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또다시 불행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애써 쌓아올린 화해의 분위기는 물거품이 되고, 분노가 용기를 대신하려 들고, 불신이 지혜를 가장한다. 어느 원로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했다는데 나는 전쟁이 무섭다.
유럽에서 세계대전의 우려가 현실이 되려 하던 1930년대 중반에 프랑스의 극작가 장 지로두는 희곡 <트로이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를 발표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의 미녀 헬레나를 유혹하여 자기 나라로 데려오자, 그리스 연합군이 전함을 몰고 트로이 해안으로 쳐들어왔다. 헬레나를 되돌려주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텐데, 트로이의 주민들은 지상 최고의 미녀인 그녀의 거취에 자신들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쪽에서도 까다로운 조건을 붙인다. 파리스와 헬레나 사이에 아직 육체관계가 없었음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파리스를 비롯한 트로이의 남자들이 성불능자들임을 고백하는 꼴이기에 트로이 쪽은 오히려 두 사람이 동침했다는 증거를 찾으려 든다. 원로들은 벌써 군가를 제정하고 그리스군을 ‘암소의 새끼들’로 부르기로 결정한다.
신들도 이 위기에 당연히 개입하나, 그들은 두 나라의 행복과 안녕보다는 이 기회에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고 세력 판도를 넓히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러나 제우스는 트로이의 맹장 헥토르와 그리스의 지장 율리시스를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 있었다. 평화를 갈구하는 헥토르의 뜻을 받아들여 율리시스는 헬레나가 아직 ‘순결’한 상태임을 그녀의 남편 메넬라스에게 설득하기로 약속한다. 헥토르는 이제 트로이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율리시스는 비관적이다. 협상 테이블이 아무리 현명해도, 그것은 오만함과 증오의 바다에 떠 있는 쪽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율리시스의 예견은 옳았다. 헥토르는 호전적인 그리스 장군 오이악스가 자기 뺨을 때리고, 면전에서 자기 아내 안드로마케를 끌어안아도 인내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트로이 쪽에서 일어났다. 호전적인 계관시인 데코모스가 평화주의자들을 비겁하다고 탄핵하며 민중들에게 전쟁을 부추긴다. 헥토르는 선동을 막기 위해 그를 창으로 찌른다. 비명소리에 양쪽 사람들이 몰려들자, 데코모스는 죽어가면서, 자기를 찌른 것이 그리스의 장군 오이악스라고 외친다. 트로이는 분노하고 전쟁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희곡 하나를 간추린다는 게 너무 길어졌지만, 전쟁은 늘 이렇게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전쟁은 바보짓이다. 분쟁의 해결책 가운데 전쟁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하는 것은 없다. 전쟁은 우리 삶을 파괴하고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떤 명분도 이 비극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핍박받는 민족의 독립전쟁 같은 것을 거론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핍박하는 일도 실은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다. 이 오월에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들은 어느 골목을 헤맬까. 지금 축제를 벌이는 젊은이들의 소식을 어느 골짜기에서 듣게 될까. 공부하고 일하고 춤추는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훈장을 뽐내며 돌아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음의 상처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민족의 절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능력을 스스로 멸시하고, 우리가 이 민족이었던 것을 저주할 것이다.
나는 전쟁이 무섭다. 오만과 증오에 눈이 가려 심각한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이 무섭다. 전쟁을 막을 지혜와 역량이 우리에게서 발휘되지 못할 것이 무섭다.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2010.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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