸어가는 두 여자를 가리켰습니다. 피식, 피의자가 방귀 뀌듯 웃었습니다.
“동무는 미혼이라며 여자에 대해서 뭘 알아?”
증인3의 퉁바리를 피의자가 냉큼 받아쳤습니다.
“알 건 다 압네다.”
“그래? 그러면 오른쪽은 어때?”
다리가 막대기 같은 비쭉한 체구였습니다. 
“에이, 못 씁네다. 아무 맛도 없습네다.”
“어쭈구리, 제법 보네. 그러면 왼쪽은?”
중량급 유도선수처럼 우람한 체격, 180센티에 거의 닿고 80킬로그램을 거의 채울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건 누굽네까?”
털보시인이 답했습니다.
“남쪽 제품이 아니올시다. 1조 버스에 타는 북쪽 민화협이라는데, 동무는 몰라?”
“모릅네다.”
“어떻겠어?”
“에이, 저건 중량초괍네다. 쌀도 모자라는데.”
털보시인이 카메라를 잡으며 콸콸 온몸으로 웃었습니다. 중량초과의 실물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질이 위아래로 마구 흔들리는데, 두 여자가 얼핏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증인3은 휘익 몸을 돌려 어마어마한 동상을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형님, 뭐해요? 중량초과, 재밌잖요?”
증인3이 털보시인의 귀를 당겨 속삭였습니다. 피의자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아, 형님!”
이 외마디 비명 같은 외침은 피의자의 고막도 찔렀습니다.

물을 담은 컵에다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이었다고나 할까요? 털보시인이 잉크 한 방울이고, 그가 탄 승합차는 컵이고, 그와 동승한 남쪽 작가들은 물이었습니다. 중량초괍네다, 쌀도 모자라는데. 삼지연 대기념비 광장에서 삼지연비행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그 말이 신종 바이러스처럼 털보시인과 동승한 남쪽 작가들의 머리를 감염시켰습니다. 그리고 삼지연비행장에서 평양 순안공항으로 날아갈 프로펠러비행기는 승합차보다 훨씬 거대한 컵이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의 워밍업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이 비행기, 중량초과 아닙네까? 우리가 오늘 쌀밥을 너무 많이 먹었습네다.”
꼬리 쪽에서 나온 큰소리에 한바탕 폭소가 터졌습니다. 그러나 비상구 옆에 앉은 피의자는 웃지 않았습니다. 오지게 야유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순안공항에 내린 피의자가 증인3에게 바짝 붙었습니다. 
“소문 많이 내십시요.”
증인3이 대뜸 심각하게 받았습니다.
“알았어. 털보는 사람만 좋아서 뭐 하나 필이 꽂히면 주체를 못하는 성격이야. 그만하라고 주의를 줄게.”
“삼지연 광장에서 귓속말로 해준 말은 어떤 내용입네까?”
“비밀이야. 알면 동무가 다쳐.”
“에이, 왜 이러십네까?”
“6․15시대에 말이지?”
“너무 그러십네다.”
“정말이야. 특급비밀로 해야 돼.‍털보도 그 얘기는 안 흘렸을 거야.”
증인3은 말로는 겁을 주면서 눈으로는 정을 줬습니다.
“필이 꽂힌다, 영감이 오는 걸 붓이 꽂힌다고 합네까?”
“필이 붓은 아닌데, 영감이 왔다, 그건 맞아.” 
증인3이 피의자의 어깨를 툭 두드렸습니다.

