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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문학의 판단중지를 위하여
이름 미니멀리즘 이메일




 
 

(조선문학 통권 282호, 2014.10. 01. 보정본)

(한맥문학 통권 231호, 2009.11. 25)

http://www.poemspace.net/

   주근옥(Gueune-ok JOUH)


 

1898년,  이승만신체시 “고목가”로부터 출발한 한국의 현대문학(Contemporary Korean Literature)이 110년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은 아직도 “자유시(Free verse)”를 현대시(modern poem)의 절대조건으로 믿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시는 Elegiac Stanza, Ballad Stanza, Short Metre, Long Metre, Ode, Rondeau, Villannell, Triolet, Sonnet, Blank verse 등과 같은 시형식 중의 일종에 불과할 뿐이며, 또한 이것은 현대에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조(The Age of Elizabeth, 1558~1603; 셰익스피어 활동시기)의 서정시와 트루바두르(troubadour)의 서정소곡과 그리스의 합창곡, 그리고 시편(The Book of Psalms)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고정관념부터 깨지 않으면 안 된다. 모더니티(modernity)는 시형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Abant-garde)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비-인식론적인 선전(propagender)과 선동(agitation), 은유와 같은 수사의 방식으로 모더니티에 대해 외쳐대고 있지만, 그들의 외침은 2가지 관점에서 비판을 면치 못한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의 자폐성이 그것이다. 자폐성은 주변의 관점을 살피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민족문학의 우월성을 주장하지만, 이것은 칼날의 양면성과 같은 것이어서, 요리를 하거나 방어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는 유용하지만, 타인이나 타민족을 공격하는데 사용되면 살인 무기가 된다.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 시오니즘, 테러리즘 등이 그것의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민족주의가 아니더라도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차알스 부르봉의 복고왕조를 쓰러뜨린 1830년의 7월 혁명, 선거권 확대의 요구를 관철시키며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의 정권을 무너뜨린 1848년의 2월 혁명, 1871년의 파리 코뮌, 1905년의 실패한 러시아 혁명, 1917년의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쿠데타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등을 통해 생산된,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으로 표출된, 양단논법의 문학작품이 모더니티를 보유하지 못했던 것을 한국문학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Maksim Gorky의 작품 “밑바닥” 등은 볼셰비키·레닌·스탈린주의가 아니라 제1극화의 마르크스주의 리얼리즘의 작품. 정치적으로는 Lenin 그리고 원래 멘셰비키였으나 레닌의 쿠데타에 동조했던 Trotsky와도 다르게 분파한 Stalin·Zhdanov와 동조하고 있다). 물론 몽타주 기법을 채용한 세르게이 아이젠쉬타인(Sergei M. Eisenstein, 1898~1948)의 영화 “전함 포템킨”이 있긴 하지만, 이는 몽타주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발설을 억제하고 객관성을 실현하면서도 그 제1극화의 마르크스주의 리얼리즘을 능가하는 제2극화의 맥락을 보여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예외가 될 것이다.

둘째, 예술에서의 로맨티시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의 환상과 파괴성을 아방가르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로맨티시즘의 경우 흄(T. E. Hulme)에 의해 이미 부정되었고, 1910년대~1920년대 초까지 성행했던 후자의 경우, 다시 1950년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성행한 바 있지만, 이는 전자의 반복 또는 퇴행에 지나지 않은 것이며, 특히 그레마스(Algirdas Julien Greimas)에 의해 정신분열 증세라고 하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칸트(I. kant), 헤겔(G. W. F. Hegel), 후설(E. Husser)로 이어지는 인식론은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현대과학, 초월논리학, 르네 통(René Thom)의 파국이론(catastrophe theory)과 조지 불(George Boole)의 수리논리학의 기호체계인 Boolean algebra(불 대수) 이론 등의 현대수학을 포섭하면서 트라이앵글과 같은 최고 정점의 상위어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것의 하위어로는 모더니즘과 기호학(semiotics; semiology는 전자의 하위개념이다)으로 분할된다.

먼저 모더니즘의 경우, 이미지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할되고, 이미지즘은 "Amygism(Amy Lowell)"과 "Vorticism(Ezra Pound)"으로 분할된다.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 둘 다 중요시했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이미지즘이 에이미 로우얼(Amy Lowell)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차츰 정적인 로맨티시즘의 복귀로 흐르게 되자, 이러한 현상을 “에이미지즘(Amygism)”이라고 비난하며 이미지즘운동과 결별해 버렸다.

에즈라 파운드의 경우, “시는 산문처럼 문법에 맞게 정확하게 쓰여야만 한다. 그 언어는 고조된 긴장(단순성)에 의해 절약된 파롤로부터 조금이라도 일탈해서는 안 되는 그래서 정제된 언어여만 한다. 거기에는 독서로 배워 발음이 잘 안 되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되며, 완곡법이 있어서도 안 되고, 전도가 있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모파상의 훌륭한 산문처럼 단순하여야 하며, 스탕달처럼 견고하여야만 한다. 거기에는 감탄사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벗어나 달아나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부여된 말은 어리짐작의 빗댐으로 완성할 수 없으며, 이것은 말의 1차 개념(intention)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산문처럼 단순해야 한다고 해서 운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1900~1990)의 경우 이 언급을 오해하여 실제로 산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의 경우도 이에 동조하는 문인·학자들이 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계속해서 “거기에는 상투적인 문구, 관용어구, 스테레오타입의 신문기사 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두 다리 걸친 형용사(“ddled mosses dank; 축축한 혼탁한 이끼”와 같은)”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미지즘은 “객관적인 것(미끄러짐이 없는 것, 직접적이고 명백한 것), 형용사의 고도한 사용이 없는 것, 실험을 허락하지 않는 은유가 없는 것, 솔직히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리듬에 있어서는 박절기(拍節器)의 시퀀스가 아닌, 음악적인 프레이즈(phrase, 화성에서 두 아티큘레이션을 이음줄로 이은 것)의 시퀀스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하며, “상징주의자들의 상징은 1, 2, 그리고 7과 같은 산술상의 숫자처럼, 고정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스트의 이미지는 대수학의 a, b, 그리고 x의 기호와 같은 변화무쌍한 의미작용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 후 이미지즘이 현실을 외면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운동에 그치고 말았다고 비판하며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는 다시 패러디와 매직리얼리즘, 그리고 미니멀리즘으로 분할된다. 패러디(parody)의 경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같은 작가가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그 작가와 작품의 창의성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는 편에 속한다. 매직리얼리즘(magicrealism)의 경우, 권 택영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고급화된 예술양식, 개인 감흥의 절제와 달련, 그리고 아직도 소설이 무언가 진지한 도덕(moral, 증거는 없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 즉 방향범주가 아닐까? ―필자 주)을 전달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하며, 따라서 “긴즈버그와 친구였던 윌리엄 버로우는 「발가벗은 점심(The Naked Lunch), 1959」에서 섹스와 마약 등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세계를 저속한 어휘로 적나라하게 표출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 또한 초현실주의와 다른 것이 있는가? 문예사조는 유행과 같은 반복이나 퇴행이 아닐 것이다.

이제 미니멀리즘(Minimalism)울리포(OuLiPo)만 남게 되었다. 전자는 현대시의 시발점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포우(Edgar Allen Poe), 그리고 체호프(Anton Chekhov), 조이스(James Joyce),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와 같은 다양한 작가들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체호프가 포우의 효과의 원리와 공통된 이야기의 결말 또는 의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냈던 말, “연극의 무대와 같은 단편소설은 무대의 약속과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있다. 나의 직관은, 소설 또는 이야기의 결말에, 독자를 위하여 전체 작품의 인상을 교묘히 농축하여야만 한다.”고 한 그 말에 이어서, 1932년, 헤밍웨이는 이러한 소견이 성공적인 소설의 방법과 구성과 관련되고 있음을 피력했다.

 

만약 산문의 작가가 그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할는지 모르는 것에 대해, 그리고 독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면, 만약 작가가 진실로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작가가 충분히 진술했던 것만큼 강하게 이러한 것의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빙산 운동의 장엄함은 물 위에 존재하는 것의 1/8이 아니라 물 아래의 8에 기인한다.

