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가영이 누나

최기종

가영이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촌 누나인데 학창시절에 친하게 지냈는데 근 20년만에 연락이 된 것이다. 누나와 이것저것 방담을 나누다 보니 옛날 일들이 생각이 났다.

누나와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텔레비젼이 없는 시절이니 큰집까지 명화극장을 보러 다녔다. 밤이 늦도록 명화극장을 보고나서 집으로 오는 길에는 새벽별들이 떠 있었다. 우리는 그 별들을 보면서 눈길을 걸었다. 가끔 누나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도 했다. 아마 날씨가 쌀쌀해서 몸을 붙이고 걷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그 때 상긋한 비누 내음이 지금도 나는 것 같다. 아련한 추억 속으로 누나의 빛나는 머리결이 느껴진다.

우리 사촌끼리 같은 또래가 다섯이 있었다. 가영이 누나, 기온, 기우 형, 동갑인 선옥이다. 우리는 심심하면 가영이 누나 집에 모여서 화투를 쳤다. 민화투를 쳐서 지면 손목 때리기를 했다. 이불 속에 다리들을 넣고 놀다보면 발이 닿기도 했는데 그 감촉도 좋았다. 어떤 때는 간지럼태우기 놀이도 했다. 기온이 형은 간지럼을 잘 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킥킥 웃음보가 터졌다. 그런데 나는 음험하게도 간지럼을 안 탔다. 간지럼 부위에 손이 와도 웃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간지럼 대장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장난질을 하다가 큰 사건이 벌어졌다. 몸을 피하면서 돌리면서 간지럼을 태우는데 아 글쎄 내 손이 가영이 누나 가슴에 닿은 것이다. 그 볼록한 부위를 손바닥으로 탁 쳐버린 것이다. 누나는 갑자기 경직이 되었다. 우리들도 경직이 되고 방안 모든 것을 비롯하여 시간까지 멈춰 버렸다. 그러다가 누나가 수치심이 넘쳐 버렸는지 갑자기 감정이 폭발했다. 울며불며 나에게 달려 들어 내 몸을 사정없이 꼬집기 시작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죄책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미안해 했다.

가영이 누나는 문학에도 관심이 많앗다. 내가 시에 눈을 뜬 것도 누나 때문이었다. 누나 집에는 좋은 책이 많았는데 내가 진득한 독자였다. 거기서 이광수도 박계향도 김소월도 만날 수 있었다. /'/못잊어/'/라는 김소월 시집을 빌려서 암송 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책이 아직도 내 장서에 꽂혀 있다. 그때 누나와 문학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누나 친구 영숙이에게 편지를 쓴 사건도 유명하다. 누나 사진첩에서 영숙이를 보고 사귀고 싶다고 50여통 정도 연애편지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었다. 그 때 일기장에 보면 /'/오늘도 영숙에게 편지를 보냈다. 열번 찍어 안 넘어 갈 나무 없다고 열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써야지./'/라고 써 있는데 아내가 지금도 그것을 보면서 배꼽을 뺀다. 그런데 영숙이는 그 스토킹을 못 견딘 모양이었다. 그것을 누나에게 까바쳐 버린 것이다. 어느날 누나가 나를 불러 놓고 심각하게 /'/너, 영숙이에게 편지 썼다메?/'/라고 물었을 때 내 얼굴이 홍시가 되었고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었다. 그 뒤로 연애편지는 더 이상 가지 못했다.

누나와의 추억이 지금도 삼삼한데 벌써 40년 세월이 훌쩍 가 버렸다. 누나에게 내 시집을 보내야겠다. 사실 나의 가장 믿음직한 독자는 가영이 누나이기 때문이다. 누나야! 전화해 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