피의자는 삼지연 광장의 돌바닥에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매미 울음소리가 아련히 들려왔습니다. 남쪽 작가들이 디지털카메라의 배경으로 삼았던 미루나무 우듬지에서 우는 것 같았습니다. 피의자는 손을 한 번 흔들었습니다. 매미야, 배고픈데 쉬어라. 이런 말이 피의자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데,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눈앞에 젊은 여자가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아는 얼굴이었습니다. 건장한 사내 같은 알몸이 드러났습니다. 피의자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습니다. 중량초괍네다, 쌀도 모자라는데. 피의자를 덮칠 듯이 내려다보던 여자가 연기처럼 사라지자 그 자리에 어마어마한 동상이 까마득하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의 조화였습니다. 동상이 크게 웃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동상의 한쪽 어깨 위에 목말을 탄 것처럼 올라앉은,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자주 본, 뚱뚱한 그분이 웃고 있었습니다. 동상의 얼굴보다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분은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어린양을 부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중량초괍네다, 쌀도 모자라는데. 이 말이 피의자의 목구멍을 빠져 나오는 찰나에 재치기가 터지고, 어마어마한 동상과 그분이 피의자를 깔아뭉갤 것처럼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피의자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휘저었습니다. 동상의 이마가 광장바닥을 찍기 직전에 요행히 눈을 떴습니다. 생사가 교차한 간발의 차이였습니다.    열차는 옅은 어둠 속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피의자는 꿈이 꺼림칙했습니다. 밥 먹다가 밥그릇을 깬 듯이 불길했습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고 국경을 넘어설 때의 설렘과 기쁨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습니다. 남쪽 작가들이 돌아간 뒤에 열렸던 총화의 토론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중량초괍네다, 쌀도 모자라는데. 남쪽 작가들이 이 말을 입에 달고 내려갔는데, 최초에 누가 퍼뜨렸느냐, 이건 중대한 사건이요. 이 문제 제기에 대해 중량급 유도선수 같은 여성이 의견을 냈습니다. 작가들은 재담꾼이기도 합네다. 빼빼한 여성을 선호하는 남쪽의 남성작가들이 나 같은 여성을 놀려먹자고 지어낸 말일 수도 있습네다. 이러고는 피의자를 매섭게 째려보았습니다. 피의자는 칼끝이 가슴을 건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삼지연 광장에서 털보시인이 자기 엉덩이를 가리키며 너무 크게 웃었던 것에 혐의를 두는구나. 피의자의 속살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고맙게도 깡마른 남성 동무가 다른 말을 꺼냈습니다. 남쪽 여성작가들은 차림새가 그게 뭡네까. 그런 차림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 앞에서 활보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비판해야 합네다. 그러나 이내 중량초과와 부족한 쌀 문제로 돌아갔습니다. 문제 제기를 한 동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오물거렸습니다.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지만 도저히 덮을 수 없는 무언가를 잡아냈다는 뜻이었습니다. 중량초괍네다, 쌀도 모자라는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절대로 인민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우리 박 동무의 건장한 몸을 중량초과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러면 말이요, 생각을 해보면 말이요…….
열차가 어느 역에 멈췄습니다. 별안간 피의자는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 총화에서 배꼽 밑으로 감춰야 했던 살벌한 긴장감이 화들짝 분출한 것이었습니다. 중량급 유도선수 같은 여성의 날카로운 눈초리, 감히 호명하진 못했으나 모두가 똑같이 입안에 가두고 있었을 하나의 이름. 피의자는 선양(瀋陽) 구경도 싫어졌습니다. 통역이든 무역이든 내던지고 당장 열차에서 뛰어내리려 했습니다.
 
피의자는 중국어에 능통합니다. 이것이 중국에서 다른 탈북자들만큼 고생하지 않을 유일의 조건이었습니다. 2005년 8월부터 2007년 3월까지 밀항자금을 마련하느라 고달픈 날들을 보냈습니다. 피의자의 가슴에는 늘 화살이 박혀 있습니다. 할머니입니다. 항일 빨치산부대의 막내였다는 새파란 남편을 평양 함락당할 때 잃고 갓난 아들 하나를 키웠는데, 군관으로 성장한 외아들이 훈련 나갔다 폭발사고로 죽었습니다. 팔순 넘은 외로운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피의자. 현재는 할머니의 안부를 까맣게 모릅니다. 살아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 이마저 모릅니다.