 

헤밍웨이가 여기서 토로하고 있는 “빙산의 일각(tip of iceberg)”의 효과, 그 갈등적 정서 상태와 의사소통하는 방식보다 더 많이 느끼는 그 기법에 대해, 에이미 헴펠(Amy Hempel)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당신의 작품 안에 보고되지 않은 많은 경험이 실제적으로 페이지 위에 나타난 것보다 더 중요하다. 흔히 이야기의 정서적 초점은 기술되지 않은, 또는 이야기 안에 귀착되어 있는, 다시 말해서 그 밑에 깔려있는 어떤 사건이다.” 그리고 신디아 휘트니 할렛(Cynthia Whitney Hallett) 또한 여기에 덧붙여 언급한다. “요컨대, 작가는 독자가 적어도 생략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주어져있는 것으로부터 추측하고 있는 어렴풋한 하나의 가능성을 갖도록 조심스러우면서도 충분하게 그 빈 공간의 틀을 어떻게 해서든지 짜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언급된 모든 것 안에는 적어도 반영 또는 함축(비유적 어떤 형식)으로도 언급되지 못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흔히 독자에게는 하찮은 일 또는 사건 같은 것으로서의 사실적인 보고로 여겨지는 것 같은 것으로 주어진다. 비록 최후의 변형이 외부의 실재성을 닮았을지라도, 그 표상적 방법은 단지 외면적으로 언급된 세부묘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미니멀리즘(Minimalism) 또는 단편소설의 장인들은, 때로는 부연하고, 때로는 사라지게 하고, 때로는 변형시킬 줄 아는 창조적 재능을 공유한다. 그들은 외견상으로는 긴장 없이 의식적으로 확실한 직조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 같은 언덕(Hills Like White Elephants),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의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와, 에이미 헴펠(Amy Hempel)의 “알 졸슨(Al Jolson)이 묻힌 묘지에서(in the Cemetery Where Al Jolson is Buried)”와 “욕조 속에서(In a Tub),”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의 “연과 그림물감(Kite and Paint)과 같은 단편소설에서, 그리고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숨소리(Breath)”와 해롤드 핀터의 “일터에서의 고충(The trouble in the Works)” 등의 희곡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 할 수 있는 울리포(OuLiPo)의 경우, 1960년 11월 24일, 초형이상학(Pataphysique)의 조합(組合, the Collège)과 실험문학연구소(Séminaire de littérature expérimentale)의 타이틀을 단 분과위원회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모임에서, 이 최초의 명칭은 슈미트(Albert-Marie Schmidt)의 제안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 “잠세적인(가능성의) 문학의 공동 작업실(Ouvroir de Littérature Potentielle),” 또는 "OuLiPo"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소그룹이 9월에 국제문화센터 스리지-라-살(Cerisy-la-Salle)에서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 작품의 토론을 위한 세미나에서 만났던 그때, 첫 번째 모임의 대략 두 달 전의 그때 나왔던 것이었다. 이 세미나가 개최되고 있는 동안, 레이몽 크노프랑스와 르 리요네(François Le Lionnais)는 그 단체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10년 동안, 울리포(OuLiPo)는 그룹으로서의 활동이 아주 미약했다. 분과위원회로서의 그들은 1961년에 그들의 작품을 초형이상학의 조합에 보고했다. 게다가 탕 멜레(Temps Mêlés, 프랑스인)는 1964년 울리포(OuLiPo)에 수익금을 기부했고, 벨기에 라디오는 울리포(OuLiPo)의 모임을 보도했다. 그러나 그 멤버들은 이 몇 해 동안 개인적으로 활동했었던 것이며, 전체로서의 그 그룹은 표현 일부의 선집인 잠세적인(가능성의) 문학(La Littérature Potentielle)의 출간과 함께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서 주목되는 것은 그들 회원이 문인은 물론 수학자, 과학자, 엔지니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문학과 수학의 접목을 실험하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이 붙기도 하였다. 따라서 창립 멤버 중의 한 사람인 장 레스퀴르(Jean Lescure)가 고안한 울리포의 기법 “N+7(프랑스어로는 “S+7”)”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이른바 <자동 전환 방법>으로서, “S+7”라고 명명한다. 이 방법은 어느 텍스트를 선정하여 그 텍스트의 명사들을 사전에 나오는 일곱 번째의 명사로 대체하여 전혀 다른 시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다(허정아, 불어불문학연구 제55집, 프랑스 현대시와 매체의 활용, P. 707).” 이 언급은 다음과 같은 자크 쥐웨(Jacques Jouet)의 언급과도 상당히 다르다.

 

“나는 시, 즉 기술적인 시를 쓰기 위하여, 첨부된 질문(만약 그것을 이행하는데 동의한다면)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정적인(객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즉 내 임의로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오직 객관적으로만 기술할 것이라고 한다. 즉, “빙산의 일각(tip of iceberg)”과 같은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에즈라 파운드가 언급한 객관성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며, 수학과의 접목이 아니라 르네 통(René Thom, 1958년에 수학에 있어서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필즈상을 수상했다)의 파국이론(catastrophe theory), 조지 불(George Boole)의 불 대수(Boolean algebra),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의 “형식적 공리계는 그 공리 자체와 그것의 부정 어느 것도 증명될 수 없다는 하나의 명제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 정리와 같은 현대 수학과 논리, 과학에서의 바로 그 초수학·초월논리·불확실성과 같은 변수와 역설을 문학에서의 기법과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에즈라 파운드는 vorticism에서 시에 대하여, "나는 내가 의미하는 것을 수학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착각하고,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의 정리를 앨런 매디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은 컴퓨터 영역으로 확장시켜, 튜링 기계(Turing machine)라고 하는 이론적인 자동기계(이것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과도 다르다)를 발명했는데, 그 방법이 “N+7 machine”인 것이다.

컴퓨터는 칸트의 “무제약의 자유의지·이율배반·가상세계”가 지향적으로 구성해가는 관점, 즉 물자체가 수동적으로 표상(경험론적; variation) 되지만 다시 연역적(합리론; invariant)으로 구성해가는 구성설(構成說)의 관점,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의 관점, 그리고 후설의 판단중지와 동시에 구성해가는 묘기의 지향적(자발적), 다시 말해서 빈사(술어)적인 환원의 관점, 그레마스의 방향적(芳香的) 범주(thymic category)를 결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앨런 매디슨 튜링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S+7”의 “7(seventh)”이라고 하는 것은 화성학(harmonics) 제7음·이끎음(leading note)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의 음으로 이끌어가는 작용을 하는 음을 말하며 도음(導音)이라고도 한다. 으뜸음의 반음 아래에 있어서 으뜸음을 이끌어내는 음이기도 하다. 특히 음계 중에서 중심이 되는 음을 향하여 위로 끌어가는 음을 상행이끎음(aufwärtsführendwe leitton)이라 한다. 그 음정은 일반적으로 반음이고, 서양의 장음계에서는 제7음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7은 사전의 일곱 번째의 의미가 아니며, 컴퓨터가 결정하는 것도(See. The N+7 Machine) 아니고, 으뜸음을 이끄는 온음계의 일곱 번째 음조의 단계인 것이다(그레마스는 제5음·딸림음[dominant]을 제7음과 같은 방식으로 인용하고 있다). 즉, 자연언어의 변형(variation)·길항작용(拮抗作用, antagonism)·2치화(二値化, binarization)·사위(斜位, phoria)의 의미를 말한다. 따라서 날자 변경선 상에서 양팔을 벌리고 서면 어제와 오늘이 하나의 몸체인 것과 같은 중명사(中名辭, mean)이면서도 대척점(對蹠點) 또는 N과 S 양극단의 한 극으로만 표출되는, 그러면서도 교류발전처럼 교류하는, 연동하는, 양끝이 접속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닫혀 있는 데도 사실은 열려 있는 클라인의 항아리(Klein's bottle)와 같은,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처럼 깜짝 놀라게 하는, 귀납법과 연역법의 종합인 그레마스의 기호학·위의 도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확실하면서도 불확실한(또는 二律背反의) 명제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괄호가 쳐지지 않은 명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진리이고 확실하고 그렇기 때문에 리얼리티가 있는 것이며, 리얼리즘의 문학은 바로 이러한 명제를 충실히 추종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괄호가 처진 명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불확실하면서도 확실하다. 왜냐하면 비록 주사(主辭) “소크라테스는”만 발화되고 ”빈사(賓辭) “(죽는다)”는 괄호가 치어져 발화가 안 되어 있을지라도, 대전제와 소전제에 의해 그것의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Semiology" 차원의 이러한 외소여와 내소여의 2중 결합(dual syntagme; 이것은 사회적·제약의 제1극화이다)과 그 위에 방향범주(thymic category)를 더한 3중 결합(triple syntagme; 이것은 개인적·무제약의 제2극화이다)을 인식론 차원의 "Semiotics"라고 한다. 이러한 결합의 논리가 작품으로 표출될 때, 그리고 Vorticism이 놓쳤던 부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이 되는 것이며,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 미니멀리즘과 울리포인 것이다.

따라서 미니멀리즘(Minimalism)울리포(OuLiPo)는 동정(同定) 되는 것으로서, 결국 그레마스(Algirdas Julien Greimas, 1917~1992)의 기호학(Semiotics)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로널드 슐라이퍼(Ronald Schleifer)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언어의 감옥(Prison-House of Language)」은 사실상 그레마스로 시작해서 그로 끝을 맺고, 조나단 컬러(Jonathan Culler)의 「구조주의 시학(Structuralist Poetics)」은 주요한 장을 모두 의미론으로 충당한다.”고 한 언급과, “그레마스는 뜻대로 주물럭거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구조주의 이론가 중의 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 언급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여 그의 「구조의미론(Structural Semantics: An Attempt at a Method)」, 「의미론선집(On Meaning-Selected Writings in Semiotic Theory)」, 「정념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Passions)」 등의 기호학이, 한국문학과 언어학은 물론 모든 예술과 학문의 장르에 걸쳐 판단중지(Epoche)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A. J. Greimas, "The relationship between structural linguistics and poetics(구조언어학과 시학의 관계)" pp. 8∼16: international social science journal Volume XIX, No. 1, 1967. 참조하라.

