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지역 파견작가 오수연 회원이 보내온 세번째 기고문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집에서
새벽 3시, 스위스 여인 '수잔'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수잔이 귓가에 속삭였던 말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무슨 단어였더라. 그게 무엇이든 우리가 잠들기 전에 만약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올 경우 빨리 대응하기 위해 정해 놓았던 약호였다. 잠이 달아났다. 방금 전에 멀지 않은 데서 뭔가 터졌다고 했다. 창밖에서 땅이 이를 가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들린다. 탱크다. 나는 커튼으로 창을 가려놓지 않은 유일한 방인 옆방으로 달려갔다.
"문 닫아!"
창가에 서있던 이탈리아 청년 '파비안'이 허리를 숙이며 억눌린 목소리로 경고한다. 복도의 불빛이 열린 문을 통해 창에 비치면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문을 닫고 더듬거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어두운 거리에 탱크 한 대가 악령처럼 솟아 있다. 귀청을 갉는 소음을 못들을 리 없건만, 감히 불을 켜거나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집은 하나도 없다. 수십 년 동안 이렇게 살아와서 마을 사람들은 침략 당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안다. 탱크 말고도 네 대의 지프가 돌아다니고 있다고 파비안이 말했다.
"올해 들어 저들이 마을 안까지 진입한 적은 처음이다. 저들이 오는 거다."
자, 우리가 행동을 개시해야 할 때다. 이스라엘 군대의 첫번째 목표로 예상되는 집이 우리가 묵고 있는 바로 이 집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집을 지키기를 원한다. 이 집은 이 마을 출신의 첫번째 순교자 (이스라엘 측에서 보면 자살 폭탄 테러범)의 집이며, 순교자의 집들 중 이스라엘의 보복으로 파괴당하지 않고 남아 있는 마지막 집이다. 우리 같은 외국인 평화운동가들이 방패가 되어준 덕분에 이 집이 이제껏 무사하고, 외국인이 떠나면 곧바로 폭탄이 떨어지거나 불도저가 들이닥칠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군대는 어느 날 누구네 집에 외국인 몇 명이 있는지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모든 움직임을 귀신 같이 안다고 했다. 총으로 위협하고 돈으로 매수하고,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등등 갖가지 방법으로 수많은 스파이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을 의식해서 공격을 삼간다는 것도 지금까지의 이야기일 뿐, 언제 그들이 돌변할지 누가 알랴. 얼마 전에 가자 지역 라파 난민촌에서 미국인 평화운동가 '레이첼 코리'가 이스라엘 군대의 불도저에 깔려 죽었다. 외국인들을 쫓아내려고 그들이 이 집 앞에 부비 트랩을 설치한 적도 있다고 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곧 법이다.
잠들기 전에 우리가 세워놓았던 대책이란 별 게 아니다. 이 집을 최후까지 사수하기 위해 몸을 묶어 두는 용도로 벽에 쇠사슬을 박아놓았지만, 나를 포함해서 그 날 이 집에 묵은 세 사람 중 아무도 쇠사슬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이스라엘 군대가 오면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집 가족들을 깨우고 그들과 같이 행동하며, 수잔과 파비안은 야광 조끼를 입고 밖에 나가 이스라엘 군인들을 설득해보기로 했다. 설득이 통하지 않으면, 이 집 가족들을 도와 집이 무너지기 전에 가재도구 하나라도 더 나르는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합의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군대는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지만. 작년 4월 그들은 제닌 난민촌을 초토화하면서 집과 함께 그 안에 든 사람들까지 깔아뭉개 공식집계로만 50 명 이상(팔레스타인 쪽 집계로는 300 이상)을 죽였다.