화물선 밑바닥에 쥐새끼처럼 박혀 인천항으로 들어온 피의자가 경찰관 앞에 스스로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다음은 검색기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밀항한 중국 조선족이냐, 진짜 탈북자냐.
인생은 인연의 자계(磁界) 안에서 이뤄집니다. 피의자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남쪽에 사는 두 문학인, 바로 증인1과 증인3이었습니다. 털보시인과 삐딱해도 좋아 보였던 작가의 이름을, 피의자가 똑똑히 기억했던 겁니다.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삼지연 광장에서 피의자와 함께 성희롱 대화를 나누었던 시인과 작가가 틀림없는 그때 그 동무라고 확인해주지 않았더라면, 피의자는 중국으로 추방당하지 않았을까요?
삼지연 광장에서 증인3이 털보시인에게 속삭였던 말을 남쪽 기관원이 캐물었습니다. 증인3은 고스란히 기억했습니다.          
“한 번만 더 씹어 봐라. 중량초괍네다, 쌀도 모자라는데. 이건 무시무시한 반체제 발언이야. 저 뒤를 봐. 쌀도 모자라는데, 저 동상은 어마어마하게 중량초과야. 쌀도 모자라는데,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그 양반은 또 얼마나 중량초과야? 인민이 굶어죽고 굶주리는 시절에는 공산주의를 스스로 모욕하는 중량초과지.”
이 말을 들은 피의자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억울한 심정을 털어놨습니다.
“북쪽에서는 그저 웃자고 농담도 못 합네까?”

피의자가 하나원을 마쳤습니다. 주민등록번호를 얻고, 주민등록증을 받고, 정착금을 탔습니다. 따뜻한 남쪽 지방으로 내려와 방을 얻었습니다. 증인3은 피의자에게 인간적으로 참 미안했습니다. 아는 곳에 빠짐없이 취직자리를 부탁했습니다. 달포 만에 세 곳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건설회사, 자동차부품업체, 그리고 중국어 학원. 피의자가 두 번째를 찍었습니다. 월급이 제일 많은 데다 중국수출업무 보조원이었습니다. 일을 착실히 익혀서 보조원 딱지를 떼는 조건이기도 했으니, 북쪽에서 놓쳤던 무역 일꾼의 꿈을 남쪽에서 이룰 자리였습니다.
2007년 가을에 취직한 피의자는 지각 한 번 없는 모범사원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여름에 이르러 피의자는 보조원 딱지를 떼도 되겠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 세계경제는 지각변동과 같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미국 발 금융위기가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명히 표출하는 가운데 불원간 세계 실물경제를 뒤흔들어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세계공황이 닥칠 것이라는 뉴스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더운 날 퇴근시간이었습니다. 에쿠스 승용차를 타는 사장이 ‘관광버스’라는 이름을 단 통근버스로 출퇴근하는 피의자를 사장실로 불러 푹신한 소파에 앉혔습니다. 커피가 나오고 칭찬이 이어졌습니다. 피의자가 삼십 년 삶을 통틀어 처음 받는 황송한 대접이었습니다.
“황 부장이 빠지면 정 과장은 맡은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중국수출 업무에 미숙한데, 자네 역할이 커지게 돼. 연봉도 파격적으로 30퍼센트 인상이야. 더 잘해야 돼.”
황송한 자리를 더욱 빛내는 황송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면 황 부장님은 더 승진하시게 됩니까?”
“우리 회사가 이 난국을 돌파해 나가려면 몸집을 줄이는 게 최우선이야. 황 부장은 너무 무거워졌어. 이를 악물고 구조조정을 해야 돼. 지금은 중국도 심각해. 문 닫는 대형공장이 속출하고 있어. 멈칫거리다가 중국 자동차 내수시장으로 번지는 날에는 우리도 못 버텨.”
“황 부장님은 대학 다니는 두 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자네가 걱정할 몫이 아니야. 자네 앞길도 멀잖아? 어서 집도 장만하고 결혼도 해야지. 그리 알고 나가 보게.”