 

참고자료

  SUR LES ROUES/Gueune-Ok JOUH

구조의미론(Structural Semantics); A.J.Greimas/주근옥 역

의미론선집(On Meaning); A.J.Greimas/주근옥 역

정념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Passions); A.J.Greimas, Jacques Fontanille/주근옥 역

미니멀리즘; C.W. 할렛, 워런 모트/주근옥 역

주근옥의 미니멀리즘 시선집

 

 http://www.poemspace.net/

 

주근옥에 대한 연구서

주근옥의 문학세계(2006, 공저)

 

김 용직;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주요 저서로는 한국현대시인연구(), 임화문학연구외 다수.

송 재영; 서울대학교 불어불문과 졸업. 프랑스 Montpellier III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 트리스탕 자라, 앙드레 브르통), 프르스트에서 까뮈까지(앙드레 브루아) 등의 번역과현대문학의 옹호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충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

홍 희표; 동국대학교 국문과 및 인하대 대학원 졸업, 목원대학교 교수, 주요 저서로는 마음의 새끼손가락 걸고, 목월시의 형상과 영향외 다수.

이 숭원;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주요 저서로는 원본 정지용 시집, 폐허 속의 축복외 다수.

구 수경; 경희대학교 영어교육과 및 충남대학교 대학원 졸업, 건양대학교 교수, 주요 저서로는 1930년대 소설의 서사기법과 근대성, 한국소설과 시점외 다수.

송 기섭; 충남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충남대학교 교수, 주요 저서로는 한국현대문학의 도정, 해방기 소설의 반영의식연구외 다수.

송 기한;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대전대학교 교수, 주요 저서로는 고은, 한국 현대시사 탐구외 다수.

장 수익;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한남대학교 교수, 주요 저서로는 한국 근대 소설사의 탐색, 한국 현대 소설의 시각외 다수.

최 예열; 대전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대전대학교 강의전담교수, 주요 저서로는 한국전후소설 연구, 1950년대 전후소설의 응전의식외 다수.

금 동철;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주요 저서로는 한국현대시의 수사학, 구원의 시학외 다수.

김 현정; 대전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대전대학교 강의전담교수, 주요 저서로는 백철 문학 연구, 한국현대문학의 고향담론과 탈식민성외 다수.

남 기택; 충남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강원대학교 교수, 주요 논저로는 라깡과 문학(공저), 신동엽 시의 지역저항외 다수.

윤 종영; 대전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대전대학교 강사, 주요 논문으로는 1950년대 한국 시정신 연구외 다수.

김 윤정;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강사, 주요 저서로는 김기림과 그의 세계,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지형도외 다수.

김 승민;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및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강사, 주요 논문으로는 염상섭 소설에 나타난 혼혈의 의미외 다수

김 교식; 대전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군산대학교 강사, 주요 논문으로는 이상문학에 나타난 주체의 내면의식 연구, 최상규 문학 연구외 다수.

민 명자; 충남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충남대학교 강사, 주요 논문으로는 김구용 시의 이미지와 불교의식, 박목월 시의 상징성 연구외 다수.

박 슬기; 연세대학교 인문학부 졸업, 서울대학교 국문과 석사 졸업, 현재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 재학중, 서울대학교 강사,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 전후시의 그로테스크 시학 연구-박인환, 전봉건, 고석규를 중심으로, 한성기 시에 나타난 시선의 변화와 타자와의 소통 양상외 다수.

하야시 요코(林 陽子); 오산대학 일본어전공 전임강사 한일근대시 비교연구 연구자. 일본국 나고야 난잔 대학 이스파니아어과 졸업. 충남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석사, 현대문학전공).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과 수료(박사과정).

 

  주근옥

  충남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석사)
  대전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시와 시론 참여(1972)
  시문학 천료 
  국어국문학학회 회원
  한국언어문학회 회원
  한국비평문학회 회원
  어문연구학회 회원
  개신어문학회 회원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위원(2002, 2003)
  제1회 박인환 시문학상 심사위원(2009)
  충북대학교 전강사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겸임교수

  시집
  산노을 등에 지고
  감을 우리며
  번개와 장미꽃
  바퀴 위에서
  갈대 속의 비비새

  저서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
  석송 김형원 연구

 

번역
  A.J.Greimas, Structural Semantics
  A.J.Greimas, On Meaning
  Algirdas Julien Greimas·Jacques Fontanille, The Epistemology of Passions
  Cynthia Whitney Hallett, Minimalism and Short Story
  Warren Motte, SMALL WORLDS―Minimalism in Contemporary French Literature
  Warren Motte, Jacques Jouet's Soul
  
Stephen Crane, The Open Boat
  Amy Hempel, In a Tub
  Amy Hempel, In the Cemetery Where Al Jolson is Buried
  Mary Robison, Kite and Paint
  Ernest Hemingway, Hills Like White Elephants
  Walt Whitman, Democratic Vistas  
  臼井吉見(うすい よしみ), 形式主義文學論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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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근옥 시집 “바퀴 위에서”론

 

송 재영

(충남대 불문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과 졸업. 프랑스 Montpellier III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 트리스탕 자라, 앙드레 브르통), 「프르스트에서 까뮈까지」(앙드레 브루아) 등의 번역과「현대문학의 옹호」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1

고대 그리스 철학자 지노우(zeno)에 의하면 이 세상에 움직이는 물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행하는 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물체가 움직인다고 가정할 때, 그러나 그 움직임을 일정한 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트로이 성을 함락시킨 천하의 맹장 아킬레스(Achilles)의 화살도 느림보 거북을 쏘아 맞출 수 없다. 어떤 목적물에 가 닿으려면 우선 그 목적물과 추적자와의 거리 중간 지점에서 출발하여야 하고, 그 다음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거리의 축소이지 물체의 운동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물체의 운동을 부정하는 지노우의 유명한 파라독스, 아니 괴변 철학의 진면목이다. 그런데도, 아킬레스의 화살과 비교되는 이 괴변으로 이 글의 모두를 장식하는 것은 그것이 이제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근옥의 시 세계와 미묘한 컨트러스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퀴 위에서』, 그렇다! 바퀴 위에서 그러니까 열차를 타고 이 시의 퍼스나 세 사람은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 구조가 내면적으로는 지극히 복잡한 장치로 얽혀 있기 때문에 첫눈에 대뜸 시인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시 읽기가 『바퀴 위에서』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따라서 무익하고 불필요한 접근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종의 책임 회피이다.  

시 읽기에 있어, 아무리 새롭고 기발한 분석 방법론을 내세우며, 그 이론적 타당성을 강조할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바로 해석학적 이해라는 관문이다. 치밀하고 풍부한 자료에 입각한 주석학적 고증이 아니라 할지라도, 한 편의 시가 담고 있는 최소한의 의미론적 추론마저 포기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시 읽기의 오류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지함을 호도하는 태도이다. 하나의 예로서 말라르메(S. Mallarmé)의 경우를 들어보자. 오늘날까지 말라르메라는 이 거대한 <언어의 집> 앞에서 수많은 연구가들이 배회하다가 남기고 간 기념비적 저작들, 그 가운데서 그것이 비록 역사적, 정신분석학적, 기호학적―그 어느 방법론에 의거했을 지라도 결국엔 말라르메 시에 몇 줄의 해석학적 설명을 더해주는 것으로 귀납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바퀴 위에서』가 난삽하다고 해서 처음부터 최소한의 의미소(意味素)의 추출조차 단념하고 지나친다면 이 작품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해진다. 더구나 이 작품은 형식상 일정한 서사적 구조―시인은 이것을 소극시라고 정의하고 있다―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진술 형식이 너무나 특이하고 복잡해서 전통적인 독서 방식으로는 처음부터 접근이 어렵다. 어쩌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현실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한, 말하자면 부조리 투성이의 어떤 세계를 영상적으로 보는 듯한 그런 시이다. 그러나 이 장시가 담고 있는 줄거리는 분명하고 짧게 요약될 수 있다. 마가, 우가, 구가, 이 셋은 양심 강탈범으로서 쫓기는 입장에 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질주하고 있다. 그들은 말끝마다 고향에 간다고, 아니 가야 된다고 떠들지만, 그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 또 언제 거기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은 때로는 반목하고 또 때로는 화해하면서 기약 없는 여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연극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바퀴 위에서』를 이 이상 더 소상히 산문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이 시에 대한 배반이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어떤 점에 있어서 그것은 무익하고 불필요한 작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위와 같은 서사 구조가 순서 정연하게 배열되고 기술된 것이 아니라 산만하게 순서 없이 얽혀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여기서 우리는 주근옥의 시적 비의(秘儀)를 들추어내어야 될 단계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시적 비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간단히 말해서 쉬르레알리즘적인 기술 방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바퀴 위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시인의 내면에 중첩되어 온 무의식 세계의 시적 변용이다.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강박관념의 실체는 유적자(流謫者)의 자기 상실감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퍼스나는 바로 이것을 대변하고 대역(代役)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시인의 무의식적 분신으로서 넓은 의미로는 오늘날의 인간 조건을 암시한다. 싸르트르(J. P. Satre) 식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아무런 선험적 가치도 없는 존재로서 이 지구상에 불쑥 던져진 우연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작품에 수없이 등장하는 고향이라는 시어는 바로 이 자기 정체성의 상징어 이외에 다름 아니다.  

