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투표 후 아비는 /'/미친 */'/ 소리를 들었지          
                           내 20대 딸아, 아들아, 고맙다




우선 고마움을 전한다!

1987년에 태어난 딸아, 또 1990년에 태어난 아들아, 선거일인 2일 밤을 개표 방송을 보면서 꼬박 새우고, 개표가 거의 완료돼가는 시각에 너희들에게 이 글을 쓴다.

아빠는 마흔 나이에 혼인을 하고 너희들을 낳았다. 너희들을 키우면서, 어린 너희들 덕분에 늘 젊게 사는 기분이었다. 몸도 마음도 젊어지는 것 같았고, 몸은 늙더라도 마음만은 늘 젊은 상태를 유지하려 했고, 동창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젊다는 소리도 듣곤 했다.

아빠는 너희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너희들은 아빠의 심성과 정신을 배우며 닮으려 했고, 길고 지난했던 세월 속에서 아빠가 겪으며 감내했던 수많은 고뇌와 슬픔들을 깊이 이해하려 했다.

너희들은 아빠의 동지였다. 성년이 되면서 아빠와 함께 ‘오체투지 순례기도’에도 참여하고, ‘용산미사’에도 참례하고,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영결식과 추모미사·장례미사에도 함께하는 너희들을 보면서, 너희들은 아빠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동지’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6·2지방선거’에도 우리는 한 마음일 수 있었다. 아빠는 너희들에게 20대 젊은 유권자의 투표율이 최대 변수라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 20대의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했다. 너희들은 아빠의 당부와 채근 속에서 친구들에게 열심히 투표를 권유하고 독려했다. 우선 그 수고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어제(2일) 오후의 통화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투표 종료 1시간 전인 오후 5시쯤 아빠는 태안천(川 ) 둑길을 밟으며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다. 투표율이 높아지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한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했고, 이 날은 흐르는 물을 보며 걷고 싶어서 태안천 둑길을 택해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투표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아서, 절박해지는 마음으로 너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규애야, 네 친구들한테 최대한 많이 전화 걸어서 투표 확인해. 혹 투표를 하지 않는 놈이 있으면 절교하겠다고 해. 통화료가 많이 나도 괜찮아.”
“오히려 저보구 투표했냐고 문자 보내는 애들이 있어요.”

“한결아, 네 여자 친구한테 전화해. 만약 투표를 하지 않으면 절교하겠다고 하란 말야.”
“그건 아빠가 며칠 전에도 하신 말씀이잖아요. 제 친구들은 다 투표를 했어요. 여자 친구도요.”
        
“그래, 고맙다. 이 고마운 마음이 내일 새벽에 활짝 꽃피었으면 좋겠다.”

어제 했던 그 말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너희들이 더욱 고맙다. 투표를 한 너희들이, 더 나아가 친구들에게 투표를 독려한 너희들이 대견스럽고 사랑스럽다. 아빠가 진심으로 감사한다.  

축하한다!

규애는 이번 투표가 세 번째 주권행사인 것으로 안다. 지난 두 번의 투표는 보람이 없었음도 아빠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세 번째 투표에서는 어느 정도 보람을 얻게 되었다. 그 점에 대해 아빠가 축하를 보낸다.

한결이는 이번 투표가 첫 번째 주권행사여서 신선한 긴장감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첫 번째 투표에서 일정 부분 보람을 얻게 되었으니, 어느 모로는 행운일 수 있다. 네가 첫 번째 주권행사를 한 것에 대해서도 축하하고, 더욱이 첫 번째 투표에서 어느 정도 보람을 얻은 것에 대해서도 축하를 보낸다.  

한편으로는 네가 부럽기도 하다. 아빠의 첫 번째 주권행사는 우스꽝스럽고 불행한 편이었다. 아빠는 1969년 10월 논산훈련소에서 첫 번째 주권행사를 할 수 있었다.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배출대에서 논산훈련소 제28연대로 떨어져서 대기병 생활을 할 때였다. 연대본부에서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 대기병 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투표를 하러 오라는 지시가 왔다.

‘삼선개헌국민투표’라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두 번만 할 수 있는 법을 고쳐서 세 번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법을 국민에게 내놓고 찬반을 묻는 투표였다. 찬성하는 사람은 0쪽에 기표를 하고, 반대를 하는 사람은 ×쪽에 기표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 대기병 다섯 명은 2,500명 연대 병력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투표를 하게 되었다. 투표 장소는 연대본부 인사과 막사였다. 연대 인사과장(대위)와 인사관(중위), 인사과 선임하사(상사), 그리고 사병 두세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투표를 하라는 것이었다.

공개투표임을 눈치 챈 순간 다섯 명의 맨 앞에 섰던 나는 맨 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앞의 네 명이 찬성인 0쪽에 도장을 꾹꾹 누르는 것을 보면서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깊은 생각을 했다.

내가 찬성에 기표를 하면 오늘 당장에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겠지만 평생을 두고 내 비겁함을 기억하며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에 기표를 하면 오늘 당장에는 어떤 불리를 보게 되더라도 평생 동안 떳떳한 마음일 것이다.