피의자는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기 바쁘게 황 부장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습니다. 두 사람은 해질 녘에 포장마차 모서리를 차지했습니다. 대면할 수 있는 자리로 골랐던 겁니다. 오뎅 안주에 소주 한 병을 거의 비우니 꼼장어구이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사장님이 제일 엄청난 중량초과지만, 부장님이 퇴직하시고 그 업무를 홀몸인 제가 차지하면 저도 중량초과가 됩니다. 중량초과는 사양하겠습니다.”
피의자가 ‘네다’ 쪽으로 꼬부라지려는 혀를 의식하면서 의견을 또렷이 밝혔습니다. 황 부장은 우선에 ‘중량초과’가 궁금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바꿔버린 삼지연 광장의 성희롱 대화를 털어놓고 싶지 않은 피의자가 ‘자기 분수에 넘친다는 말을 우스개로 하는 소리’라고 설명해 줬습니다. 노조위원장이 사장 앞에서 거만하게 설쳐대는 꼴을 몹시 괘씸히 여기는 황 부장이 금테 안경을 만지작거리고 나서 말간 소주잔을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북한은 농담에도 평등주의를 담나. 배고픈 인민들끼리만 배고프게 평등한 세상인데.”
두 사람은 소주를 세 병만 비우고 일어섰습니다. 술값을 내려는 피의자의 뒷덜미를 황 부장이 잡아 당겼습니다.
“임마, 너한테 중량초과라는 소리를 듣기는 싫어.”       

8월이 넘어갔습니다. 한가위가 열나흘 남았습니다. 이날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관리부서 30%, 현장부서 20%를 감원하겠다는 사장의 정리해고 선언에 대한 결사반대. 물론 피의자는 조합원이 아니었습니다. 탈북자가 노조에 가입하면 ‘머리에는 여전히 수박물이 들었다’는 의심을 받을 테니까 아예 마르크스도 레닌도 잊어먹고 살기로 했던 겁니다. 그러나 피의자는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업무처리능력 미숙과 발전 가능성 희박, 이것이 사유였습니다. 피의자는 황당했습니다. 아주 더운 날 퇴근시간의 황송한 대접과 제안을 사양했던 것이 황당한 결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피의자에게 황당한 일은 또 일어났습니다. 황 부장을 지켜내려 했는데, 정작 그는 ‘명퇴 신청’을 하고 출근을 그만뒀습니다. 중량초과를 멈춘 것인지, 사장과 타협한 것인지. 피의자는 헷갈렸습니다.
낡은 트럭과 철제 책상으로 급조한 바리케이드가 정문을 막아서고, 기계가 멈춘 공장 안에는 라면박스와 생수병이 쌓이고 신나통도 한쪽 구석에 고이 모셔졌습니다. 피의자는 출근을 멈췄습니다. 정리해고 대상자가 회사 정문에서 얼쩡거리면 오해를 받을 것 같았습니다. 노조를 응원하러 나왔다거나, 모가지를 붙여달라고 사측에 빌붙으러 나왔다거나.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았습니다. 정문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은 사측이거나 기관원이었으니까요.
증인3이 오랜만에 피의자에게 전화를 걸어 신문 보니 시끄럽던데 어떻게 지내느냐며 염려를 보냈습니다. 피의자는 사실대로 간략히 상황을 알렸습니다. 증인3이 너털웃음을 앞세워 부드럽게 충고를 했습니다.
“사람이 중량초과를 완전히 안 하고야 살아갈 수 있나. 어느 정도는 하면서 살아가야 돼. 자네는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작가처럼 살려고 하네. 어쨌든 자네 방식대로 밀고 나가 봐. 그것이 북쪽과는 다른 남쪽의 장점이기도 해. 조만간에 한잔하자.”