         

우가도 등을 맞대고 앉으며

고향은 얼마나 머냐

그 따윈 알아 뭘 해

우리의 정신은 고향에 있지

지금 그걸 가지러 가는 거야

그러나 그들은 고향이 얼마나 먼지, 언제 도착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고향은 얼마나 머냐?

어둠이 끝나는 곳이지

굉장히 멀대

나도 한 번 안 가봤으니까

잘은 몰라

이제 출발했으니까

정차하는 곳이 바로 거기겠지

그러면서도 그들은 고향에 도착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금만 더 가면 고향이야

우린 제 정신을 찾게 되는 거야

 

시인은 거의 작품 말미에 이르러서 <우린 제 정신을 찾게 되는 거야>라는 시구로써 고향의 숨은 뜻을 분명히 보여준다. <뿌리 뽑힌> 유적자가 찾아가는 고향, 다시 한번 되풀이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정체성의 확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글의 초두에서 잠시 언급한 지노우의 얼토당토 아니 한 궤변을 상기할 차례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퀴 위에서』의 기차는 아킬레스의 화살이다. 그것은 아무리 달려가도 고향에 가 닿을 수 없다. 그 기차는 바퀴만 굴러갈 뿐 영원히 제 자리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처음부터 거북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주근옥의 시적 진술 방식은 일찍이 쉬르레알리스트들이 실험했던 자동기술법을 연상시킨다. 브르통(A. Breton)에 의하면 자동기술법은 일종의 무의식적 기술방식이다. 그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다음처럼 정의한다. 《이성에 의한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는 윤리적인 관심을 완전히 떠나서 행해지는 사유의 구술》. 확실히 주근옥은 <심미적 윤리적 관심>을 뛰어넘고 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언어의 윤리성(나는 이 말을 언어 표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규범으로 생각한다)마저 포기한다. 아니, 무의식 세계에 있어서는 원래 언어의 윤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기록 장치를 잘 작동만 시키면 될 일이다. 『바퀴 위에서』는 이 자동기술 장치가 잘 작동되고 있다. 시인은 단지 열차의 바퀴가 탈선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작만 가하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무의식의 세계에서 흔히 드러나는 것이 야수성과 공격성이다. 의식의 표면 위에서는 도덕률로 은폐되어 있던 것이 일단 무의식의 세계로 내려가면 거기서는 마음껏 본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건 말씀야, 간단하지 

순간에 숨통을 끊어버리니까?

아픔이 오래 계속되도록

눈알부터 뺄 걸 그랬다

손가락부터 끊어버리는 건데

난 죽었어, 결박당한 채 죽어있어

피를 콸콸 쏟으며 쓰러진

한 발 다가서며, 그건 꿈이야

우가도 다가서며, 병신 그건 꿈이다

오지 마, 거기 서, 쏠테야

난 아직 아픔을 느끼고 있어

피를 콸콸 쏟으며 쓰러진

내 얼굴이 똑똑히 보여

우린 널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야수적인 공격성은 마치 『말도로르의 노래』에 나오는 그것처럼 환상적․착란적 성격을 띄고 있다.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이 잔인한 공격성을 형상화하기 위해 주로 동물적 이미지에 의존했다면, 주근옥은 직접적으로 무의식의 표출을 과감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무의식의 환상적 상태에서 주제와 논리의 설정 없이 비약적으로 전개되는 자동기술적인 시구들은 인간의 원초적 잔인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라깡(J. Lacan)의 주장에 따른다면, 무의식의 범주는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그리고 <실재적인 것>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바퀴 위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의 언어적 범주는 어느 것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명료한 선으로 구분할 수 없도록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두 경계선에 다 걸쳐 있으면서 <실재적인 것>을 후광으로 가리고 있는 형상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인가? <실재적인 것> ―달리 말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실존적 정체성을 의미할 터인데,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퍼스나를 이 고향, 즉 정체성을 찾아 기차 여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바퀴 위에서』는,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아킬레스의 화살>을 상징화한 주제를 심층구조로 삼고, 이것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분출되는 무의식의 언어를 사상(捨象) 없이 시화(詩化)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형식상 극시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주근옥은 적절히 지문을 삽입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단순한 부가적 기법일 뿐이다. 그는 작품 전체를 통하여 무의식의 흐름을 절실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일체의 구두점을 생략하고 가급적 짧은 시행의 연속으로 독자를 긴장시키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시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수사학조차도 거부하고―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 거추장스러운 장식일 수도 있으니까― 그는 직설법적 단문(短文), 그러면서도 읽는 가운데 주술적 마력의 흡인력을 발휘하는 시를 선뵈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어쩌면 자칫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연속적인 단문의 시행을 때로는 활력적인 리듬의 사용으로 생동감 있게 살리고 있다. 즉 이 작품에서 쉽게 눈에 띄는 두운(頭韻)과 각운(脚韻)의 의도적인 배합, 그리고 반복운의 사용에 의한 음악적 효과 등은 다분히 시인의 ―계산된 기법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국 『바퀴 위에서』는 현실에서 추방당한 무력한 시인이 유적지를 배회하면서 탈출을 시도하려는 몸부림의 노래, 고향으로 상징되는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현대인의 무의식의 언어군이다. 아무리 달려도 고향에 닿지 못하는 『바퀴 위에서』 단지 <갑자기 높아지는 기관차의 소음>만이 들릴 뿐이다. 즉 고조되는 자의식의 소리만 들리는 것이다. 

 

2

『다리 위에서』는 우화적 기법의 풍자시라는 점을 제일 먼저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만남과 기다림의 장소를 연상시키는 다리의 이미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사내 1>과 <사내 2>가 <횡설수설 지껄이며 걸어와 /철푸덕 주저앉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앞서 살펴본 『바퀴 위에서』와는 많은 동질성을 보이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많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다.

『바퀴 위에서』의 바퀴가 실제로는 굴러가지 않는 바퀴, 즉 영원히 정지돼 있는 기차이듯이, 『다리 위에서』의 다리 역시 결코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외로운 존재이다. 이 작품이 베케트(S.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주제적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두 사내는 우연한 인연으로 한 여인을 공유했던 경험이 있는 숙명적인 관계에 있다. 아무런 윤리의식 없이 이 사내와 저 사내 사이를 징검다리 건네듯 내왕하며 몸를 내맡긴 여자, 바로 이 여자가 이 작품의 직접적인 제재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녀는 작품에 정면으로 등장하지 않고, 마치 고대극에서 볼 수 있는 무대 밖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모습을 숨긴 채 작품을 이끌어간다. 즉 <사내 1>은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참혹하게 살해하여 그 시신의 일부를 가방 속에 넣고 다리 위로 달려와서 그것을 강으로 던질 순간을 노리고 있는 반면, <사내 2>는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이 돌아오리라 믿고 다리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연히 다리 위에서 해후한 두 사내,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들이 같은 여인을 공유했던 것을 알고 경악한다. 그리고 <사내 1>은 <사내 2>가 그 여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그에게 가방을 넘겨준다. 그러나 <사내 2>는 그 가방 속에 사람의 머리가 있는 것을 보고 질겁한다.

 

가방을 조심스레 연다, 순간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사색이 다 되어

나 날더러 어떻게 하라고

사람의 머릴, 사람의 머릴

두 손으로 가방을 든 채

가로등 밑을 왔다갔다 한다

제 정신이 아니다

강물에 가방을 던져버리고

뒷걸음치다가 급히 도망친다

가로등만 혼자 남는다

 

이렇게 끝나는 『다리 위에서』는 분명 미묘한 극적 구조에 따라 그 서사체계가 전개되고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숙명론적 세계관을 현대적 기법으로 패러디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삶의 넌센스를 희화화(戱畵化)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삶의 엄숙함과 현실의 냉혹함이 함께 어우러져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하듯이 『다리 위에서』 또한 관능적 쾌락과 원죄의식의 속박이라는 상호 충돌적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내가 벌인 비속한 열정의 드라마는 <사내 1>에게 있어서는 동물적 잔인성과 비열함으로, <사내 2>에게 있어서는 순박한 기다림과 처절한 절망으로 각기 대조를 이룸으로써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그 종지부를 찍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다리 위에서』는 시보다 분명 희곡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사 구조가 아주 정연하게 기하학적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다분히 산문적 문채(文彩)가 번뜩인다. 자서(自序)에서 시극(詩劇)은 상연을 전제로 하여 쓰여진 운문극인 반면, 극시(劇詩)는 상연과는 상관없이 쓰여진 운문극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작품은 극시와 유사한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작품은 시인의 주장과는 달리 극시보다는 오히려 시극 쪽에 가깝다. 즉 『다리 위에서』는 무대 상연을 함에 있어서도 그다지 무리가 없는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사실 60~70년대 서구 연극계를 풍미했던 이른바 앙띠․떼아뜨르(反演劇)라는 이름의 희곡들은 주근옥의 『다리 위에서』보다 상연하기에 오히려 더 부적절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 작품의 무대 상연의 적합성 여부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단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앙띠․떼아뜨르가 언어의 무의미성과 연극 자체의 부조리함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고 있듯이 주근옥은 『다리 위에서』를 통해 시의 무용성과 연극의 허위성을 풍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다리 위에서』는 도식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구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즉 가로등이 비치는 다리, 여기서 이루어지는 두 사내의 운명적인 해후, <사내 1>이 들고 있는 가방,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 이 일련의 이미지가 통합되어 떠올리는 메타포는 아름다운 시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시의 이러한 아름다움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동물적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시의 감각적 균형을 잃지 않도록 기여한다. 다시 구체적으로 반복한다면 분뇨담(糞尿譚)에 가까운 표현들과 잔인한 이미지가 가끔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다리 위에서』를 통해서 언어적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 아버진 개백정이었지