현관을 나와 빗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어두운 계단에 서서야 비로소, 나는 내 가방부터 챙겨 와야 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내 점퍼와 신발이 창문이 있는 그 방에 있다. 그러나 내가 그걸 가지러 돌아가 방문을 열면 파비안이 또 질겁을 할 것이다. 게다가 아래층의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게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었다. 아래층의 가족들은 웃음으로 나를 맞았다. 어머니는 조그만 전기난로를 나를 향해 돌리고는, 담요를 덮어주며 내게 거기 드러누워 잠이나 더 자라고 했다. 무서워 하지마, 저것들은 금방 가버릴 테니. 어머니가 손짓으로 말했다. 그러나 난로의 온기는 다리미보다 못하고, 담요는 눅눅했다. 모든 것이 차갑고 습기를 흠뻑 머금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뛰어나왔다고 해도 나는 스웨터까지 껴입고 있건만, 대책 없이 몸이 떨렸다. 이를 갈며 탱크가 다가왔다. 겁나지 않는다고, 추워서 이럴 뿐이라고 나는 손짓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꼭 쥐었다. 거리를 살피러 위층에 올라갔던 그녀의 아들이 현관을 들어서며 씩 웃어보였다. 그 매력적인 웃음은 내가 느끼는 추위를 상당히 둔화시켜 주었다. 탱크가 멀어져갔다.
열 달 전에 아들을 잃은 이 어머니의 이름은 '할리마'이다. 작년 5월 28일 저녁 6시 40분, 그의 막내아들 '지하드'는 텔아비브의 한 식당에서 혁대에 숨긴 폭탄을 터뜨렸다. 그 자신과 이스라엘인 두 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쳤다. 가족들은 그 며칠 전에 지하드가 집을 나가 매우 걱정하고 있었지만,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그 주인공이 막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그들은 뭔가 잘못됐다고, 막내는 언젠가 돌아온다고 생각했다. 악의에 찬 언론들이 보도했듯이, 성공을 빈다며 어깨를 두드리고 막내를 보낸 적이 그들은 결코 없다. 막내의 죽음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는 지금, 그들은 평생 계속될 질문을 떠안게 되었다. 우리 막내가 왜 그랬을까?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그래도 그는 겨우 열여덟 살짜리 우리 막내인 것이다. 막내는 어머니의 귀염둥이였고 곧잘 농담으로 가족들을 웃겼으며, 어디가나 친구들을 몰고 다녔다. 그런 아이가 홀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나블루스 외곽 이곳 '발라타' 마을은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정한 경계 밖으로 쫓겨난 난민들이 모여 사는 난민촌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그리고 1967년 이른바 '6일 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인 민족은 삶의 터전을 잃고 대거 이동했고, 인구의 60퍼센트가 사실상 난민들이다. 빈손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아픈 기억 때문에 난민촌 주민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의식이 높으므로, 탄압도 각별하게 받는다. 작년 초 이 마을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무차별하게 쏘아댄 총격으로 길을 가던 주민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부상자를 구하기 위한 앰뷸런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하드는 친구를 살리려고 뛰쳐나갔다가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그가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마을은 다시 한 번 아파치 헬기까지 동원한 이스라엘 군대의 공격을 받았고, 저녁거리를 사갖고 대문을 들어서던 큰 형과 조카의 등 뒤에서 탱크 포탄이 덮쳤다. 큰 형은 척추가 부러져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조카는 오른손 검지를 잃었다. 4월 28일, 이스라엘 군대는 지하드를 비롯해 15살 이상 50 살 이하 마을의 모든 남자들을 손을 뒤로 묶고 눈을 가린 채 체포해갔다. 남자들이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당하는 그 며칠 사이, 마을은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미로처럼 복잡한 재래 마을을 자기들이 종횡으로 맘껏 관통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군대는 집집마다 벽에 구멍을 뻥뻥 뚫어놓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침실과 거실은 그들에게 군대 이동 통로일 뿐이었다. 값나가는 모든 물건은 없어졌고 없어지지 않은 것들은 파괴당했다. 그 며칠 뒤, 지하드는 학교에서 평화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다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폭탄을 맞아 오른쪽 허벅지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시력을 크게 손상당해 오른쪽 눈은 거의 실명할 뻔했다.