나는 마침내 평생 동안 마음이 떳떳한 쪽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과감히 반대쪽에 기표를 했다. 그 순간 “어, 이 눔 보게.” “이 자식, 미친 * 아냐”하는 소리들이 들렸지.

그 일로 해서 연대장까지 내 이름을 알게 되었다. 9중대로 떨어진 나는 어느 날 연대본부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훈련병 학과 출장을 준비하기 위해 식반을 들고 바삐 뛰어가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연대장이었다. 나는 “멸공!”이라는 구호와 함께 거수경례를 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데, 연대장이 몇 걸음 다가오더니 대령 계급장이 달린 모자와 선글라스와 지휘봉을 맨땅에다 내려놓고는, 옆에 있던 배구공을 들고 “나랑 토스 몇 번 하고 가.”하면서 공을 튕겨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몇 번 토스를 했는데, 토스를 마친 연대장이 지휘봉을 들고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더니 “그만 가봐.”하는 것이었어.

그 후 나는 큰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연대장이 내 이름을 어찌 알며, 내게 별다른 말도 없이 배구 토스를 하자고 한 건 무슨 이유일까? 홀연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지. 어쩌면 2,500명 연대병력 중에서 삼선개헌 국민투표(공개투표)에 반대 기표를 한 사람은 나 한 명이지 않을까? 그리고 연대장이 나를 불러 세우고 배구 토스를 한 것은 ‘나는 너를 인정한다’는 무언의 표시가 아닐까?

논산훈련소 제28교육연대 대기병 시절의 그 일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는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울한 추억이기도 하다. 대한국민의 국민으로 태어나 최초로 주권행사를 하게 된 투표가 박정희 장기집권 야욕의 실체인 삼선개헌국민투표이고, 또 군대에서 공개투표를 했으니 생각하면 참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아빠와는 달리 너는 최초의 주권행사를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고 온전한 가운데서 온당하게 표출할 수 있었다. 오늘의 이런 환경은 아빠 세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네가 조금은 부럽기도 하면서, 더욱 축하를 하게 된다.  

이제 다시금 출발선에 서자
        
1987년 12월, 규애가 태어난 해의 마지막 달이었다. 아빠는 그해 태안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를 결성하고, 80년 광주의 비극을 보여주는 비디오를 입수하여 성당에서 신자들에게 상영할 계획이었다. 그 정보를 입수한 서산경찰서 정보과 형사 두 명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생후 한 달쯤 되는 아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분유를 몇 통 사 가지고 왔지.

그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형사 한 사람에게서 놀라운 말을 듣게 되었다. 기억하기도 싫지만, 할머니도 들었고 엄마도 들었던 그 얘기를 여기에 적어본다.

“광주사태 때 사람들이 덜 죽어서 오늘 이렇게 문제가 된 겨. 더 많이 죽었어야 혀. 내가 공수부대 사령관이었다면 더 죽였을 겨.”

그 친구와 욕설이 섞인 말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다른 형사가 말려서 가까스로 수습이 되었지. 그 후 그 친구를 고발하려고 했지만 같이 왔던 다른 형사가 대신 사과를 해서 내가 참고 말았지.

그런데 내게 그런 끔찍한 폭언을 했던 그 형사는 몇 년 후 어떤 문예지를 통해 등단이라는 걸 해서 ‘시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문학단체에 참여하면서 시인 행세를 하고 있지. 우리나라의 수많은 시인들, 문인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야.

얼마 전에는 아빠가 어느 문학회의 월례모임에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천안함 얘기가 나왔는데, 나보다 연장이신 시인이라는 분이 천안함 침몰은 100% 북한 소행이라는 거야. 내가 이의를 제기했더니 내 얘기를 들어볼 짬도 없이 버럭 화를 내는 거야. 내게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말도 하고. 그래서 급기야는 큰 언성으로 욕설도 오가는 싸움이 벌어졌지.

명색 시인이라는 사람도 그 지경이니, 따지고 보면 우리가 참으로 분별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늘 또 하나의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오늘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이다. 거짓말이 진실을 덮어버리는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하면 너무 성급한 생각일까? 비록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오늘 소중한 가능성을 다시 얻게 되었다.

이제는 억지와 거짓말이 쉽게 통하지 않는 세상이 올 것 같다. 너희들은 천안함에 대한 합조단의 발표를 100% 그대로 믿어버리는 어른들과는 달리 이모저모 따져보고 분석해보는 태도를 보였다. 날카로운 눈이 너희들에게 있음을 알았다.

그 예리한 눈과 함께 사물을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눈도 함께 키워가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정의감이다. 그것을 떠받치는 것은 ‘하느님 신앙’과 ‘양심’이다. 늘 이상을 지니고, 민주 시민으로서 열린사회 바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며, 민족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마음도 함께 지니고, 우리 함께 더욱 힘차게 이 세상을 살아가자.  

    
10.06.03 11:19 ㅣ최종 업데이트 10.06.03 11:19
태그/ 지방선거
출처 : 내 20대 딸아, 아들아, 고맙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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