뒷마당은 개들의 사형장이었지

개의 모가지를 옭아 잡아당기면

생똥이 삐질삐질 나오고

그 악에 바친 눈

빼어 문 혓바닥

습관으로 난 보았소

개백정이라고

아이들이 놀렸지

 

<사내 1>이 들려주는 그의 아버지의 직업적인 삶의 이러한 잔인성은 자칫 간과하기 쉽지만 그러나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개백정인 아버지의 개잡는 이러한 끔찍한 모습의 기술은 그 아들인 <사내 1>이 장차 자행할 살인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사내 1>이 자신의 정부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그 목을 잘라 가방에 넣는 장면을 묘사하는 식의 직접적인 기술방법을 생략하고, 개백정의 도살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간접적인 암시로 대신하고 있다. 이것은 굉장히 치밀하게 계산된 시적 기교이며, 따라서 그것이 발휘하는 상징적 효과는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났을 때 더 확연하게 나타난다.

『다리 위에서』는 그것의 극적 서사성 때문에 시의 미학적 측면에서는 많은 부분의 손상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야기가 복잡하고 매우 미묘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자칫 재미있는 서사성만을 탐색하기에 바빠 정작 시의 본바탕을 멀리 하기 쉽다. 이야기를 더욱 단순화함으로써 주제를 더 부각시키고, 아울러 더욱 긴장감 있는 시적 언어세계를 구축할 수는 없었을까― 이와 같은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던지는 충격은 만만치 않다. 물론 오늘날까지 동서양을 통해 이야기의 형식을 담은 장편시는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다리 위에서』와 같이 극적인 상황을 담고 있는 극시가 있었던가? 이런 의미에서 이 시는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3

주근옥은 많은 시인들이 애써 추구하고 있는 이른바 품격 높은 시어를 탐내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비속한 일상어가 범람할 뿐, 수사적 구문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한 마디의 시어, 한 행의 시구를 통해서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고자 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로 작품 전체의 구조, 그리고 이 구조 사이에 숨어있는 언어의 고리가 발휘하는 힘이 그의 시의 작품성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바로 이 언어의 고리들을 풀어서 정연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그의 시가 처음엔 쉽게 읽혀지는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어야만 되는 까닭은 바로 이 숨어있는 언어의 고리를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근옥은 확실히 새로운 장시의 가능성을 실험해 보이고 있다. 『바퀴 위에서』는 쉬르적(심오한 초현실주의의 비-영웅적 서사시, 또는 미니멀리즘과 울리포) 기법을 통해서 무의식의 내면 세계를 조명하고 있는가 하면, 『다리 위에서』는 일상적 어법을 통해 같은 기법으로 고대인의 운명론적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편의 장시는 이미 밝힌 것처럼 새로운 가능성과 또한 몇 가지 의문점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이 두가지 문제점을 어떻게 보완하고 해결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시인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히 다음 작품에서 밝혀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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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r la possibilité d’une nouvelle poésie épique

 

Jai-Yong SONG, traducteur de Sur les roues et Sur le pont de Gueune-Ok JOUH, a fait ses études de langue et littérature françaises à l’Université de Séoul et soutenu une thèse de doctorat à l’Université Paul Valéry Montpellier III. Ses travaux principaux portent sur les recherches de la critique littéraire française. Il a traduit également en coréen de nombreux ouvrages littéraires françaises, notamment de Hugo, Apollinaire, Breton, Maurois, etc. Il est professeur honoré à l’université de Chung-Nam.

 

1)

On connaît la fameuse théorie de Zénon d’Elée. D’après ce philosophe grec de l’antiquité, il n’y a rien qui puisse se mouvoir d’un point à un autre. Cette impossibilité de mouvement, il tenta de l’éprouver par une série de paradoxes dont le plus connu est celui de la flèche qui ne parvient jamais à son but. Ainsi, supposant l’espace et le temps divisibles à l’infini, ce philosophe nia le mouvement : la flèche est immobile dans chaque fraction du temps, donc Achille ne saurait atteindre la tortue. Si nous commençons ce petit article par la présentation d’une théorie sophistique comme celle-là, c’est qu’elle montre une sorte d’homogénéité comparative, semble-t-il, avec la poésie de Gueune-Ok Jouh dont nous allons parler ci-après.

 

2)

Sur les roues, poème épique dans un certain sens, raconte un événement absurde mettant en scène trois personnages qui voyagent par le train. Sa structure apparente, qui semble d’ailleurs très simple, dissimule si habilement des procédés allusifs variés qu’il n’est jamais facile d’en apercevoir le mystère poétique. C’est pour cela qu’une lecture rationnelle ou thématique ne peut nous amener au déchiffrement de ce mysticisme hermétique.

Bien que jusqu’à présent beaucoup de critiques littéraires aient prétendu appliquer de nouvelles méthodologies, chacun insistant sur sa propre originalité, on constate qu’ils n’ont pu, finalement, que revenir à la question centrale de la difficulté de traduction du poème. Nous ne proposons pas ici de critique herméneutique accompagnée de recherches savantes, mais tout simplement une compréhension sémantique au sens strict du terme. Quoi qu’on dise, la poésie n’existe pas isolée du sens sémique ou du moins sans contenu prosaïque. En parlant de Mallarmé, Jean-Louis Backès écrit : « Que peut-on écrire sur les poésies de Mallarmé, sinon un nouveau recueil d’exégèses ? » (Poésies de Mallarmé) Et effectivement l’exégèse, c’est-à-dire le commentaire prosaïque est indispensable pour tout poète, et naturellement pour tout critique. Bref, quelle que soit la méthode critique à laquelle on prétende, historico-critique, psycho-critique, socio-critique ou sémio-critique, on ne peut pas faire l’impasse sur le contenu dans la mesure où la poésie doit être comprise du moins au point de vue sémantique et syntaxique.

Il nous serait difficile de bien comprendre la structure fondamentale de Sur les roues sans faire l’interprétation du contenu de l’œuvre. D’abord il faut bien remarquer que ce poème contient une certaine forme narrative que le poète lui-même aime à appeler « poème dramatique» . Le contenu du poème peut se résumer d’une manière simple et concrète. Trois personnages : Mah-gah, Houh-gah et Gouh-gah, tous trois criminels de conscience, sont poursuivis par la police. Ils sont montés dans un train pour s’enfuir. Néanmoins ils commencent par l’affirmation qu’ils veulent et doivent aller dans leur pays natal. Chose curieuse, ils ne savent où leur pays se situe, ni savent quand ils y seront arrivés. Malgré tout, ils poursuivent leur voyage, tantôt se disputant l’un à l’autre, tantôt se réconciliant. Telle est la narration littéraire qui se développe sous forme dramatique tout au long de Sur les roues. Il semble ici préférable de ne pas expliquer plus en détail le contenu narratif de ce poème pour ne pas risquer la destruction totale de l’art poétique.

D’ailleurs la caractéristique la plus importante de l’œuvre résident dans le fait que sa description narrative ne revêt pas une forme cohérente, mais tout à fait décousue. Quelle est l’intention du poète ? Ne serait-ce pas de ce stade que nous devons partir pour enquêter sur l’arcane poétique de Gueun-ok Jouh ? Disons brièvement, s’il nous est permis de le dire, que son arcane poétique procède tout naturellement d’une variation de la description surréaliste. Autrement dit, dans Sur les roues, se dessine une transformation poétique de l’Inconscient accumulé depuis longtemps dans l’esprit du poète. On peut même dire que l’idée fondamentale et récurrente du poète est le sentiment d’une Perte du Soi, exilé de son identité véridique. Les trois personnages jouent bien, chacun à leur tour, le rôle de l’exilé. Leur rôle suggère peut-être, en un certain sens, un aspect fondamental de la condition humaine d’aujourd’hui. Certes ces personnages ne sont que des êtres fortuits, c’est-à-dire sans « valeur à priori » selon la parole fameuse de Sartre. C’est pourquoi ils sont obligés de vérifier leur identité d’origine. Le terme « pays natal » qui se répète à plusieurs reprises symbolise leur identité perdue.

 

Ils se sont assis dos à dos

« Où est donc notre pays natal ? »

« Ce n’est pas important ça »

« Notre âme réside toujours dans le pays natal

Nous voulons y aller pour attraper ça »

 

Mais ils ignorent à quelle distance leur pays natal se trouve. Ils ne savent pas non plus à quelle heure ils y arriveront. Néanmoins ils ne perdent jamais l’espoir de pouvoir l’atteindre.

 

On est arrivé à la gare-baraque

On arrivera bientôt au pays natal

Enfin nous reviendrons à nous-mêmes

 

Ici le sens caché du terme « pays natal » s’explique clairement. Ce n’est que le synonyme, répétons-le, de « l’identité ».

