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지요하]
‘그년’ 발언 때문에 뒤집어진 국회, 그러나…
자신의 어제 일을 모르는 사람들
2012년 08월 17일 (금)17:11:53 지요하
이미 지난 일을 다시 거론하는 것이 좀 어색하지만, 통일민주당 이종걸 국회의원이 자신의 트위터에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에 대해 ‘그년’이라고 표현한 것을 놓고 한동안 정국이 소란스러웠던 것은 지금도 내게 흥미로운 생각을 갖게 한다.
우선, 이종걸 의원의 그런 저급한 표현을 지지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이 의원의 그런 표현은 전적으로 옳지 못하다. 같은 남성으로서 남자의 품위까지 손상시키는 일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관련 기사에 달라붙은 네티즌들의 수많은 댓글들 중에는 “광복지사의 후손이 광복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장교의 딸에게 그런 호칭도 못하느냐”는 말도 있었지만, 광복지사의 후손이므로 더욱 의연하게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 쪽에 나는 동조한다.
한동안 이종걸 의원의 그런 표현을 강력 규탄하며 응징을 요구하는 물결이 새누리당의 일각에서 세차게 일었을 때, 그 파도의 선봉에 섰던 새누리당 김을동 여성 의원을 희화하는 재미있는 댓글들도 있었다. “독립군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손녀가 독립군 때려잡던 일본군 장교의 딸에게 빌붙어서 따까리 노릇을 한다”는 말이 가장 압권이었지 싶다. 그에 따라 “김을동은 김좌진 장군의 진짜 손녀가 아니다”라는 말들도 인터넷 상에 무성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재미있는 희화들이 아닐 수 없다.
이종걸 의원을 규탄하는 행사의 맨 앞줄에 서서 주먹을 불끈 쥐고 두 손을 높이 쳐들며 포효하던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두어 가지 우스운 생각을 떠올렸다.
저 선택받은 여성들은 포항이라는 동네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단 자당 김형태 의원의 제수 성추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어떤 마음들이었을까? 과연 분노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왜 그때는 아무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을까? 우선 여성 의원들이 나서서 집단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게 옳은 일 아니었을까? 그때는 전혀 수치심도 없는지 다소곳이 침묵만 하던 사람들이 왜 이종걸 의원의 ‘그년’이라는 트위터 표현에는 저처럼 기를 쓰고 집단 행동을 하는 것일까? 여성으로서의 자존심과 치욕감 문제보다도 보스에 대한 충성심 경쟁 때문에 저리 극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내가 지금 성큼 단정하는 것은 아니고, 당시 자연발생적으로 떠올렸던 의문들을 기록해보는 것일 뿐이다. 정말 ‘아니면 말고’다. ‘아니면 말고’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게 적합할 것도 같다.
▲ 한나라당 의원 24명으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가 2004년 8월 28일 전남 곡성에서 열린 당 연찬회에 올린 연극 '환생경제'. 이 연극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대사로 인해 논란이 됐다. (출처 : 오마이뉴스TV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또 한 가지 내 뇌리를 짓누르는 의문이 있었다. <환생경제>라는 연극에 대한 기억 때문에 갖게 된 의문이었다. <환생경제>는 나경원·박순자·박찬숙·송영선·심재철·이재웅·이혜훈·정두언·정병국·주성영·주호영 등 한나라당 의원 24명으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가 2004년 8월 28일 전남 곡성에서 열린 당 연찬회에 올린 연극이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으므로 내용 소개는 하지 않겠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의원 나리들의 그 연극은 한마디로 패악의 극치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노가리’라고 부르며 빗댄 대사들은 온갖 욕설의 진열장이었다. 개잡놈, 불알 값, 육시랄 놈, 죽일 놈 등등의 지칭들이 난무했다.
당시 당대표였던 박근혜 의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연극을 관람했다. 그는 특히 마을 번영회장으로 분한 송영선 의원의 입에서 노가리(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그놈은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이라는 둥 남성 성기에 대한 욕이 지속적으로 나올 때마다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연극 <환생경제>는 오늘의 새누리당에도 지울 수 없는 ‘유산’이 되었다. 유산은 좋은 유산만 있는 게 아니라 패륜적인 유산도 있는 법인데, 그것은 반면교사가 되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나쁜 ‘관성’에 일조하는 구실도 하게 된다.
문제는 오늘의 사람들이 자신의 어제 일을 까맣게 모르거나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속성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국정을 논하고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어제 일을 제대로 돌아볼 줄 아는 눈을 지녀야 한다. 그런 눈을 지닌 사람은 오늘의 행동이나 처신이 내일 어떤 도마 위에 오르게 되고 어떤 유산으로 남게 될지에 대해서도 심사숙고를 한다.
자신의 어제 일을 너무도 모르고, 오늘 행동의 전후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우리 전래 속담도 생겨났다.
다시 앞 얘기로 돌아가서, 이종걸 의원의 ‘그년’이라는 트위터 발언에 비분강개하며 규탄 물결을 일으켰던 사람들(특히 새누리당의 여성 의원들)이 자신들의 어제 일을 전혀 몰랐는지, 나로서는 매우 궁금하다. 전혀 몰랐다면 무지막지하다는 말이 적용될 것 같고, 알고도 전혀 모른 척했다면 철면피 부류일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이 2004년 8월 28일 연찬회 때 공연했던 연극 <환생경제>의 전편을 오마이뉴스가 방송했다.
지요하 (막시모. 소설가. 대전교구 태안성당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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