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한 병사가 전쟁을 상상하는 장면이 있다. 그가 꿈꾸는 전쟁은 이런 식이다. 전쟁을 하고 싶어하는 자들, 그러니까 대통령부터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장관들이 대표선수로 나서 적국의 고관들과 씨름을 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하고 싶은 자가 하라. 전쟁을 하더라도 총칼로 하지 말라. 이런 순진한 생각이 현실에서도 먹혀들 거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 병사 역시 자신이 처한 절망적 상황 탓에 이런 생각을 떠올렸을 뿐이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 산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반 세기가 지났지만 휴전선은 관념이 아닌 실재이며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지도 못한 무능한 정치인들이 여전히 득세한다. 전쟁은 우리 삶의 형태를 뒤틀었으며 그렇게 뒤틀린 채로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았다. 전쟁으로 신분상승을 이룬 자들이 오늘날의 지배계층을 이루었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다.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자들이 무고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책임을 질 리도 없다.
또한 지금 우리에게 전쟁 위협이란 매회 종영방송이 미뤄지는 연속극처럼 지루한 일상이 되고 말았다.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선동은 가득하지만, 새로울 것도 없는 지리멸렬한 연속극처럼 전쟁 위협 역시 앞으로도 꾸준히 방영될 것이다. 전쟁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라 그와 똑같은 주의를 기울여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자는 뜻이다. 현대의 전쟁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구분하지 않고 파괴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전쟁을 통해 자신만은 어떤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거라 믿는 자가 있다면 그의 신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게 해줘야 한다.
<2010.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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