Il est utile ici, pour mieux éclairer le thème poétique de Sur les Roues, de se rappeler la théorie sophiste de Zénon que nous avons présenté au début de cet article. Car le train décrit dans cette œuvre est analogue à la flèche d’Achille. Ce train a beau rouler pour les amener à leur pays natal, ce sont seulement les roues qui roulent alors que le train lui même reste immobilisé sur le même point. Le discours poétique de Gueune-ok Jouh est fondé, sans doute possible, sur la méthode de description automatique du Surréalisme. Pour André Breton, « le Surréalisme est l’automatisme psychique pur par lequel on se propose d’exprimer, soit verbalement, soit par écrit, soit de toute autre manière, le fonctionnement réel de la pensée. Dictée de la pensée, en l’absence de tout contrôle exercé par la raison, en dehors de toute préoccupation esthétique ou morale ». Effectivement Gueune-ok Jouh cherche à rejeter très sournoisement toute préoccupation esthétique ou morale, et renonce parallèlement, de façon spontanée, à la moralité langagière dont on pourrait faire une norme exigée par l’écriture. On peut aller jusqu’à dire, en ce cas, que la moralité langagière n’existe même pas dans l’univers de l’inconscient. La production de la poésie est possible dans la mesure où le mécanisme automatique fonctionne ponctuellement. Et on peut remarquer la mise en œuvre de ce mécanisme automatique tout au long de l’œuvre du poète.

 

C’est facile

De couper la tête en un instant

On aurait dû arracher les prunelles

Pour que la douleur durât éternellement

On aurait dû couper les doigts aussi

« Je suis tué ligoté par une corde

Je suis tombé terriblement ensanglanté »

Il s’approche et dit que c’était un rêve

Houh-gah lui aussi s’exclame

Que tu es idiot ! C’est vraiment un rêve

 

La brutalité animale et la férocité offensive s’expriment très souvent, comme on le voit dans les vers ci-dessus, dans l’univers de l’Inconscient. Car tous les phénomènes dissimulés au nom de la moralité humaine se dévoilent de plus en plus clairement à son approche. Et cette brutalité offensive n’est pas sans rappeler celle des Chants de Maldoror. On peut dire qu’elles se ressemblent, en ce sens qu’elles présentent toutes deux des caractéristiques fantastiques et burlesques à la fois. Gueune-ok Jouh aime à décrire, d’une méthode presque directe, le jaillissement de l’Inconscient sur l’étendue apparente, tandis que Lautréamont introduit dans son œuvre un certain nombre d’images animales pour symboliser le monde psychique.

Ainsi la structure interne de Sur les roues est formée de manière analogue au thème de « la flèche d’Achille » , sa description surréaliste se développant, quant à elle, autour du monde de l’Inconscient. Le poète lui-même prétend que Sur les roues est un poème dramatique, et pour cela il n’oublie pas d’y insérer de place en place des situations propres à organiser la dramaturgie. Mais, à vrai dire, ce n’est pas important. Ce qui est important, c’est qu’il supprime toutes les ponctuations nécessaires, du point de vue grammatical, pour donner l’impression d’un déroulement fluide du courant imaginaire de l’univers psychique. Il faut remarquer encore que le poète cherche à créer l’esthétique poétique, essentiellement par l’emploi de rythmes caractéristiques : soit par la distribution alternative de l’allitération, soit par la répétition régulière des rimes plates. Tout cela contribue naturellement à produire un effet musical qui se trouve en général très peu présent dans les poésies narratives de ce genre.

On a donc de bonnes raisons de penser que Sur les roues est un chant d’exilés qui tentent sans cesse de s’évader d’une situation bloquée pour trouver leur pays natal, qui représente l’identité perdue. Les roues ont beau rouler ; en fait elles n’avancent pas, et ils n’arriveront donc jamais à destination, c’est-à-dire au pays natal. Seul le souffle de la locomotive s’amplifie, et cela pour marquer aussi la voix de l’inconscient se heurtant à la vie matérielle. Voilà bien un des thèmes surréalistes.

 

3)

Dès la première lecture, on peut reconnaître dans Sur le Pont une poésie satirique où se développe, par l’application d’un procédé cyniquement fabuleuse, le thème de la vie tragique ou plutôt de l’absurdité de la vie. Le pont représente dans notre pensée, en général, un endroit de rencontre et séparation. L’œuvre raconte l’histoire de l’Homme 1 et de l’Homme 2. Au commencement, on voit l’Homme 2 « qui s’approche/ En baragouinant/ Et s’affaisse tout d’un coup ». Donc, le pont dans Sur le pont est un lieu d’attente. Mais l’attente est vaine, car celle qu’on attend n’arrivera jamais. Dans ce sens, cette œuvre nous fait penser à En attendant Godot de Samuel Beckett. Les deux personnages, l’Homme 1 et l’Homme 2 ont une expérience commune très étrange, celle d’une liaison sexuelle avec la même femme. La femme, anonyme, qui a jadis quitté l’Homme 1, sans aucune conscience morale pour aimer l’Homme 2, joue un rôle assez important mais invisible. L’histoire peut se résume ainsi : l’Homme 1 arrive sur le pont avec une valise dans laquelle est cachée la tête coupée de la femme qui l’a trahi. Il va certainement jeter cette tête dans la rivière, et c’est juste à ce moment-là que l’Homme 2 arrive pour attendre sa maîtresse. On peut ici bien imaginer la situation contradictoire des deux Hommes, ou plutôt l’itinéraire de leur vie absurde. En tout cas, l’Homme 1 donne sa valise à l’Homme 2, sachant que celui-ci attend impatiemment cette femme. Mais qu’est-ce qui arrive ? L’Homme 2 se recule, frappé d’effroi à la vue de la tête coupé de celle qu’il attendait.

 

Il ouvre la valise soigneusement

Et pousse un cri de surprise

En tressaillant de peur

Il devient presque cadavre

Comment faire moi ?

Ce salaud m’a laissé la tête coupée d’une femme!

 

L’œuvre finit ainsi. Et cette fin révèle sa signification poétique. On a même toutes les raisons de penser que Sur le pont constitue à certains égards une parodie de la vision fataliste de la tragédie grecque. Et d’autre part, il est certain que l’œuvre a caricaturé le non-sens de la vie à travers des événements extraordinaires.

Sur le pont nous montre, par le truchement de la forme théâtrale, l’opposition absurde entre le désir sensuel et le péché originel, ainsi que la solitude primordiale de l’homme. Les passions vulgaires, la férocité brutale, l’attente désespérée, tous ces éléments dramatiques contribuent, sans nul doute, à élargir l’effet poétique autant que possible. De ce point de vue, il est indéniable que Sur le pont est plus voisin du théâtre que de la poésie. A notre avis, ce n’est pas une œuvre si difficile à mettre en scène. Il semble que les pièces de l’anti-théâtre, par exemple, soient beaucoup plus inadéquates pour la représentation scénique que l’œuvre de Gueune-ok Jouh. Mais là ce n’est pas l’essentiel. Ce qui importe, c’est qu’il faut bien remarquer dans Sur le pont, répétons-le, la vanité et la cruauté humaines ainsi que l’absurdité et l’insignifiance de la condition humaine.

Derrière la structure schématique de cette œuvre, se dessine en filigrane, tout un monde poétique : un réverbère sur le pont, la rencontre hasardeuse des deux hommes, la valise de l’Homme 1, le courant silencieux de la rivière sous le pont, tout cela nous permet d’imaginer ou de créer un univers proprement poétique. Grâce à ce charme imaginaire, Sur le pont ne perd point la beauté littéraire, malgré de nombreuses descriptions brutes, si on peut dire, qui s’abaissent souvent jusqu’à la scatologie. Ainsi les vers ci-dessous donnent la mesure de la brutalité animale ou plutôt langagière :

 

Mon père était boucher de viande canine

Notre arrière-cour était un lieu d’exécution

Mon père tirait férocement des chiens

Par la corde attachée au cou

Pauvres chiens qui chiaient sous eux !

Pauvres chiens qui se débattaient sans force

Leurs yeux pleins de malédiction

Leurs langues pendantes hors de la gueule

 

On ne doit pas passer sur ces vers, car la cruauté professionnelle du père de l’Homme 1 contient préalablement le thème symbolique que le poème dans son entier mettra en scène. Cela revient à dire que la description détaillée de l’acte cruelle du père, en tant que boucher, fait déjà allusion au meurtre féroce du fils, fruit d’une hérédité sanguinaire, qui se produira à l’avenir. En d’autres termes, aux techniques de la description et de l’expression‍ qui nous révèlent la décapitation d’une femme infidèle, Gueune-ok Jouh oppose une technique de la suggestion et de l’évocation qui sera l’instrument majeur de la poésie moderne. Dans cette poésie, la juxtaposition d’éléments disparates oblige le lecteur à penser des rapports nouveaux de relations, à toucher une vérité insoupçonnée jusqu’alors. Aussi, il semble qu’il faille y voir un procédé bien forgé par lequel le poète reflète l’univers intérieur mieux que par d’autres moyens.