5월 22일, 지하드가 크게 의지하고 따르던 사촌 무하마드가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이스라엘의 대포 8발을 맞아 즉사했다. 그 대포알 한 알마다 500개의 날카로운 못이 내장되어 있었다. 같이 있던 두 명의 친구들도 그 자리에서 죽었고, 300 미터 떨어진 곳을 지나가던 행인은 중상을 입고 며칠 뒤에 죽었다. 그보다 멀리 있던 사람들 8 명도 크게 다쳤다. 마을 민병대의 우두머리였던 마흐무드는 수배를 당해 도망 중이었다. 스파이들이 일러바치지 않았다면, 그 날 그 시간에 외진 공동묘지를 향해 멀리 산꼭대기에서 이스라엘 부대가 장거리 대포를 발사할 리는 없었으리라. 폭음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이 지하드였다.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촌의 머리를 들어올렸을 때, 지하드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촌의 가슴을 받친 지하드의 손이 그의 등으로 뚫고 나왔다. 지하드는 기절했으며, 병원에서 깨어난 뒤에도 경련과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마흐무드의 장례식에서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쓰러지고 자신조차 연거푸 공격을 당한 터라, 지하드는 다음번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자기를 죽이고 말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내가 죽을 차례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살려두지 않을 거다. 내 옷을 간직하고 이걸 볼 때마다 나를 기억해 달라."
지하드는 옷을 친구들에게 나눠주었고, 음식을 거부하며 무하마드의 무덤 앞에 사흘 낮밤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전화로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공포가 없는 땅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아들에게 돌아오라고 울며 호소했지만, 지하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머니는 지하드가 말한 공포가 없는 땅이라는 게 여기보다 살기 좋은 다른 나라나 도시를 뜻한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 사흘 뒤 지하드는 허리에 폭탄을 감고 텔아비브의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때도 그는 이십일 전쯤 차에서 내리다 폭탄을 맞은 상처에서 피와 고름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탱크가 다시 다가왔다. 추워서 떨릴 뿐이라는 내 말을 어머니는 알아들은 것 같다. 딸더러 뜨거운 차를 끓이라고 했다. 외투를 입으라고, 덧붙여서 딸한테 이르는 몸짓이 나를 약간 불안하게 했다. 지하드의 형 '알라'가 다시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어머니는 자신도 겉옷을 찾아 입었다. 딸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탱크가 왔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아랍 말을 모르건만 신기하게도 나는 딸이 전화에 대고 하는 말을 해독했다. 위층에서 내려와 고개를 숙이고 현관을 들어서는 알라의 얼굴에서, 이번에 나는 미소 대신 하얗게 악물린 이빨을 보았다. 어머니는 염주를 돌리며 알라신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비를 맞으며 무너진 집 앞에 서 있을 각오를 했다. 집이 무너지기 전에 뛰쳐나갈 시간이 있다면 말이다. 딸이 유리잔에 뜨거운 차를 가득 부어 내게 건네었다.
그날 밤 탱크는 여러 번 집 앞을 오락가락했다. 끝까지 내게 위안이 된 것은 손으로 감싸 쥔 찻잔의 온기였다. 괜찮겠지, 정말 위험하다면 이 집 식구들이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지는 않겠지. 새벽 네 시쯤 탱크는 마을을 떠났다. 고작 한 시간 동안인데 내게는 며칠 밤처럼 길고 지긋지긋했다. 거봐, 그들이 가버릴 거라고 내가 그랬지? 어머니가 내 찻잔에 뜨거운 차를 채웠다. 정각 네 시, 모스크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죽음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삶을 되찾은 듯한 환희를 느꼈다.
"하이야 알라 쌀라- 쌀라 카이루민 놈- (잠에 빠져 있지 말고 깨어나 기도하라.)"