그날 점심시간이었습니다. 피의자가 라면그릇을 설거지하는데 문지방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젊고 낯선 여자였습니다. 지금 어디 계시느냐 묻기에, 자취방에서 점심 먹는 중이라 답했더니, 오늘 중으로 회사에서 연락을 할 테니 집에서 기다려 보라 했습니다. 피의자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심호흡을 했습니다. 내 방식이 뭔지는 잘 몰라도 홀몸이니까 내 방식대로 나가자는 다짐을 되뇌었습니다. 마음이 담담해졌습니다. 당장은 뭘 하나. 낮잠이나 실컷 자나. 이러고 있을 때였습니다. 왈칵, 방문이 열렸습니다.    
  
  중량초과 너무 많다, 일자리도 모자라는데!       
  중량초과 조정하여 정리해고 막아내자!
   
회사 정문의 바리케이드 위에 축제 현수막처럼 이층으로 걸린 저 구호가 진보적 일간지 사회면을 손바닥 크기의 사진으로 차지하고, 관련 기사에 도드라지게 인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어떤 누리꾼이 ‘도로를 보호하기 위해 과적차량을 단속하는 우리나라가 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개인의 천문학적 중량초과를 단속하지 않는가?’라는 글을 인터넷 토론방에 올려 숱한 댓글의 갈채를 받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이슈 검색어가 ‘중량초과’를 장시간 동안 상위에 등극시켰습니다.
담당 검사는 구속영장 청구사유에 ‘사상 초유의 요주의 구호’라고 지목했습니다. 또 ‘6․15공동선언 후 탈북자 성향 파악 소홀’을 명기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탄원인은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며, 삭제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좌파정권’이라 불린 지난 두 정권의 막바지 즈음에 탈북자의 탈을 쓰고 잠입한 불순분자의 하나가 피의자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법치주의입니다. 공권력 남용과 오용에 의한 인권침해를 예방하려는 하나로서 구속적부심 제도가 존치합니다. 이 탄원서에 사실이 아닌 것은 쓰지 않았다는 점을 작가적 양심의 이름으로 밝혀둡니다. 
파업 전야였습니다. 피의자는 관리부서의 정리해고 대상자 여덟 명과 생맥주집 룸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파업동참 선전 차원이었는지, 노조원 두 명이 늦게 합석했습니다. 생맥주에 소주를 탄 폭탄주를 다섯 번이나 ‘원샷’을 한 다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노조 홍보차장은 울먹였습니다.
“모두가 조금씩 적게 받고, 모두가 함께 일을 해야지.”
발언의 차례를 받은 피의자는 가슴이 쓰라려서 나직이 말했습니다.
“저야 말할 처지가 못 되지 않습네까?”
문득 술자리가 한층 숙연해졌습니다. 평양 토박이인 할머니 슬하에서 자란 피의자의 종결어미 발음이 자신도 모르게 그만 평양식으로 꼬였는데, 동석한 모두가 아, 그래, 평양에서 일류대학을 나왔다는 탈북자는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호기심을 발동했던 겁니다. 경청할 눈빛과 기다림의 침묵, 이것이 발언하라고 강권하는 말보다 더 강한 강권이 되었습니다.
“노조 홍보차장님 말씀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네다. 너무 높은 연봉은 중량초괍네다. 일자리도 모자라는데.”
노조 홍보차장이 박수를 쳤습니다.
“바로 그거야. 중량초괍네다, 일자리도 모자라는데!”
문제의 구호들. 누가 그것을 내걸었는지 피의자는 모르는 일입니다. 피의자는 ‘중량초괍네다’라고 했을 따름입니다. 북쪽에서는 대낮의 광장에서, 그것도 어마어마한 동상이 내려다보는 앞에서, 말짱한 정신으로 그 뒤에다 좀 싱겁게 ‘쌀도 모자라는데’를 달았고, 남쪽에서는 밤의 생맥주집 룸에서, 그것도 노조의 파업 전야에, 살짝 취한 상태에서 그 뒤에다 좀 씁쓸히 ‘일자리도 모자라는데’를 달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똑같이 반체제적 불순선동이 되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