Gueune-ok Jouh ne tente point de trouver des mots poétiques distingués et raffinés. On voit, dans son œuvre, des expressions vulgaires de la vie quotidienne au lieu de vers bien forgés du point de vue rhétorique. Il apprécie l’effet intégral plus valable que la qualité langagière pour la création de l’esthétique poétique. C’est ainsi qu’il s’efforce, sous forme théâtrale, de rendre possible une nouvelle poésie épique. Son œuvre poétique mériterait, avec toute autre dénomination, celle d’épopée surréaliste(non-épique héroïque du surréalisme profonde, ou le minimalisme et l’OuLiPo). Et cette épopée, venant d’un homme qui a une profonde connaissance de l’esprit humain, peut nous toucher, à l’égal de l’épopée mythique et historique,. Il nous reste donc à attendre pour voir comment se développera la nouvelle poésie épique de Gueune-ok Jouh .

 

*

Jai-Yong SONG, traducteur de Sur les roues et Sur le pont de Gueune-Ok JOUH, a fait ses études de langue et littérature françaises à l’Université de Séoul et soutenu une thèse de doctorat à l’Université Paul Valéry Montpellier III. Ses travaux principaux portent sur les recherches de la critique littéraire française. Il a traduit également en coréen de nombreux ouvrages littéraires françaises, notamment de Hugo, Apollinaire, Breton, Maurois, etc. Il est professeur honoré à l’université de Chung-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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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빛나는 성과
   -주근옥의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론

 

장 수익(한남대학교 국문과 교수, 문학박사,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주요 저서로는 한국 근대 소설사의 탐색, 한국 현대 소설의 시각외 다수.)


1

주근옥 선생의 한국시 변동 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시문학사, 2001)를 경탄의 마음으로 읽었다. 개화기에서 1920년대까지의 역사적인 격동의 시기에 일어난 한국 현대시의 태동 과정을 다룬 이 저서는 치밀한 이론적 틀을 기반으로 문학사적 사실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칸트에서 헤겔, 보들레르에서 엘리엇, 바르트와 그레마스, 그리고 임화에서 김윤식과 김용직에 이르는 숱한 철학과 문학사의 저작들이 풍부한 시사 자료와 어울려 그의 저서 속에서 자유롭게 대화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큰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서울 중심의 학문적 풍토가 너무도 굳게 자리 잡고 있는 현금의 학문적 상황을 되돌아볼 때, 이 저서는 지방에서 활동하는 국문학 연구자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연구 의욕을 고취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나라 현대문학 연구의 전반적인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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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저서의 가장 큰 문제 의식은 한국 현대시에서 어떻게 모더니티 곧 근대성이 나타났는지 드러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선 기존의 연구사를 세밀하게 검토한 뒤, 세 가지의 명제를 내세운다. 그 첫 번째는 개화기 시가의 변화형태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개화기 시가에 상반된 성격의 두 흐름, 곧 자체적인 발전을 통해 변화한 진화시(사설시조·개화시·개화가사)의 흐름과 외래 시와의 접촉을 통해 나타난 전파시(찬송가·창가·신체시)의 흐름이 양립하고 있었음을 제시한다. 두 번째는 모더니티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헤겔 철학 특히 정신현상학의 구도를 따라 절대 이성에 도달하기 위한 주체의 자기 의식을 모더니티가 발현되는 경로로 간주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하버마스의 논의를 빌어 그러한 절대 이성은 시에서 심층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자유이자 가상 세계로서 모더니티와 동일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이 시기 시사의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어 왔던 자유시 성립과 관계된 것으로, 저자는 ‘현대시 = 자유운율 및 개성적 의미’라는 종래의 정통적인 현대시사 등식을 비판하면서 정형률이냐 자유율이냐에 관계없이 ‘심층의 새로운 의미’가 있으면 현대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개화기 이후 192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 현대시의 전개 과정은 바로 이 ‘심층’을 형성하는 문제에 핵심이 있었다고 본다.

이상의 세 명제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의 이후 논의를 보면, 매우 정합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저자는 첫 번째 명제와 관련하여 개화기에 드러난 우리 시가의 변동 과정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논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문학 자체의 내재적 발전(진화)을 중심에 두되 사회여건과의 관련성을 종속요소로 간주하는 입장을 취한 김용직의 논의와, 외래 문화의 이식(전파)으로 우리 신문학의 성립을 드러내려 한 임화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이 두 관점 가운데 어느 한쪽의 관점으로 개화기 시가 전반을 두루 설명하는 것이 무리임을 논증하고, 임화의 다소 혼란스럽지만 그 대의는 적절했던 문화에 대한 관점을 가다듬어 철학적 인식론의 틀 위에서 체계화하여 드러낸다. 이러한 시각에 따른다면, 결국 개화기 시가의 변동은 우리 문화의 전통 속에서 일어난 자생적인 발전이라는 특수한 흐름(진화시)과, 외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고 동화되거나 수용되거나 일방적으로 영향받는 일반적 흐름(전파시)이 모순 관계를 형성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저자는 개화기 시가의 변동을 분석 내지 해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문화체계가 어떻게 운동하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구조기능주의적 관점이다. 곧 진화시든 전파시든 모두 이 구조기능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공간적--철학적 인식론--으로 분석해낼 때라야 비로소 진화시나 전파시가 지니는 의미의 심층적 맥락이 드러나고 따라서 그것이 지니는 시간 속에서의 의미도 좀더 명확해질 것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두 번째 명제인 모더니티에 대한 규정 문제를 어떻게 논했는지 살펴보자. 이 명제는 이 논문 전체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주관에서 객관으로의 관점(진리의 본성적 관점)과 주관에서 주관으로의 관점(진리의 기준적 관점)이라는 큰 틀로 철학의 흐름을 구분한다. 여기서 전자의 관점은 이미 사실로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을 주관이 어떤 식으로 모사·반영하는가 곧 인식 대상과 주관의 관계를 문제삼는 관점인데,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결국 경험 또는 오성의 한계 속에 갇히는 것이 된다(브래들리 및 엘리엇). 반면 후자의 관점은 문제틀을 인식 대상과 주관의 관계에서 주관 내부의 관계 곧 인식 자체의 문제로 해명의 방향을 선회하는 것이다(칸트 및 헤겔). 그것이 독일고전철학의 비판론이거니와, 특히 저자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드러낸 즉자(타자)와 대자로 구성된 자기 의식이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절대 이성에 도달하는 경로를 추적하면서 그것이 경험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무한적인 자유로 나아가는 길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하버마스의 논지를 비판적으로 가져와 이러한 자유를 지향해 나아가는 것 또는 그러한 자유 자체야말로 모더니티임을 드러낸다. 한편, 이러한 시각에 따른다면, 모더니티는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것이며, 경험적인 표층적 사실에 얽매여서는 절대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표층적 사실에서 그러한 심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역시 논리적인 방법론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방법론으로 저자는 바르트와 그레마스의 기호학을 가져오고 있다. 이 두 이론은 모두 표면적인 언술에서 심층 구조를 분석해내는 구조적 방법들인바, 앞에서 진화시와 전파시의 대립을 파악하기 위해 구조기능주의를 가져왔던 것과 논리적으로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핀 모더니티는 일반적인 차원에 있다. 따라서 시라는 특수한 범주 속에서 모더니티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살필 필요가 있는데, 저자는 이를 보들레르의 시와 시론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일단 저자는 시에서 모더니티란 또다른 심층의 작품을 이루는 것, 곧 작품을 중층 구조로 만드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책의 4장에서 특별히 보들레르를 다룬 이유도 그 때문인데, 이른바 ‘심연’과 ‘상응’으로 요약되는 보들레르의 시와 시론은 그러한 절대지로서의 심층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상응’인바, ‘상응’은 단순히 내용상의 심층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파악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용적 주제 설정의 차원을 넘어 소리와 소리의 화음으로부터 떠오르는 불확정성의 근원”으로서 심층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첫 번째 명제로써 개화기 시가의 변동 과정을 바라보는 문학사적 시각을 마련하고, 두 번째 명제로써 모더니티의 정체를 규정하는 이론적 틀을 마련하였다면, 세 번째 명제는 이 두 명제를 기반으로 초기 한국 현대시에 대한 실질적인 분석을 하는 것이 된다. 저자는 그러한 분석을 통해 현대시의 정신이 단순히 자유시의 성립에 있지 않고 심층이자 절대로서의 모더니티를 형성하는 데 있음을 논구한다.