내가 위층으로 돌아갔을 때 수잔과 파비안은 야광 조끼를 입은 채 아래층에서 올려 보낸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배가 부르도록 차를 마시고 온 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무리 다급한 순간에도 차를 마신다고 했다. 파비안이 이스라엘 초소에서 난사되는 총알을 피해 팔레스타인 가정에 뛰어든 적이 있는데, 다같이 창문 밑에 웅크리고 있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차를 권했다는 것이다. 아래층의 식구들도 나처럼 무너진 집의 잔해 앞에서 차가운 비를 맞을 각오를 했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동이 튼 뒤에 들으니, 간밤에 이스라엘 군인들은 플라스틱 폭탄으로 무하마드의 집 대문을 폭파하고 남동생을 체포해갔다고 했다. 무하마드의 형들은 감옥에 갇혀 있고, 남아있는 19살짜리 동생 한 명을 마저 잡아가려고 그들은 탱크 한 대와 지프 네 대를 몰고 왔던 것이다. 그 형제들이 무슨 죄를 지었나? 이스라엘에 저항하다 피살당한 사람의 가족이라는 죄뿐이다. 그 죄목으로 그들은 이미 몇 차례나 감옥살이를 했고, 마을을 거미줄처럼 옭죈 감시 초소 어느 한 군데에서라도 신분이 들통 나면 다시 잡혀 들어갈 것이며, 출옥한 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간밤에 지하드의 형 알라나 그 위의 형들도, 자살 폭탄 테러범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잡혀갈 각오를 했을 것이다. 또 앞으로도 하루하루, 그런 각오 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이 번에는 사촌이 잡혀갔지만, 다음에 탱크가 왔을 때는 누구 차례일까? 또 어느 집이 파괴당할 차례일까?
설령 테러가 천인공노할 범죄라 할지라도, 테러범 본인 이외에 가족이나 주민들에 대한 이스라엘 군대의 보복은 국제법상 전쟁 범죄다. 그러나 건국의 역사 자체가 국제법 위반의 역사인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의 당대만이 아니라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고 장차 나올 후손까지 앞질러 가서 보복한다. 지하드는 이 마을에서 나온 첫번째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였지만, 그가 그러기 전에 이미 이 마을은 테러리스트들의 소굴로 낙인찍혀 수십 년 동안 보복을 당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불행이 겹친 듯한 지하드 가족의 비극이, 여기서는 특별할 것도 없는 전형적인 사례일 뿐이다. 모든 가정이 한두 명씩은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가족이 잃었고, 몇 명은 불구자가 되었다. 이들이 왜 이런 보복을 당했나? 테러리스트 팔레스타인 조상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왜 테러리스트인가? 장차 테러리스트가 될 후손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인은 테러리스트가 안 될 방도가 없다. 지하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남겨준 단 하나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지하드 이후 이 마을의 십대 소년들 5명이 더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지하드의 형 알라에게 나는 잔인한 질문을 했다. 지하드의 테러로 희생당한 2 명의 이스라엘 시민들과 그들의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알라는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자기 손을 내려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들 가족의 슬픔을 이해한다. 우리는 자식이나 형제를 잃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너무나 잘 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수십 년 동안 그렇게 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파치 헬기로 마을을 포격할 때 남녀노소를 가린다고 생각하는가? 내 동생 지하드는 그게 얼마나 나쁜 짓인 줄 저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스톱 사인이다. 그만하라고. 제발 이제 그만하라고. "
테러나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알라는 싫어했다. 그에게 동생은 더 많은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순교자이지, 테러리스트 따위가 아니다. 무엇이 테러인가? 지하드의 죽음을 전후로 3개월 동안 이 마을에서 25명이 살해당했다. 이스라엘측은 통행금지 시간에 집 앞에 서 있는 사소한 위반조차 테러로, 위반자는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처벌은 죽음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모욕적인 손짓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총에 맞아 뇌손상을 입은 한 소년의 말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가족과 친척들이 죽는 것만 봐왔다. 기뻤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크면 이스라엘 군인들을 죽이고 나도 죽어버릴 것이다."