개화기 시가의 진화시와 전파시에 대한 분석을 보면, 우선 진화시는 하나의 즉자적 상태로 간주되는 것 같다. 그래서 형태면에서 어느 정도 발전은 이루었으나 의미상 단층 구조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어서 심층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전파시는 좀 복잡한데, 찬송가의 경우는 서구시 형식을 가져왔으나 심층 의미를 가지지 못했으며, 창가 또한 부분적으로는 전통 운율과 접합시켰으나 기본적으로 일본 및 서구의 악곡 형식을 단선적으로 가져오는 차원에 머무른 탓에 단층구조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신체시의 경우는 모더니티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찬송가의 영향을 받은 이승만의 「고목가」는 저자에 의해 최초의 신체시이자 그 나름의 모더니티를 배태한 것으로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한편 일본 신타이시의 영향을 받은 최남선의 신체시 역시 모더니티를 배태한 것이기는 하나 그러한 모더니티는 일본의 사회진화론적 이념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비판된다. 결국 진화시와 전파시는 헤겔의 관점에 따를 때 자기의식의 낮은 단계에 머무르는 시들로서 모더니티가 태동하는 초기의 혼란상이 나타난 경우라고 하겠으며, 모더니티의 본격적인 형성은 이후의 시들로 미루어진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시 형성 과정의 모더니티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앞에서 살펴본 세 번째 명제에 따른다면, 모더니티는 내용의 차원이 아니라 형식까지 아우르는, 임화의 개인적 용어로는 ‘양식’의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임화의 ‘양식’ 개념이 소박하게나마 가상세계로서의 ‘자유’(자유운율이 아니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 바 있거니와, 이러한 자유의 개념이 백대진, 황석우, 김억 등을 거쳐 주요한, 김소월 등의 시에서 형성되고 있었음을 기호학적 분석틀을 이용하여 보여준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모더니티가 자유 운율의 시에서뿐만 아니라 정형 운율의 시에서도 나타난다고 본 점이다. 곧 저자는 현대시가 진정한 현대시가 되기 위해서는 자유 운율만 확보해서도 안되고 동시에 개성적인 의미(‘의미의 개별성’)만 드러내어서도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자유 운율과 개성적 의미라는 표층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그 무엇, 그것이 심층이고 의미의 불확정성인바, 그것이야말로 시인과 독자에게 동시에 자유를 느끼게 만드는 것으로서 모더니티가 된다는 것이다.

3

이상의 내용 소개에서 보듯이, 이 저서는 여러 가지 미덕을 지니고 있어 주제 넘게 서평자의 위치에 선 필자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한 미덕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무엇보다 모더니티에 대한 원론적인 접근에 있다. 주지하듯이 모더니티의 특성으로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이 이성중심주의이지만, 그러한 이성은 대개 데카르트가 주목했던 방법론적 또는 회의적 이성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이 주체와 맺는 관계는 확증성 이상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곧 주체의 다양한 층위는 사상되고 방법론적 회의라는 일관된 방향으로 구성될 뿐이다. 그럴 때 주체의 다양한 층위와 이성을 연결시킨 것이 이른바 독일고전철학이라면, 주체가 자기 의식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절대 이성에 도달하는 과정을 논한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비록 미완이지만 그 작업만으로도 주체 철학의 정점에 서 있다. 이러한 철학적 구도를 이 저서는 문학사의 전개 과정에 도입하고 있거니와, 이를 위해 오성과 이성의 관계를 밝힌 것은 ‘모더니티 = 이성’이라는 이 논문 전체의 주제에 가장 큰 이론적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우리 문학사가 오성의 한계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의 비밀스러운 과정을 밝혀낸 것은 그러한 시도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 현대문학 전체의 가장 큰 화두인 모더니티의 획득 또는 형성 문제에 대한 하나의 잣대로도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저자의 학문적 야망이 크고 깊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헤겔의 철학과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일정한 수준으로 융화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헤겔의 절대 이성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모더니티를 심층에 놓고, 그러한 심층을 밝히는 방법으로 구조주의적 분석 방법을 가져온 것은 얼핏 보기에 모순이 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일기도 한다. 구조주의적 방법론은 주체에 반하는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오히려 현상학적 방법을 가져왔으면 어떨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구조주의의 방법을 그 속속들이 가져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야말로 하나의 하위적 도구로써만 쓰고 있을 뿐이다. 이는 구조주의의 측면에서 볼 때는 방법론적인 후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저서의 전체 흐름에 있어서는 오히려 심층의 모더니티를 논구하는 적절한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형 운율과 자유 운율의 문제를 이성과 오성과 묶어서 기호사각형으로 제시한 부분은 현대시의 본질적 성격을 적절하고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보들레르 이후의 현대시의 본질이자 모더니티의 성격으로서 심연과 상응을 들고, 이를 지향해 나가는 운동을 현대시의 세계사적 보편성으로서 제시하면서, 이와 유사한 과정으로 한국 현대시의 형성 과정을 드러내려 한 점이다. 이에 의해 한국 현대시가 어떻게 시적 깊이를 확보하게 되었는가를 치밀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러한 한국 현대시사의 운동이 세계사적 보편성과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예전에도 세계 현대시의 보편적 흐름에 맞추어 한국 현대시사의 변동을 설명하려 했던 시도가 여러 번 시도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도들은 운율 등의 장르 규칙 또는 형식의 측면이나 시적 언어의 개성적 의미 확장이라는 표면적 차원에 머물렀을 뿐이어서, 이 저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정신’의 측면에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던 것이다. 유한한 가운데서도 무한을 지향해 나가는 그러한 정신을 우리 현대시사에서 보게 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저서의 가장 큰 의미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네 번째는 기존 연구들에 대한 성실하고 치밀한 읽기와 비판이 수행된 동시에 그러한 비판을 이론적 측면뿐만 아니라 치밀한 실제 작품 분석에도 훌륭히 연계시켰다는 점이다. 근 600페이지나 되는 큰 저서에서 주제와 관계되는 수많은 논문들을 분별하고 그 긍정적 의미와 한계를 짚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서구의 문학 이론뿐만 아니라 우리 국문학사의 여러 연구들에 대해서도 철학적 이론틀을 바탕으로 그 의의와 한계를 짚어내면서 그 한계를 돌파해 나갈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논지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궁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 아래서 개화기에서 1920년대에 이르는 많은 작품들을 실질적이면서도 깊이 있게 분석해 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이론적 관심이 승한 논문에서 작품 자체의 분석에 소홀한 경우가 많은데, 이 저서는 그러한 잘못에 빠지기 쉬운 후학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밖에도 이 논문이 가진 미덕을 꼽자면 한이 없을 것이나, 그것은 이 논문을 직접 읽는 이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서평자로서 좀 의문이 가거나 아쉬웠던 점을 몇 가지 말해 보기로 한다.

첫 번째로는 헤겔의 자기 의식의 변증법을 문학사의 변동 구도에 적용하는 문제이다. 즉자와 대자라는 자기 의식의 분열은 그러한 변증법이 작동하는 첫 단계일 것인데, 처음에 서평자는 진화시와 전파시의 대립이 바로 그러한 자기 의식의 분열과 상동 관계에 있는 것으로 ‘오독’(?)하였지만, 정작 논문의 후반부에서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서평자로서는 진화시를 대자적 자기 의식에, 전파시를 즉자적 자기 의식의 위치에 놓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너무 과도한 일반화나 이론틀의 일방적 적용이라는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어떻든 서평자로서는 이후 우리 현대시가 스토아주의나 회의주의, 또는 불행한 의식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그려내지 않은 것이 아쉬운 것이다(실제로 김소월의 「초혼」 같은 작품은 분석에서 빠져 있는데 이 시는 불행한 의식의 한 예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덧붙여 말할 것은 진화시에 대한 분석이 전파시에 비해 너무 소략한 감이 든다는 것이다. 진화시와 전파시 간의 경쟁 관계나 대립 관계를 다루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 하위 장르들 간의 경쟁 관계를 염두에 두면 자기 의식 간의 대립과 상응하는 문학사적 구도를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의문과 연관된 것으로, 그렇게 자기 의식의 발전이라는 틀이 관철되지 못했기에 ‘심층’으로서의 모더니티가 단순화된 감이 든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보들레르의 심연과 상응을 생각해 볼 때 그러한데, 보들레르에게서는 ‘향기’로 언급되었듯이 유현(幽玄)함이 드러나지만, 신체시의 일부나 김억, 황석우 등의 시에서 분석된 바의 심층은 정말 심층이라고 하기보다는 좀 소박한 비유적 의미 차원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의미나 운율 차원을 넘어 그러한 심층이 나타나고 있음을 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된 시들이 저자가 논한 바의 심층을 감당하기에는 유현함이 부족한 시들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특히 「해에게서 소년으로」에 대한 분석에서 더욱 그러한데, 그 신체시의 심층이 일본의 사회진화론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심층이라기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쉬운 점에 대해 저자는 그것이 한국현대시의 ‘태동’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태동’이란 움직임이며 따라서 방향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방향성이 섣불리 규정할 수 없는 절대 이성으로서의 모더니티에 있다면, 그것을 향한 문학사의 대립적 운동을 자기의식의 운동과 상응하는 방식으로 밝혀내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아쉬웠던 점이 아니라 희망하는 사항을 말하고자 한다. 서평자는 이 저서의 시각으로 볼 때 1920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게 될까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가령 카프 계열의 시라든가(그 속에는 단순한 선전시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도 있다), 아니면 민족주의 계열의 시, 나아가 모더니즘 시에서 형성된 모더니티 또는 심층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지속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정신’으로서의 한국현대시사를 알게 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한국현대시의 가장 큰 비밀과 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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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주근옥 선생의 역작을 어줍잖은 후학의 위치에서 평해 보았다. 이러한 서평 자체를 하는 것도, 그리고 상찬의 말을 덧붙이지는 못할 망정 다소간 비판한 것도 모두 비례라는 것은 알지만, 학문적인 관점에서 너그럽게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이러한 서평을 통해 서평자 자신의 이해의 부족함이 드러나지나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 저서는 넓고 깊은 것인데, 저자에게 결례가 되지 않았기를 바라며 이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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