그의 나이는 열 살이다. 재작년에 가자 지역에서 죽은 15살 소년 '파레스'도 이스라엘의 규정에 따르자면 테러리스트다. 그가 이스라엘 탱크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강철로 만들어진 탱크에 던진 것은 돌멩이였고, 맨 몸에 맞은 것은 총알이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앰뷸런스를 막아 그가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게 만들었다. 그도 자기 눈앞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을 부축하려다가 팔에 총격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여러 번이나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져 군인들에게 쫓겼으나, 너무나 가난해 늘 똑같은 셔츠를 입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13일 뒤면 다가올 그의 15살 생일날 특별히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들떠있을 때, 그는 친구들에게 자기가 그때까지 살아있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드의 가족들 사진을 찍은 다음 내가 어머니 할리마의 사진을 찍으려 하자, 뜻밖에 그는 지하드의 사진을 벽에서 내려 품에 끌어안았다. 비통한 기억을 상기시킬까봐 나는 그 앞에서 지하드의 이름조차 꺼내기를 삼가던 터였다. 사진을 더 찍고 싶어서 팔에 감기는 딸을 어머니는 쑥스러운 미소로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지하드하고 찍을래. 지하드하고 나, 둘이."
어머니는 사진관 포즈로 뻣뻣하게 목에 힘을 주었으나, 내가 카메라 단추를 누르는 찰나를 못 이기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어머니는 눈가를 훔쳤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통곡하지 않는다. 그들은 탱크가 다가와도 웃음을 띠고 차를 마시며, 살기 힘들면 힘들수록 안간힘을 써서 품위를 지킨다. 자살 폭탄 테러를 하면 모종의 단체나 사담 후세인이 가족들에게 돈을 준다는 소문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들은 집이 텅 비어보이도록 가난하다. 그래도 돈이나 비싼 고기 같은 것을 절대로 선물로 받지 않는다. 반대로 이들은 내게 자기들에게 더 필요할 두툼한 신발을 선물했다. 자다 말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던 밤, 샌들을 신고 떠는 내가 어머니는 가엾어 보였다고 한다. 나는 그 선물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살아남아 어른이 될 수 있다는 희망만 있었다면, 18살짜리 소년 지하드가 자살 폭탄을 터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팔레스타인인들은 끝까지 의연하게 견뎌내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그들도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용인하지 않는다. 알라는 자기들이 죽은 동생과 같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탕에서 지하드가 머리를 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부엌에 들어갔다가 어머니를 위해 커피를 만들고 있는 그와 마주치기도 한다. 왜 그랬니, 나는 늘 그에게 묻는다. 여기 우리를 남겨 두고 너만 가버릴 수가 있느냐고. 너는 공포가 없는 땅으로 갔지만, 죽음이 가득 찬 여기 남은 우리는 어쩌느냐고.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형인 내가 동생에게 묻는다."
이 땅에서 악순환되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이 아니다. 보복을 가장한 이스라엘의 학살과 팔레스타인의 필사적인 저항이다. 이 죽음의 공기, 팔레스타인인들을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이 무법의 폭력을 나는 도리어 테러리즘이라고 부르고 싶다. 미국이 진정으로 제 3 세계 민중의 해방을 원한다면, 왜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는가? 백 퍼센트 순수한 압제자는 이라크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 독재인지 민족주의인지 헛갈릴 우려도 없고, 선동으로나마 대중의 호감을 살 성의마저 없는, 미국의 대의명분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상대다. 왜 미국은 싸워야할 압제자에게 오히려 무기를 주어, 해방시켜야 할 팔레스타인 민중을 짓밟게 하는가? 요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라크 국민들을 돕기 위해 용기를 잃지 말라고 국제전화걸기운동과 헌혈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라크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제아무리 압살해도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팔레스타인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밤중에 다발총 소리가 들린다. 이 둔탁한 총소리는 이스라엘 군인이 아니라, 낮 동안 숨어 있던 팔레스타인 독립전사들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고.(발라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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